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 벽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돔 형 공간.
제국 법에 의거하여 죄인을 심판하기 전, 사전 점검을 위해 대기하는 장소다. 분위기가 엄숙하고, 대기하는 간수의 얼굴이 죄다 험악한지라 보통 이곳에서 죄를 실토하게 된다.
“폐하께 내 의견을 전했는가?”
“……”
이곳으로 끌려온 지 벌써 반나절.
쿤은 순순히 집행에 따르며, 일행을 통해 황제에게 연락을 넣도록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장담한 일을 이렇게 엎어버리는 건 상리에 안 맞다. 흰 눈의 남자가 무언가 개입했다고 해도 말이다.
끼익……!
그렇게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낡은 쇠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었다. 연회가 열릴 당시 와인을 주고받기도 했으니까.
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되었습니까? 오해는 이제 풀린 거겠지요?”
“흠.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거 같군요. 그간의 증거를 확인해 본 결과, 통령 대리의 죄가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정식 재판이 열릴 테니, 그 동안은 이곳에서 머무르기를.”
“죄가 확실하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리 하는 겁니까?”
“제국 내에는 방첩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거하면 통령 대리의 행동은 확실히 반란도와 맞닿아 있더군요. 뭐, 자세한 것은 재판에서 밝혀지겠지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그런……!”
타국의 사절을 이렇게 잡아두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제국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러 황제의 재량으로 그것을 진행 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 상황은 상기의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황제 예하 다른 집단에서 정보를 건네 와 죄인을 잡았다? 내국 죄인이면 모르겠지만, 타국 사절을 그렇게 처리하는 건 공분을 살 수 있는 행위다.
‘이런 억지를 부리다니. 아니, 그보다 황제가 대체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조금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확실히 조건을 걸고 합의점을 찾았다.
황제가 원하는 바가 있는 이상, 이렇게 손 놓고 있는 건 이상하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하지만 제국이다.
제국 내에서 황제를 제약 할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4대 공작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들 개개인으로 황제를 압박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그 공작 넷이 갑자기 힘을 모아 자신을 투고했을 리는 없고.
‘아니, 잠깐만……’
흰 눈의 남자를 본 건 첫 연회에서.
그리고 황제와의 면담을 끝내고 난 뒤였다. 다시, 회담을 가진 뒤에는 보다시피 죄인의 몸으로 끌려오게 됐다.
흰 눈의 남자를 귀신이나 모종의 현상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면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내가 마라와 만나고 황제와 회담하게 된 걸 방해하는 건가?’
흰 눈의 남자가 이단의 종자이고, 마라를 만나서 유르고의 조각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 되는 가정이다. 황궁 내에도 유르고에 타락한 종자들은 있을 터. 특히, 황제에 반하는 공작가에 영향력이 뻗어나가 있다면 움직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뭔가 부족해. 나를 재판에 회부하더라도 황제의 힘이면 결과를 엎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만약, 회동 자체를 방해하고자 했다면 수가 어설퍼.’
쿤이 깊은 어둠 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풀리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특히, 흰 눈의 남자. 그의 정체를 모르는 한에는 어긋난 퍼즐을 맞출 수가 없었다.
— 들리는가?
그 순간, 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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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혼 삼촌 어떻게 됐어요?”
“답이 없다. 면담을 일체 거절하고 있어. 일단 사절단의 이름으로 공식 전문을 보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 먹힐지는 모르겠네.”
“아, 어떻게 해……”
일행을 위해 준비 된 별채 안.
세이혼이 가지고 온 소식에 라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쿤이 연행 된 이후, 소식은 바로 귀에 들어갔다. 라라 등이 펄쩍 뛴 것은 당연한 일. 즉시, 황제를 찾아가고 관련 부서에 문의를 넣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 라라. 내 목소리가 들려?
“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라라의 귓가를 울렸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돌아봤다. 뭐하냐고 묻는 루루에게 ‘무슨 목소리 안 들려?’라고 답해 봤지만 흔들리는 고개만 봤다. 걱정을 너무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 나야, 쿤. 지금 재판 대기실에서 보내는 거야.
“오, 오빠!?”
라라가 벌떡 일어났다.
세이혼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녀를 봤다. ‘무슨 일이야?’ 루루가 물었지만 그녀는 손짓으로 입을 막은 뒤 귀에 집중했다.
