쿤이 즉시 힘을 휘감아 앞으로 내질렀다.
라라가 눈을 크게 뜨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허나, 빠르지 않은 속도. 허상은 허상일 뿐. 단순한 능력은 높지 않다고 쿤은 생각했다.
챙—!
헌데, 그 순간 아쿤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희뿌연 상태로 일렁이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쿤이 아쿤을 회수하고 자세를 취했다.
쉬익.
한 호흡을 쉬고 곧바로 튕겨나갔다.
상대의 목을 노렸다. 그려지는 궤적이 섬뜩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짧은 단검을 손에 쥔 채 궤적을 빗겨냈다. 힘이 어긋나고, 중심이 무너졌다. 검을 맞대고, 힘을 흘리는 기교.
“흥—!”
그런 거라면 쿤도 익숙하다.
발을 끌어 몸의 중심을 회복하며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연속적으로 검과 검이 충돌해서 불꽃을 만들었다. 어두운 동굴 안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키릭.
서로의 검날이 맞닿았다.
힘은 박빙. 전력을 쥐어짬에도 밀려나는 기색이 없었다. ‘이것도 막아봐라.’ 쿤이 이를 악물고, 의식의 검을 끌어왔다. 아쿤이 빛나고 거대한 기세가 상대를 찍어 눌렀다.
“……뭐?”
하지만 이것은 상대를 베어내지 못했다.
의식의 검 너머, 상대의 검날 위로도 하얀 빛이 올라와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물린 두 기운은 서로를 침범하지 못하고 그대로 교착 상태를 이루었다.
쿤이 당황했다.
이런 곳에서 의식의 검을 자신 수준으로 사용 할 수 있는 적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을 밀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뿌연 형태의 괴인과 라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라는 입을 벙긋거리며 연신 무언가를 말 하려는 시늉을 보였다. 마치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것 같다.
“더 이상은 속지 않는다.”
이 동굴의 지독한 함정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통스러운 것이 안 되니 이번에는 라라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존재까지.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해서 둘의 발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굴과 연결 된 흔적이 안 보인다. 실제라서? 아니면 한 번의 실수로 이것이 수정된 탓에?
‘잠깐. 라라가 함정이라면 이 괴인은 뭐지?’
라라로 혼란을 주려는 거였다면 그녀 혼자서도 충분하다.
안개와 같은 형태의 괴인은 대체 무엇일까. 라라를 지키는 모습으로 혼란을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쿤은 살짝 혼란스러워했다.
타앙—!
그 순간, 갑작스럽게 안개 형태의 괴인이 달려들어 검을 부딪쳐 왔다.
쿤이 황급히 아쿤으로 방어 한 뒤 자연스럽게 반격으로 들어갔다. 목, 심장, 복부. 치명적인 부위를 중심으로 아쿤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허공에서 단검이 요란하게 얽혔다.
쿤의 검세는 빠르고 간결했지만, 상대의 방어는 이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를 공격 할지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얽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의식의 검으로 큰 공격을 퍼부어도 소용없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강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드래곤도 있고, 이단에 타락한 초월종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싸우는 거 같다. 작은 움직임. 미세한 속임수. 능숙한 회피. 모든 것이 같았다. 어떤 짓을 해도 눈앞의 상대를 이길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넌……대체 뭐지?”
쿤이 아쿤을 내리며 물었다.
그러자 안개 형태의 상대 역시 단검을 내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조금 물러나더니 앞으로 뛰었다.
위치에는 라라가 있었다.
그녀는 도망도 못 간 채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멈춰—!”
쿤이 반사적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라가 동굴의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조건 반사와 같은 행동이었다. 괴인의 앞을 막아 단검을 튕겨내고는 복부를 후려쳤다.
처음으로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턱……
그리고 라라가 그의 팔을 잡아왔다.
‘아차……!’ 순간 쿤이 당황했다. 이것이 함정이라면. 괴인의 행동이 계획된 거라면 지금의 이 접촉이 무언가 안 좋은 결과를 불러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팔을 잡은 라라는 그냥 그대로 쿤의 품에 안겼을 뿐이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가 그대로 느껴졌다. 쿤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내려다 봤다.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녀는 이곳이 있을 수 없다. 앞서 나타났던 것처럼 동굴의 함정이 분명하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팔에 닿는 온기는 그녀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모르겠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거지?’
그가 그렇게 혼란에 가득 차 있을 때, 얻어맞고 물러났던 괴인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단검을 거꾸로 쥐어서는 쿤에게 던졌다. 무기를 포기하는 동작. 마치 더 이상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 하는 거 같았다.
‘항복하는 건가?’
온통 수수께끼투성이다.
쿤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생각했다.
‘일단……라라는. 라라가 맞든 함정이든 당장 내게 위해를 주지는 않아. 앞선 것처럼 이상한 감각이 몸을 잠식하지도 않고. 그리고 저 괴인은 애초부터 나를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무기를 넘겨 준 것도 그러하고. 혹시 라라가 나를 헤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싸웠던 건가?’
마지막 공격 역시 라라와의 접촉을 위해 의도했다면 맞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괴인은 대체 무엇인가? 동굴의 환상이라면 말이 안 된다. 혹시 아도란이나 세이혼? 아니, 그것도 아니다. 둘은 괴인의 움직임을 흉내 낼 수 없다. 괴인의 전투력은 쿤 자신과 동일. 완전히 같은 수준이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서준경 신 님?”
불쑥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그러자 괴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입을 길게 찢었다. 뿌연 형태에 얼굴도 구분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웃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당신인 겁니까?”
믿기 힘들어 쿤이 다시 물었다.
