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이 카넬을 제압할 무렵, 뮬라와 마라의 싸움은 점차 치열해져갔다.
불꽃과 은색 섬광이 주위를 잠식하며 벽과 바닥을 긁어갔다. 부서진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큭큭. 날 막았다고 좋아 할 필요는 없다.”
“닥쳐. 물어 볼 게 있어서 살려두는 거뿐이니까.”
“그림자 사도에 대한 것 말인가? 의미 없다. 그분은 이미 네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림자 사도? 흰 눈의 남자를 알고 있는 거냐?”
카넬을 무력화 시켜 전장에서 벗어나려는 찰나, 그가 쿤의 귀를 잡아끄는 말을 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너희들은 그분의 손아귀 안. 부질없는 수레바퀴 속에서 죽어 가거라.”
“똑바로 말 해! 그놈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대체 뭐하는 놈이지?”
“하하하! 파괴의 끝에서 재생이 오니! 멸망의 점은 시작의 노래와 같다!”
“무슨 개……”
부우우우……!
그 순간, 카넬의 몸이 갑작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느껴지는 강렬한 위기감. 쿤이 루루를 세이혼에게 밀치고는 곧바로 의식의 검을 사용해서 카넬의 목을 베었다.
‘멈추지 않는다!’
목이 잘렸음에도 몸은 여전히 부풀어 올랐다.
피한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쿤 자신은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무리. 이를 바득 갈고는 힘을 다급히 끌어왔다. 흰 색 빛 무리가 손 위에 새겨졌다.
콰드득—!
기다렸다는 듯 카넬의 몸이 폭발했다.
새카만 기운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솟구쳤다. 그리고 쿤이 만들어 둔 흰 색 장벽과 충돌했다. 방어를 위한 의식으로 만들어 둔 방패.
“크으윽!”
터무니없을 정도의 압력이 쿤을 짓눌렀다.
손부터 어깨까지. 상체가 전부 덜덜 거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코에서 핏물이 나오고, 악다문 이가 부러질 듯 마찰했다.
‘흩어져라!’
거칠고 무질서한 힘의 끝자락을 잡아서는 좌우로 뜯어냈다.
이단의 힘이 타오르고 마법적 폭발의 여력이 흰 장벽 너머로 흘러갔다. 세이혼이 황급히 다가와 남은 여력을 의식의 검으로 베어냈다. 주변 수 미터 내 바닥이 새카맣게 물들고 방 안, 구조물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하아……하아……”
“오빠, 괜찮아요!?”
다급히 다가오는 루루에게 무어라 말 할 여력이 없었다.
만약 힘을 다루는 요령이 조금만 더 부족했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태창이 존재하고 단순하게 의식의 검으로 의존하려 했다면 실패했을 터. 어쩌면 신은 이 상황까지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쿤이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바닥을 봤다. 폭발한 카넬은 가루조차 남지 않아, 바닥에 기다란 흔적 남이 남아 있었다. 제국의 대마법사. 그 이름 치고는 초라한 죽음이었다.
“쿤, 자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아……그럭저럭. 하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다.”
카넬은 확신을 가지고 말 했다.
단순히 자폭을 위한 말장난은 아니었다. 흰 눈의 남자가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무언가 준비를 해 두었다는 것.
우우우우……!
그리고 대답이라도 하듯, 방 뒤편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솜털이 바짝 서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쿤이 뒤를 돌아봤다. 설마 자신 혼자만 들은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루루도 세이혼도 모두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괴물인가?”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쿤이 곁눈질로 옆을 살폈다.
뮬라와 마라의 싸움은 쉽게 결판이 날 거 같지 않았다. ‘둘은 뮬라를 도와 줘.’ 세이혼과 루루에게 뮬라를 맡기고, 쿤이 그대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렸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은 뒤편으로도 꽤나 큰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틈 사이로 새카만 동굴이 연결되어 있었다.
‘유르고의 조각을 사용한 건가?’
들어갈수록 혐오감이 짙어졌다.
전형적인 이단의 느낌. 봉인이 깨어지고 활성화 된 유르고의 힘을 무언가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만, 그 대상이 무엇일지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미 괴물들도 대충 다 처리하고, 적이 될 만 한 세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짚이는 적이라면 흰 눈의 남자……
‘하지만 그가 이단의 힘을 사용한다고?’