이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다행히 잘 들리는가 보네.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는 무사하다고 전해 줘. 아직 어색해서 그런지, 여러 명한테 보내는 건 어렵네.
쿤은 뮬라와의 대담 이후, 그가 사용하는 전언의 요령을 배웠다.
사실 조건은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 요락의 진언과 의식을 다루는 요령. 몇 번 시도를 해 본 뒤, 사도로 묶인 라라에게 바로 말을 걸었던 것이다.
“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갑자기 반란혐의로 잡혀가더니, 면담도 거부되고 있어.”
“……어? 정말요? 아. 그럼 그것부터 확인하면 되겠네요?”
“라라야, 뭐라고 말 하고 있는 건데?”
“오빠가 그러는데, 지금 이건 혐의 자체보다 격리에 주안점을 준 행동이라고 본대요. 황제와 독대를 하고 난 뒤 빈틈을 노리기 위한.”
“빈틈?”
“네. 오빠가 아니면 유르고의 조각은 정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반대로 봉인된 유르고의 조각을 자극 할 수 있는 것도 오빠밖에 없어요. 두 번째 황제와의 만남 이후 오빠를 격리해서 자극된 유르고의 조각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뮬라는 쿤에게 마라의 일을 전했다.
별의 탑지기들 사이. 그리고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그는 마라를 관찰했다. 하지만 쿤이 잡혀가는 순간부터 그 비전이 모두 막혀버린 것이다. 이를 쿤에게 전했고, 쿤은 이것이 본래 목적임을 직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면담조차 거부된 상황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이를 막을 수 있지?”
“그건 내가 돕도록 하지.”
“뮬라야?”
뮬라가 후드를 벗은 채 은발을 찰랑이며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처음 보는 나무 지팡이와 책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몸 전체로는 희미한 은색 빛이 흘렀다.
“탑지기들 사이에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능력이 있다. 그것으로 길을 열 테니, 상황이 꼬이는 것을 막아다오.”
“그것이 쿤이 바라는 일이라 이건가?”
“지금 그는 움직일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혐의가 걸려 있으니까. 만약 이 상황에서 억지로 움직인다면 그것 자체로 운명이 옭아매질 위험이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위태로워.”
“운명?”
“길게 말 할 시간은 없다. 도와 줄 텐가?”
세이혼이 잠시 뮬라를 봤다.
사실 쿤을 제외하고 뮬라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아이 같은 외모를 가지고 별의 탑지기라는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세이혼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알겠다. 돕도록 하지.”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뮬라가 손짓을 해서 거리를 벌리고, 지팡이와 책을 사용해 무언가를 영창했다. 은색 빛이 그 위로 엉켜들더니 공간을 확 찢고 통로를 만들었다.
“음……무언가 방해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지점 부터는 직접 찾아가야 할 거 같군.”
“우리가 가는 곳이 황제의 밀실이라 이건가?”
“밀실인 덕에 지키는 병사는 없을 거다. 다만……”
“방해를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은 결국 적이 있다는 것이겠지.”
세이혼이 검을 허리춤에 찼다.
“저도 가요.”
“넌 남아 있어. 위험하다.”
“알아요. 그래도 하나 보다는 둘이 낫죠. 게다가 삼촌의 검보다 제 불꽃이 더 도움 되는 구간도 분명 있을 거고요.”
루루가 반드시 따라가겠다는 눈빛으로 달라붙었다.
세이혼이 미간을 좁히며 말리려다,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고개를 돌려 라라를 봤다.
“넌 어떻게 할 거지?”
“전 따라가도 짐만 될 거 같아요. 게다가 오빠 쪽에도 한 사람은 남아 있어야죠.”
“그래, 그편이 나을 거 같다. 연락이야 여기 있는 친구가 해 줄 수 있으니까.”
뮬라 쪽을 손으로 가리킨 세이혼이 라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부탁할게요.’ 그녀가 짧게 말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루루와 세이혼이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고 이내 뮬라도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짧은 빛을 남기며 남은 흔적이 모두 사라졌을 때 방 안에는 라라만이 남아 있었다.
— 라라, 재판이 시작된다. 부탁 할 게 있어.
라라가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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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서 머물던 쿤은 무장한 경비들에 의해서 다른 장소로 이송되었다.