신과는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에서는 아니다. 갑자기 불쑥. 그것도 뿌연 연기와 같이 나타나 눈앞에 서 있다는 건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쿤, 조심해라!! 그건 미궁의 함정이야!”
그 순간, 동굴 뒤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세이혼과 루루. 그리고 뮬라였다. 이곳저곳 상처 입은 상태로 황급히 달려오더니, 일정 거리를 두고는 멈춰 섰다.
“미궁? 함정이라고?”
“마라의 방은 미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르고의 제어가 실패한다고 해도 미궁에 그 존재를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기억을 살펴 대상을 혼란으로 몰고 간다. 절대 속으면 안 돼!”
“……”
쿤이 라라를 내려다 봤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몸만 떨고 있었다. ‘이게 환각?’ 쿤이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주변을 살펴도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었다. 이곳은. 이 미궁은 갈고 닦은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오빠, 옆에 있는 건 언니가 아니에요! 언니는 지금 처소에 있잖아요! 이곳에 있을 리 없어요!”
“조심하게. 자네 기억을 뒤져서 올라온 존재는 감각을 좀먹고 이지를 앗아간다네.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정말로 자신의 친구인지 알 수 없게 되지. 그리고 종국에는 미쳐서 이 미궁을 떠도는 존재가 돼 버리네.”
“뮬라……그럼 너희는 어떻게 무사한 거지? 미궁이 그런 공간이라면.”
“탑의 비전이네. 하지만 길게는 무리야. 내가 길을 안내 할 테니, 따라오게나. 시간이 없어!”
뮬라가 손을 내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탑의 비전. 충분히 그럴싸한 이야기다. 신비한 힘을 다루는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라라와 괴인이 동굴의 함정이고 저들이 동료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괴인과 라라는 이런 행동을 한 거지?
쿤은 입술을 깨물었다. 핏물이 배어나왔다.
‘둘 중 하나는 환각이다.’
쿤이 심호흡을 하며 상대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지금 나타난 존재들은 모두 기억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 루카스나 슈엥카. 괴로운 것들이 먼저 나타나 절망으로 자신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면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
‘라라와 괴인이 환영이라면 무엇을 노릴까?’
‘세이혼과 루루 등이 환영이라면 무엇을 노릴까?’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쿤!! 더 이상 버틸 수 없네!”
“젠장! 이렇게 우유부단한 모습이라니!”
세이혼이 갑자기 위치에서 튕겨나갔다.
검이 괴인을 노리고 있었다. 번쩍 하고 검광이 튀고 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만, 괴인은 무기가 없다. 쿤이 앞서 받아 두었던 단검을 들고 고민했다.
괴인은 연달아 뒤로 밀렸다.
실력 자체가 세이혼보다 뛰어나 균형을 맞추고는 있었지만 무기의 유무는 상당히 컸다. 그대로 둔다면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치고 말 것이다.
화르륵……!
그때, 뜨거운 열기와 함께 루루의 머리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빠, 언니의 환영을 놔요! 그대로 계속 있으면 당하고 말 거예요!”
“맞는 말이네. 이대로 계속 접촉하고 있으면 환영에 먹히고 말 거야. 내가 돕겠네. 이쪽으로 오게나!”
쿤이 라라를 봤다.
그녀는 겁먹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은 달싹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내용. 혼란이 가중되고 쿤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이시여.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쿤이 무릎을 꿇었다.
양 쪽 다 진짜 같다. 모든 감각을 끌어와도 이를 분간하는 건 무리. 어느 한 쪽을 확실하다 말 할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이 가운데 환각이 아닌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아 낼 수 있을까?
기억을 읽고 환영을 불러온다고 해도 미궁이 택하지 않은 선택지. 진짜라면 할 테지만 미궁의 목적상 하지 않을 행동.
콱. 입술을 강하게 깨문 쿤이 아쿤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 박자 쉬며 모두를 둘러봤다. 시선에 쏠려 있다는 것을 때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아쿤을 심장으로 내리꽂았다.
“쿤!!!”
“오빠!!”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동작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모두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환각이 가져 올 수 있는 선택지. 살리느냐 죽이느냐. 미궁은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해 존재 할 터. 그 대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막을 리 없다.
허무한 손짓, 말뿐인 입모양.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는 라라.
기이이잉—!
심장에 박아 둔 신성력이 아쿤과 만나 강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자살 할 생각은 없었다. 의식의 검과 의식의 검이 충돌하면서 강대한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품 안에 두었던 라라가 밀려가고, 괴인을 비롯한 장내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쿤을 직시했다.
“거짓에 속지 않는다!!”
막대한 에너지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동굴의 어둠이 밀려나고 강렬한 노이즈와 함께 주변에 있던 인물들이 햇살에 지워지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세이혼도, 루루도. 심지어 온기를 느끼던 라라조차. 모두가 한 점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졌다.
“쿨럭……!”
그리고 쿤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자살할 생각은 없었지만 심장 바로 앞에서 힘을 충돌시켰다. 그 여파가 없을 리 없었다. 입가로 피가 배어 나오고 머리가 윙윙 거리며 울렸다. 이 순간 적이 찾아온다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목을 내어줄 판이었다.
“재미있군.”
“……!”
귓가로 스며오는 목소리.
“정말로 운명을 비틀어 냈다는 건가?”
차갑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
생전 처음 듣는 유형의 것이었다. 귓가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미궁을 예상해서 그녀를 막았다는 건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였군.”
“……크윽!”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파괴와 재생. 그 고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사라졌다.
쿤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사라지는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발끝. 희미한 모습이지만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흰 눈의 남자……’
쿤의 의식이 점차 어둠으로 침몰되어갔다.
※작가의 말
페이크다!
모두 환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