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22화 (222/240)

3일동안 연회가 이어졌다.

사절단을 환영한다는 의미. 맛 좋은 음식과 향긋한 술. 감미로운 음악이 기간 내내 일행을 즐겁게 했지만 쿤은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마라와 황제가 했던 제안. 과연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에요?”

“결정이 쉽지 않네. 둘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타당해. 하지만 제어의 불확실성과 미묘하게 느껴지는 이질감이 자꾸 이를 부정하네.”

“마라라는 여성이 다른 속셈을 가진 거 같나요?”

“글쎄. 뮬라가 답을 해 주면 좋겠지만……”

상황을 토로하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 결국 뮬라에 대한 것도 털어놓고 말았다.

그리고 물었다. 같은 별의 탑 일원이라면 마라를 알지 않겠는가. 하지만 뮬라는 전혀 모른다는 답으로 응수를 했다. 자신이 탑에서 벗어난 지 너무 오래되어 그 뒤에 들어온 이들은 모른다는 얘기다.

“만약 황제의 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 거 같은가?”

“글쎄. 화를 내기야 하겠지만, 당장 내게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을걸?”

세이혼의 질문에, 쿤이 가볍게 대꾸했다.

사절단이고, 공화국 통령 대리에 올라와 있는 인물이다. 황제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한다고 해도, 주변국과의 관계를 무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거절을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만약이라고는 하지만, 자네의 감은 무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역시 그런가.”

“그리고 마라라는 여성의 말이 맞다면, 갈라진 유르고의 조각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녀와 별의 탑. 뒷조사를 해봄이 좋을 거 같네.”

단순히 파편 중 하나를 가졌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라가. 정확하게는 별의 탑이 보유한 그리자의 파편이 크게 나눠진 세 개의 조각 중 하나라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세이혼, 자네가 힘 좀 써 주겠나?”

“깊이는 무리네. 하지만 소문을 수집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해. 무리하지는 말고.”

황궁 내에서 일행의 움직임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쿤이 조금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을 내렸지만 여전히 가슴 한 족이 무거웠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쿤은 황제와 라마를 다시 만났다.

“거절을 하겠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일까. 황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반문을 해 왔다.

묵직한 기세가 쿤을 찍어 눌렀다. 의식의 검이 가능했다면 거대한 망치라도 불러왔을 것 같은 기세였다.

쿤이 마른 침을 삼키며 대꾸했다.

“유르고의 힘을 정화하는 건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어하겠다는 건 무리한 발상입니다. 저는 지금껏 그것에 타락한 이들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높은 위치에 선 이들부터, 초월족인 생명체까지.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마라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다는 별의 탑 일원이다. 그녀라면 자네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도 있을 텐데?”

“그렇게 모든 진리를 깨우쳤다면 어째서 유르고의 힘이 이렇게 퍼지도록 내버려 둔 겁니까? 미리 알고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쿤이 마라를 정면에서 봤다.

신비한 집단의 신비한 여인. 하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렇게 별의 탑이 대단하다면 지금까지 유르고의 전파를 안 막고 뭐 했단 말인가.

“하아.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군요.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유르고의 힘을 알고 있었으며 미리 막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죠. 하지만 오만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의 힘으로 이를 막을 수 있다 믿은 거죠. 남들의 도움 없이.”

“그러다 망했다 이겁니까?”

“아마 도움을 청했다면 조금 더 효율적인 대처가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지적하신 부분은 분명 우리의 실수가 맞죠. 하지만 그렇기에 분명한 방법이 생겼을 때, 그것에 매달리고 싶은 겁니다. 부디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힘이라면 유르고를 제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제어를 해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거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한 곳에 봉인해 둘 생각입니다.”

— 거짓.

쿤은 그녀의 말끝에서 거짓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99의 진실을 토로했으나, 단 하나가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 단 하나가 마뜩지 않은 느낌을 자아내는 원임임도 깨우칠 수 있었다.

‘설마 유르고를 이용하려는 건가?’

유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신의 이름.

그 힘은 고룡조차 타락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만약 이를 제어 할 수 있다면 그 힘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별의 탑이라면……

‘지식의 탐구? 유르고로 말인가?’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목적이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역시 후자의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만약 유르고의 힘을 정화하고 싶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죠. 제가 모시는 분의 능력이라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모두 정화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제국 내의 병폐는 뿌리 뽑을 수 없다.”

