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형질의 조각 앞에 선 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천천히 신성력을 펼쳤다.
과거, 스킬로 사용할 때보다는 불편했다. 하지만 확실히 세밀한 부분까지 힘을 조율 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었다. 축복의 강도를 조절 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소모되는 신성점수도 자율적으로 조절 할 수 있었다.
축복이 조각에 닿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강력한 이질감이 쿤의 몸을 건드렸다. 발악하는 괴물의 비명. 살갗이 에일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었다.
“제가 보조를 하겠습니다.”
그 순간, 마라가 끼어들었다.
양 손을 펼치더니 뿌연 안개를 조각 아래로 쏟아냈다. 이는 쿤이 방출한 신성력과 엉키더니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생소한 감각에 쿤이 힘의 전파를 멈추고 잠시 그것을 몸으로 느꼈다.
마치 손가락으로 뒷목을 살살 긁는 거 같다. 기분이 나쁜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기대고 있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해지는 힘이었다.
쿤은 마라의 힘에 거리를 두었다.
“쿤 님. 그렇게 하면 유르고의 힘을 제어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믿고 힘을 기대 주세요.”
“……”
귀신같이 알아내고, 마라가 요구해 왔다.
신성력과 유르고의 힘을 모두 알면서, 둘 사이의 움직임도 예측 할 정도로 예민하다. 대체 어떤 힘이기에 이런 게 가능할까. 예언자가 가지는 기본 소양?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힘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간을 좀 봐 볼까?’
힘의 제어라면 밀리지 않는다.
쿤이 신성력의 말단을 뻗어 유르고와 마라의 힘 사이에서 간을 봤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힘의 공명점을 겉돌았다.
그때마다 마라의 이마위로 주름이 새겨져갔다.
‘……어?’
아니, 그냥 주름이 아니다.
힘이 사역 될 때 마다, 마라의 얼굴이 급격히 노화됐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마치 세월이 마구잡이로 변하는 것 같았다.
— 그녀를 멈춰 줘.
그 순간, 쿤의 귓가로 목소리 하나가 끼어 들었다.
마법인가 싶었지만, 힘의 유동은 없다. 이건 조금 더 색다른 능력이었다. 다만, 목소리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 뮬라. 너인가?
— 길게 말 할 수는 없어. 탑의 비전은 저런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거야. 더 이상 무리하다가는 그대로 먹혀버릴 거야.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쿤이 곧바로 힘을 당겨서 뺐다. 어차피 간만 보려고 했던 바. 그녀에게 힘을 온전히 맡길 생각은 없었다.
짧은 빛과 함께, 엉켰던 힘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흐읏……! 쿤 님. 왜 힘을 회수했습니까?”
“더 이상 시도하면 그쪽이 위험 할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 쿤 님은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해 주세요.”
“뮬라는 그대를 말려 달라 하던데.”
“……!!”
넌지시 이름을 건넸다.
그러자 마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너무 즉각적인 반응. 되레 놀란 건 황제였다.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마라의 어깨를 감쌌다.
“마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한 소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아……폐하. 아닙니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오랫동안 듣지 못한 이름을 하나 들어서 놀랐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이름?”
마라가 황제의 품을 벗어나 혼자 섰다.
그리고 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 이름을. 아니, 그를 만난 겁니까?”
“그렇다고 해 두죠.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입니까?”
“네. 매우. 그는……제 아버지 이십니다.”
“아, 아버지?”
소년과 소녀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뮬라가 마라의 아버지라?
쿤이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리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수많은 능력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괴리가 심해지면 솔직히 안 놀랄 수가 없다.
“놀라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아버지를 만난 모양이군요. 모든 지식을 망라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한 시점으로 고정해 버리는 능력. 별의 탑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당신도……?”
“네.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고정했죠.”
그렇다면 실제 나이는 할머니에 가까운 건가.
쿤이 곁눈질로 황제를 살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사랑에 눈이 먼 걸까. 입이 달싹였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황제의 일. 간섭 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탑의 비전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 하던데……”
대신 본론을 꺼내 들었다.
“비전을 말입니까? 아버지는 이번에도 내 일을 방해하려는 건가……”
“주제넘은 참견일수도 있지만, 조금 전 당신의 힘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습니다. 제어는 둘째 치고 시전자인 당신이 먼저 깨질 것 같아 보이던데.”
“어느 정도의 위험성은 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합니다. 쿤 님.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마라가 강경한 눈빛으로 부탁을 해 왔다.