위가 뻥 뚫린 돔 형식의 재판장이었다. 족히 수천 명은 들어 올 수 있을 정도로 구획이 넓었다. ‘공개 재판장.’ 쿤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경비의 뒤를 쫓아 돌바닥 위에 발을 올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주변의 전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넓은 장내에 비교해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십여 명 정도. 장소와는 별개로 일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거 같았다.
쿤은 재판장 중앙. 돌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앉았다.
“……음?”
그때, 재판장 입구 쪽에서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화려한 망토와 크게 휘어진 왕관을 쓴 인물. 바로 황제였다. 좌우로 수행원을 둔 채 성큼성큼 걸어서는 재판장 상부에 앉았다.
쿤과 순간이나마 시선이 맞닿았다.
‘무슨 생각이지?’
황제가 이곳까지 왔다는 말은 스스로 결정권을 가진다는 의미다.
일전에 약속해 둔 것을 생각해 보면, 쿤의 죄를 사하고 본래 하려던 일을 지속하는 게 옳다. 하지만 스쳐갈 때 보았던 황제의 눈빛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안정해 보였어. 대체 무엇이?’
그 사이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품 넓은 재판관 복을 입은 남자가 상석에 위치하고 그 좌우로 네 명의 남자가 더 섰다. 제국의 재판은 죄를 증명하고, 죄인의 변호를 들은 뒤 네 명의 재판관이 판단하고 상석의 원로 재판관이 마무리를 짓는 형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재판관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된다. 그만큼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형식. 사실 그런 만큼 쿤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뚱맞은 재판에 대비 할 여력이 없으니까.
“죄인은 고개를 들라……”
재판이 시작되었다.
선언문 낭독과 몇 가지 간소한 절차가 지나가고, 죄명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죄목은 반란도를 도와 반란을 획책했다는 것. 일전에 의뢰로 건넸던 편지와 당시 추적에 나섰던 병사 등이 증거로 나섰다.
‘날 이렇게 엮어내지는 못해.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쿤은 재판 과정은 싹 무시 한 채 황제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눈을 내리 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굴에 그려진 그림자와 흔들리는 기세. 확실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뮬라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
당장은 무리였다.
탑지기의 비전을 사용한 터라, 한 두 시간은 휴식을 취해야 다시 의식을 전달 받을 수 있다. 라라에게 사용한 것처럼 쿤이 연결 할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그만큼의 연대가 없었다.
“……이자는 수많은 제국의 정병을 살해하고 반란도를 도운 바 죄질이 악독합니다. 제국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제청하는 바입니다.”
소란은 없었다.
한 사람의 제청에 주변이 침묵으로 긍정을 해 왔다. 이것 또한 이상하다. 아무리 국력이 부족해도 공화국의 통령 대리다. 함부로 찍어 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후폭풍이 보통이 아닐 터. 기본적으로 타국과의 교류 자체가 아예 막혀버릴 가능성도 있다. 제국이 강대국인 건 맞지만 타국과의 거래에 의존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쿤이 눈을 감았다.
일련의 흐름을 되짚어 갔다. 반란으로 자신을 엮으며 황제와 마라를 아는 자. 그리고 유르고의 힘이 자극받아 깨어났을 때, 이 틈을 이용하려는 자. 하나가 아니다. 이해관계가 맞은 둘 또는 셋이 손을 잡고 이 판을 만들고 있었다.
‘호랑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왔군.’
출발 전 신이 경고한 이유를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카넬. 대마법사와 흰 눈의 존재가 연수를 하고, 이 판은 공작가 중 하나가 만든 거군. 나를 찍어내고 황제를 압박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부분을 얻는. 어쩌면 마라가 황제와 가까워 진 뒤부터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르겠군.’
황제 역시 말로 움직이고 있다.
표정이 저렇다는 건, 보통의 일로는 부족하다. 아마 마라에 관한 것일 터. 지금 유르고의 상태가 자극받아 활성화 된 거라면 이것에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즉, 그녀의 상태를 두고 황제가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
‘딸을 사석으로 버리는 황제라 해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고뇌를 하는 건가.’
우습지만 이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쿤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돌아가는 판은 읽었다.
이제부터는 반격이다.
쿤이 고개를 들었다.
※작가의 말
끄앙 복잡해.
이쪽 으쌰으쌰해서 끝나고, 다시 돌아가서 으쌰으쌰하고, 적이 으쌰으쌰해서 상황이 으쌰으쌰하면 결말이 나오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