“마라 양의 말대로 제어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유르고에 타락한 자들은 개별적으로 활동을 하죠. 차라리 제가 모시는 분을 제국에서 인정해 주신다면, 밑바닥부터 정화를 해 보겠습니다.”

“흠. 제국에서 포교를 하고 싶다? 결국 그 이유로 마라의 말을 거절하는 건가?”

황제의 기세가 거칠어졌다.

쿤이 눈을 가늘게 하며 손을 흔들었다. 결론이 튀는 방향이 조금 과격하다. 황제라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닙니다. 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제안했을 뿐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 실상 거부하는 이유라고는 자네의 생각뿐이지. 어찌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장담을 하지? 결국 제국 포교를 염두에 두고 말 한 거로 보이는데.”

“폐하.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흠.”

황제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는 마라.

그리고 낮은 헛기침과 함께 슥 물러나는 황제. ‘아.’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는 쿤이었다. 단지 조언가와 통치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황제와 마라는 서로 은애하는 관계였다. 그러니 단순한 거절에도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고.

‘난감하군.’

황제라는 지위는 합리적인 사고가 강제되는 위치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집합체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워낙 많은 제한이 걸린다. 하지만 그런 제한을 무시하고 황제가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아마 그 중 하나는 반드시 사랑일 것이다.

마라를 사랑한 황제가 강제로 그녀의 제안을 밀어 붙인다면 쿤으로서는 거부하기 힘들다.

후폭풍으로 황제에게 반감이 간다 해도, 당장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맹목적으로 움직이니까.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정화와 제어를 돕기를 원하니,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공화국에서 유르고의 파편을 수없이 만나 본 저입니다. 직접 본다면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거 같군요.”

한 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강경하게 나갔다가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욱하는 감정에 의한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 제국에서 황제의 반감을 산다? 솔직히 위험하다.

“직접 말인가요? 알겠습니다. 신중을 기하고자 한다면 저도 존중해 드려야죠. 탑의 식구들에게 연락을 넣어 조각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연회가 끝나는 이틀 뒤. 그 정도면 준비가 끝날 거 같군요.”

“직접 이송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영향력이 보통이 아닐 텐데……”

“저의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습니다.”

의문스럽다. 하지만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쿤은 알현실을 벗어났다.

#

이틀의 연회가 더 진행되고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그 사이로 몇 번이고 더 의견을 나눠 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도망쳐 버리는 것도 답이겠지만, 황궁 내에서는 무리였다. 곁가지를 빙빙 도는 말들만 오고가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 약속 당일이 됐다.

“쿤, 잠시 기다리게.”

일단은 독대를. 생각을 정리하고 쿤이 나서려는 찰나, 세이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틀 내내 안 보이다 피곤에 절은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라의 뒷조사를 해 달라 부탁한 것의 결과를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마라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냈나?”

“아니, 그건 전혀 소득이 없었네.”

“그럼 왜?”

“분위기가 수상하네. 얼핏 들었는데, 자네에 대해서 무언가 혐의를 제기하려는 거 같아. 듣기로 반란도와 관계된 사항이라 하는데, 짐작 가는 게 없나?”

“반란도와?”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다.

공화국 사절단으로 왔는데 제국 반란도와 관계라니. 이미 라라와 루루에 관련된 문제는 넘어 간 듯 보이니, 그건 아닐 터.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 봐도 딱히 집히는 건 없었다.

“확실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가볍지 않아. 내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의 확정적으로 자네의 혐의를 인정하고 있는 거 같네.”

“하지만 이제 와서 반란도와 연결 될 만 한 것이……아! 설마?”

쿤이 문뜩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애초, 제국에서 도망치게 된 일. 작은 의뢰를 맡아 편지 하나를 건네주고 첩자라 오해받아 도망쳤던 일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오래 된 일이고, 손으로 그려낸 자신의 몽타주와 지금의 외모를 일치시키는 것도 우습다.

“짚이는 게 있군. 위험한 건가?”