왜인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안 맞는 옷이라 해야 할까. 흰 눈의 남자는 분명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이 있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이단의 힘을 횡횡해서 달려들 거라는 느낌은 없었다.
“……!”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쿤이 황급히 몸을 숙이고 의식의 검으로 그 궤적을 베었다. 무언가 잘리는 느낌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짚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피했다.
“멈춰라!!”
놓칠 수는 없다.
쿤이 지면을 박차며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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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그림자를 쫓아왔을까.
쿤은 자신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파악 할 수 없었다. 초월적인 감각은 방향과 거리. 아무리 깊은 곳에 들어가도 위치를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각이 막막했다. 사방을 둘러보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가 맞는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함정인가?’
어쩌면. 하지만 이단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적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함정이라면 함정대로 박살내면 그만.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한 채 주변을 살폈다.
‘아도란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감각이 흐려진 것과 같이 아도란과의 연결도 끊겼다.
어차피 미궁 행을 선고받고 난 뒤 다시 대기실로 이동한터라 일단은 문제가 없다. 이곳만 정리하고 다시 황제와 일을 마무리 지으면 되는 일.
지금은 적을 찾고, 이 장소에서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스럭—!
작은 소리.
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그 위로 휘둘렀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고 어둡던 실내가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누더기 같은 옷과 창백한 안색. 그리고 움푹 들어간 눈. 시체 같은 외관이지만 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루카스?”
오래 전, 제국의 추격을 피해 찾아갔던 친우의 이름이다.
뒤통수를 때린 터라 목에 단검을 꽂아 넣은 기억이 있다. 분명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인물. 절대로 살아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오랜만이군. 내 목에 칼을 꽂아놓고 잠이 잘 오던가?”
“말 도 안 돼! 넌, 죽었다.”
“그래 난 죽었지. 하지만 위대한 힘으로 살아났다. 네놈을 뜯어먹기 위해서!!!”
루카스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쿤이 황급히 아쿤으로 그 앞을 그었다. 검붉은 핏물과 함께 팔 한 짝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뿐. 루카스는 그대로 달려서 쿤의 목을 물었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아릿한 고통이 그를 잠식해 들어갔다.
“저리 꺼져!”
발로 복부를 쳐, 밀어내고 그 위로 단검을 그었다.
시체 같던 루카스의 머리가 그대로 베어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철퍽. 바닥에 닿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지? 환각 같은 건가?”
네크로맨시라면 분명 알아봤을 거다.
너무나 생생하다. 목 언저리를 손으로 만져보니 핏물이 선명하게 찍혀 나온다.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나도 버리고 간 건가?”
“……슈엥카?”
과거, 세이혼을 만난 마을에 자신을 안내해 주었던 남자다.
호방한 웃음과 넉넉한 인심을 기억한다. 추격을 피해 경고조차 하지 못하고 빠져나와 마을이 통째로 타버린 적이 있다. 그리고 아마 그곳에서 죽었을 터. 이번에는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잘난 척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만 결국 지독한 이기주의자. 너 하나 살자고 우리 마을이 불타고 있는 걸 그냥 외면해?”
“……물러나라. 대체 무슨 수작질이냐?”
“그래, 항상 그렇지. 냉철한 것처럼. 모든 걸 꿰뚫는 것처럼 바라봐. 하지만 생각해 봐. 네놈은 그저 지독한 이기주의자일 뿐이야. 우리 모두를 그렇게 죽이고도 혼자서 행복 할 수 있다고 본 건가? 너에게 그런 게 허락 될 수 있다고 보나?”
“시끄러워! 옛 망령에 휘둘리지 않는다!”
“캬하하하하하!! 우리가 망령이라고!? 우리가 망령이라고!?”
슈엥카의 옆으로 사람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그 날 죽었던 마을 사람들. 아직 어린 아이도 있었다.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 잘린 팔을 부여잡은 아낙. 배에 구멍이 뚫린 노인까지. 참혹한 그날의 피해자들이 그대로 모습을 나타났다.
“난……”
쿤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이제는 알고 있다. 가족이 어떤 건지.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감정이 어떤 건지. 그렇기에 냉정하게 무시하고 지나갔던 과거의 사건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만약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날 그렇게 혼자 도망 갈 수 있었을까?