하지만 힘이 불안정하고, 뮬라의 간섭까지 있는데 냉큼 그렇게 하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간절한 겁니까? 당신에게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있어요. 반드시 유르고의 힘을 제어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힘을 빌려 주세요.”
“사정을 알지 못하면 저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듭니다.”
딱 잘라서 말을 했다.
황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막도 모른 채 쓸려 갈 수는 없었다. 마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유르고의 힘을 막아야 하는 건 제국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돕기 위함도 있지만, 그 근본에는 별의 탑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별의 탑을?”
“네. 저를 비롯해서 유르고의 조각을 봉인하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별의 탑에서 유르고의 힘에 타락하지 않은 숫자는……”
“이미 당했다는 겁니까?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안다고 했는데 어째서 그런 일이?”
“오만이죠.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유르고를 처리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렇게……이제라도 뒷수습을 하려고 움직일 뿐입니다.”
처연한 마라의 표정에 황제가 어깨를 토닥였다.
진실이다. 숨겨왔던 진실을 말 하고 있다. 마라의 신체 변화를 통해서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모두 확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숨기는 게 있어.’
빛 속에 숨어든 어둠과 같다.
모든 걸 내 놓고 토로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전부 털어놓지 못한 한 가지 비밀이 더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이상 쿤 자신은 절대로 그녀를 신뢰 할 수 없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저도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아, 그럼……!”
“하지만 오늘은 조금 힘들 거 같습니다. 힘을 중간에 거둔 덕에 부담이 와서 재충전이 필요 할 거 같군요. 하루를 쉬고 내일 다시 시도를 해 보도록 하죠.”
“으음……”
못마땅한 듯 보였지만, 마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 끌어와 놓고 고집까지 부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쿤은 황제와 마라를 남겨 둔 채 방을 빠져나갔다.
— 할 말이 있다.
— 마찬가지다.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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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바로 뮬라를 찾아갔다.
그는 별채 앞 작은 뜰에 홀로 나와 있었다. 나무로 만든 의자가 몇 개 비치되어 있고, 인적이 드물어 대화를 하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그 앞에 앉자마자 쿤이 물었다.
“마라의 아버지라는 거. 진짜냐?”
“맞다. 아주 오래전. 내가 진실을 찾기 위해 탑을 떠나기 전, 남겨 두었던 혈육이다.”
“하. 별의 탑…… 그곳에 사는 자들은 보통 인간이 아니군?”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렸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삶의 희노애락도 포기했다. 남은 건 오직 진리를 위한 탐구 뿐.”
“그런 삶에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런 의구심에 내가 탑을 떠났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탐구하여 안다 한들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
뮬라가 허허롭게 하늘을 바라봤다.
아이 같은 외모이지만, 눈빛에는 깊은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 있었다.
“좋아. 그럼, 단적으로 묻지. 마라는 내가 유르고의 조각을 제어해 주기를 원한다.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 거지?”
“어째서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날 속이려 하지 마. 진실과 거짓. 양 극단에 위치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어. 그녀는 진실을 토로하지만 한 줄기 거짓을 품고 있다.”
“유르고. 그 망령의 잔재와 딸이라. 어쩌면 그것이 네 운명의 변곡점일지도 모르겠군.”
“답을 해. 두루뭉술하게 넘기지 말고.”
쿤이 강하게 물었다.
황제의 압박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어설픈 태도를 참아 줄 수는 없었다.
“일단 그 동안 그대의 허락 없이 이야기를 듣고, 시선을 공유한 점을 사과하지.”
“……뭐?”
“탑의 비전 중 하나다. 타인의 대화를 듣고, 시야를 공유하여 이야기를 관찰하는 것. 그 동안 그대 주변을 살피며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했네.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나 세상의 운명을 흔들고 있나 알아보기 위해.”
황제의 밀실에 있는데도 뮬라는 목소리를 전해왔다.
그 역시 탑의 비전. 생각보다 이들이 가진 능력은 많은 거 같다. 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종용했다.
“접점은 유르고로 향하더군. 그대의 운명은 유르고와 밀접하게 붙어 있어. 그렇기에 운명의 흐름이 나를 그대 앞으로 가져다 두었는지 모를 일이야.”
“너희도 유르고와 원한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야기라네. 본디 유르고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건 탑의 인물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니까.”
“……뭐!?”
쿤이 더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르고가. 이단이 별의 탑 인물들에 의해서 세상으로 왔다니?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는 자. 세상의 모든 변혁을 알게 된 후, 그 너머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
“……그 너머?”