“글쎄. 너무 오래된 일인데다가 그걸 가지고 내게 죄를 씌우기는 어려울 건데. 당시 나는 용병이었고, 의뢰를 맡아서 편지 하나를 건넸을 뿐이야. 과거 행적을 뒤져보면 내가 반란도와 상관이 없을 알 수 있을 거네.”

“하지만 그 건을 잡고 늘어져서 자네를 해하려 한다면 어쩌나?”

“누가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이지?”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낮은 위치의 인물이 가볍게 투고를 한 건 아니야. 수군거리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거든.”

황제는 아니다.

이제 막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데, 엄한 짓 할 이유가 있는가? 설마 그 건으로 약점을 잡아서 일을 시키려고? 가능은 하지만 황제의 행보 치고는 너무 치졸하다. 내가 반 승낙을 한 상황에서 택하기는 어려운 선택지다.

“후우. 모르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세이혼 자네는 둘을 챙겨서 도망 갈 준비를 해 주게. 아도란, 공간이동 마법은 황궁에서 얼마나 벗어나야 쓸 수 있는 거지?”

“황궁. 문. 밖. 여기는 안 됨.”

“방해 마법이 작동하고 있다 이거지. 알겠어.”

몇 가지 더 세이혼에게 당부를 남겨 두고, 쿤이 자리를 떴다.

정말 만약이지만, 누명을 써 상황이 개판으로 흘러가면 그냥 튀어버릴 생각이다. 물론, 최대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황제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

“나를 따라오게나.”

다시 만난 황제는 조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이혼이 말 한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일까. 쿤은 속내에 들끓는 생각을 숨긴 채 그의 뒤를 쫓아서 걸었다. 황궁의 뒤편. 황제만 들어 갈 수 있는 비역에 지하로 이어지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제단 위로 비정형의 물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마라와 비슷한 복장의 인물들이 보였다. 아마도 전부 별의 탑 일원들. 로브를 깊이 눌러 쓴 채 제단 중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유르고의 조각이라고?’

하카림이 깔고 앉은 것, 숲의 여왕이 보호하고 있는 것.

두 번의 경우를 보았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눈앞의 있는 물체는. 아니, 물체라도 불러도 좋을까? 액체와 흡사한 상태로 계속 형태를 바꿔가고 있는 저 물질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르고의 힘이 퍼지지 않도록 형태를 비형질 상태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힘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죠.”

“……이런 방법이 있다면 다른 것들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쉽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이 조각 하나에만 별의 탑 일원들이 대부분 소모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상의 여력을 가지는 건 무리죠. 그렇기에 그대의 도움이 절실한 겁니다.”

“사정은 이해를 했습니다. 다만……”

힘을 뻗어 조각을 살폈다.

비형질이기 때문일까,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정화도 물론이거니와, 이를 제어한다는 것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모함 건도 있고 하니, 황제와 반목을 하는 건 더더욱 안 좋은 일.

“이 일을 처리하기에 앞서서 황제폐하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흠. 무엇이지?”

“혹시 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이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역시 들었는가.

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떼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저는 본디 용병이었던 자. 의뢰를 받고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들춰내어 이런 분위기를 만든다는 건 심히 악의적인 행동이라 생각이 되는군요.”

“죄가 없다 이건가?”

“죄가 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당한 것 정도겠죠. 그 잘못을 제게 물을 생각이십니까?”

툭 던졌다.

어차피 지금 이 일을 해야 한다면 황제한테 받아 낼 것은 받아냄이 옳다. 그가 마라의 일을 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확실히 효과는 좋겠지.

“흠. 뭐, 좋다. 내 몇 가지 들은 바가 있기는 하나, 허무맹랑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준다면 내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를 해 주지.”

“그렇다면 감사 할 거 같습니다.”

일단 이 건은 황제로 입을 막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 이 조각에 대한 것. 정화와 제어. 가능할지에 대한 문제는 접어놓고, 상대의 속셈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움직이는 건 좋지 않다. 일단 간을 보고 장단을 맞춰가며 줄타기를 하는 수밖에.

“준비가 되셨다면 이리로.”

마라의 손짓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말

황제와 딜.

과연 과거는 바뀌고 있는 걸까요?

* 예약연재입니다. 잘 올라갔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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