“흐……흐흐흐! 울어라, 피눈물을 흘려라. 네놈 때문에 죽어버린 우리의 원한을 받아라!”
“아파, 아파!”
“살려줘……살려달라고!”
시체와 같은 이들이 흐느적거리며 쿤에게 다가갔다.
주춤주춤. 아쿤은 손에 쥐고 있지만 휘두르지 못했다. 그저 뒷걸음질을 치면서 물러날 뿐이었다.
턱. 그런 그의 뒤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고, 공왕!?”
“도둑놈이 여기 있었군.”
쿤이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뒤에는 슈엥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앞에는 공왕이다. 어디로 가야 할 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머리에서는 이것들이 환각이라 말하고 있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감각들은 쉬이 결정을 못 내리게 막았다.
“내 자리를 빼앗고, 딸아이를 훔쳐간 도둑놈.”
“무슨……당신이 내어 준 자리 아닙니까?”
“내가. 내가 힘이 있었다면 정말로 그럴 거라 생각했나? 네놈이 찾아와 모든 것을 망치고 나를 폐인으로 만들었잖아!”
“막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단에 타락해서 괴물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차라리 괴물이 나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네놈한테 모든 걸 빼앗길 바에는!!”
공왕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형편없는 몸짓에 힘없는 동작이다. 하지만 쿤은 피할 수 없었다. 발에 아교라도 발린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공왕이 목을 조르는 순간까지도.
“네놈이 원흉이야. 네놈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우리는 멀쩡했어.”
“그건……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네놈은 재앙이야. 네놈이 가는 곳 치고 멀쩡한 곳이 있던가!? 가는 곳마다 피를 부르고 재앙을 가져오지. 네놈만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보기 좋았을 거라고!”
“그, 그만!!”
다급히 팔을 뿌리치고, 쿤이 옆으로 몸을 뺐다.
목이 시큰거렸다. 아프다. 하지만 그보다 가슴이 아픈 것이 더했다. 공왕의 말이 옳아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 때문. 만약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더 나은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 힘을. 서 준경 신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모셨다면.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 같은 인간이 이 힘을 받아서 이렇게 된 건 아닐까?’
공왕이. 그리고 슈엥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점차 다가옴에도 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동자만 좌우로 흔들리고, 아쿤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갔다.
“이대로 우리와 가자. 그만큼 싸웠으면 됐어. 포기하고 쉬어라.”
“아파. 도와줘……”
“네 죄를 우리 곁에서 갚아라.”
목소리가 마구 엉켜서 귓가로 파고들었다.
머리가 먹먹하고 눈이 자꾸 감겼다. 몸이 나른한 것이 오랫동안 달려온 거 같다. 그대로 쉬어도 되지 않을까? 더 이상 버둥거리지 말고 죗값을 치루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쿤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
그 순간, 아래로 처진 쿤의 눈에 다가서는 이들의 발이 들어왔다.
선명한 육체와는 다르게 발이 있는 곳만은 유독 흐렸다. 형태가 무디다고 해야 할까. 바닥과의 경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연결 된 것처럼.”
쿤이 고개를 팍 들었다.
몸을 잠식하던 졸음이 사라지고, 먹먹하던 머리가 깨끗해졌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앞서 나왔던 루카스도 그렇고, 지금의 이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이 공간에 연결되어 있다. 마치 진흙으로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공간이 불러온 인형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순간, 뿌옇던 이지가 단번에 회복되었다. 어째서 그리 속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물러가라!!”
의식의 검을 뽑아 거칠게 그었다.
흰 빛과 함께 모든 존재가 단번에 스러졌다. 푸스스 떨어지는 먼지와 바닥에 쌓이는 가루들. 이들의 진면목을 한 눈에 알게 해 주었다.
‘나도 멀었군.’
겨우 이런 것에 당할 뻔하다니.
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쿤, 오빠?”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굴의 어둠 속으로 뿌연 실루엣이 보였다.
“라라?”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라라였다.
아도란과 흩어져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을 라라가 대체 이곳에는 왜 나타난단 말인가. 쿤이 아쿤을 거세게 쥐었다.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작가의 말
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