“세상 밖. 차원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새로운 지식들에 눈을 돌린 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차원 너머의 존재를 소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게 유르고라는 건가?”
“그래. 우리는 유르고를 소환했다. 아니, 당시에는 그렇게 정의 할 수 없는 존재였지. 알기 힘든 것이 마구 엉켜 있었으니까.”
유르고의 시작을 듣게 됐다.
쿤이 긴장한 얼굴로 뮬라의 입에 집중했다.
“우리의 생각보다 유르고는 강력했고, 그 존재는 봉인에서 풀려나 세상으로 힘을 풀어냈지. 삽시간에 정령과 악마가 타락하고. 세상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꼬리를 말았다. 본디, 우리는 그 시점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상했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군.”
“그렇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르고는 다시 봉인이 되었어. 그리고 세 조각과 심장 하나로 나뉜 채 세상으로 뿌려졌지.”
“그 중 하나를 너희가 가지고 있다는 건가?”
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유르고를 놓치고, 세상에 해악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거야. 그리고 더 안 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
“또 다시 시도를 했군.”
“그래. 유르고를 제어해서, 남은 조각을 모두 끌어 모을 계획을 세웠다. 본래라면 심장을 손에 넣고 계획을 진행해야겠지만, 그건 태고의 정령이 봉인을 한 터라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심장? 조각 말고 다른 게 있는 건가?”
처음 듣는 이름에 쿤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르고의 심장에 대해 뮬라가 짧게 설명했다. 황가에 이어지는 태고의 정령에 의해서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생소한 내용에 쿤이 매우 놀라워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계획은 또 다시 실패. 탑의 대부분이 유르고에 타락하고, 그나마 남은 이들은 자신의 이지를 재물로 받쳐, 조각을 봉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이건 일시적일 뿐이지. 마라, 그 아이가 말 한 것처럼 유르고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 또 제어를 하겠다고 나서는 건가?”
“고집이지. 그 아이의. 별의 탑이라는 좁은 세계가 가지는 아집.”
이미 두 차례나 실패를 했던 일이다.
그런 걸 또 다시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 마라의 계획.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듣고나니 줄곧 들었던 불안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야기가 더 있어?”
“그 아이의 등장은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네.”
“흐름과 맞지 않다니?”
“세상은 수많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하는 또 다른 인관에 엮여있네. 나는 그 중 일부를 볼 수 있지. 하지만 몇 번이고 살펴도 마라 그 아이가 이곳에 있는 건 맞지 않아. 무언가 인과에 어긋나는 힘으로 그녀를 이곳으로 개입시킨 것이 분명하네.”
인과니 운명이니 쿤은 잘 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뮬라가 지금껏 보여준 모습이나, 마라의 태도. 그리고 출정 전 신의 경고까지. 확실히 무언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은 분명했다.
신뢰 10%와 모험 90%의 감각으로 뮬라에게 물었다.
“혹시 흰 눈의 남자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건가?”
“흰 눈?”
“첫 날 연회에서 못 본 건가? 뒤쪽에 서 있던 키 크고 흰 눈의 남자. 만약 예상하지 못한 위협이 있다면 그가 될 거라 했다.”
“말을 했다고? 대체 누가?”
“내가 모시는 분. 그분께서 경고를 하였다.”
“신탁을 받았다는 건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어찌 보면 신탁이다.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의 흐름을 읽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알지 못하는 개입이 벌써 둘이나 있다고?”
“신을 힘을 네가 모두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 당연하지 않나?”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힘은 반드시 흔적이 남아. 신탁이라면 더더욱.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런 이적을 발휘한다는 것은 본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저기 있다—!”
뮬라의 말 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순간.
갑자기 큰 외침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뜰로 들이닥쳤다. 죄다 무장을 두텁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공화국 통령 대리.”
“그럼, 이게 무슨 짓이지? 별채로 군을 이끌고 오다니.”
“명령입니다. 쿤 통령 대리는 현 시간 부로, 제국 반란군에 협조. 반란을 공모한 죄로 재판에 회부될 예정입니다.”
“……뭐?”
황제와 약속을 하고 나온 게 얼마 전이다.
너무나 빠르고, 생각지도 않은 시점에 발생한 일. 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
그리고 병사들 뒤.
나무 사이로 흰 눈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 놈이……’
무언가 일련의 흐름이 손에 잡히고 있었다.
※작가의 말
범인은 절름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