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회담은 금세 끝이 났다.
조금 더 여러 가지를 물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제는 별 다른 질문이 없었다. 애초에 라라와 루루를 납치한 것이 아니냐에 대한 의혹이 먼저 나왔어야 하는데, 대뜸 결혼 문제를 거론한 것이 그 흐름을 증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동한 융을 통해 간략한 증언을 받고, 몇 가지 검증 절차를 거치기로 한 뒤 대략적인 회담은 끝이 났다.
곧이어 연회가 시작되었다.
홀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음식과 술을 배치시켰다. 황제라 해서 딱딱한 느낌만을 가지고 있던 쿤이 살짝 놀랐다. 궁중 음악과 향기로운 냄새. 그리고 웃음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워갔다.
‘그냥 가만히 있는군.’
쿤은 황제와 주변 인물들에 대응하면서도 흰 눈의 남자를 시선에서 놓치지 않았다.
신이 경고한 인물이라면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움직임이 있나 싶어 끝까지 시선을 고정했다.
“황궁에서도 주눅 들지 않다니. 제법 배짱이 있군.”
“가진 게 배짱밖에 없으니까요. 그거라도 잃는다면 제가 너무 초라하지 않겠습니까?”
와인을 들고 찾아온 황제에게 쿤이 자연스럽게 응대했다.
“너무 겸손을 떠는군. 공화국에서 있었던 일은 대충 보고를 들었다. 꽤 화려하게 해 주었군. 안을 장악하고, 바로 외부의 세력을 잘라냈어. 파격적이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움직임이더군. 제국의 일원이라면 작위라도 하나 내리고 싶을 정도였어.”
“과찬이십니다. 상황에 대처를 하다 보니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극단적인 대처에는 유르고의 힘 역시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쿤이 마른 목을 와인을 축였다.
흰 눈의 남자는 움직임이 없다.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제국의 황제쯤 되는 위치에 있다면 세상의 잡다한 정보들이 들어오지. 그 중 몇 가지는 믿기 힘들 정도로 괴악한 성격을 가졌어. 하지만 몸소 실험을 해 준 인물이 있다면 믿을 수는 있겠지.”
“어디까지 파악하신 겁니까?”
“반란도 무리에도 그자들이 섞여 있더군. 솎아내어 뿌리를 뽑는데 꽤나 욕을 먹었다.”
“솎아낸 무리에서 말이군요.”
그 무리를 솎아내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라라와 루루다.
그녀들을 통해 반란무리를 크게 움직이고, 그 뒤를 쫓아 단죄의 검을 꽂았다. 지도자로서 나라 전체를 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면 현명하다. 하지만 핏줄로 자신의 손녀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모습은 비정하다.
“후후.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군. 나를 비정하다 생각하는가?”
“……처신을 다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황제의 위치라면 굳이 그녀들을 이용하지 않고서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그치지를 않는군요.”
“그건 자네가 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황제가 손짓을 했다.
음악이 멈추고 남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남은 이들은 연회를 계속 즐기도록 하라. 나는 여기, 공화국의 작은 영웅과 대화를 좀 하고자 하니.”
“……음.”
자리를 옮기고자 하는 건가.
쿤이 침음 성을 흘리며 옆을 훑어봤다. 흰 눈의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를 시선에서 떼고 황제와 독대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따라오게. 그대가 알아야 하는 현실을 보여 줄 테니.”
하지만 황제가 하는 말이다.
거부 할 수는 없었다. 와인 잔을 내려놓고는 그 뒤를 쫓았다.
흰 눈의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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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소박한 형태에 방에 도착하자, 경비들이 문밖에 남고 쿤과 황제 단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목향이 확 올라오고, 청아한 기운이 가슴 안쪽을 가득 메워갔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치중한 홀과 다르게 이 방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방하고 있었다.
“후후. 마음에 드나?”
“아, 네. 제 취향은 이런 쪽이군요.”
“세상을 발아래에 두다보면 이렇게 소소한 것에 끌리게 되지. 자, 앉게나. 해야 할 이야기가 꽤 많을 것 같으니.”
나무로 만든 의자에 사슴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 본 뒤 쿤이 엉덩이를 붙였다. 두툼한 가죽을 덧대어 푹신했다. 등을 기댄 채, 황제를 바라봤다.
“일단 이야기에 앞서서 한 사람을 소개하지. 그 동안 나를 도와서 반란도를 척결하는 것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네.”
“……?”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커튼의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만약 직접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끝까지 숨어 있는 걸 몰랐을 것이다.
“처음 보는군요. 마라라고 합니다.”
은색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기른 여성이었다.
훌쩍 큰 키에 가녀린 몸매. 얼핏 보기에는 엘프와 흡사했다. 하지만 그 독특한 분위기는 엘프도 인간도 아니었다.
‘……닮았잖아?’
키는 다르지만 분명 닮아 있었다.
방울 군도에서 데리고 온 뮬라와. 독특한 은발과 기묘한 분위기. 우연일 수도 있지만, 감이 아니라고 말 하고 있다. 둘은 분명 같은 집단. 같은 성질을 지닌 종족이 분명했다.
“쿤이라고 합니다.”
“쿤……그 이름을 직접 듣게 되는군요.”
“저를 아십니까?”
“직접 아는 건 아닙니다. 제가 보는 비전에 당신의 이름이 여러 차례 나왔을 뿐. 어쩌면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운명이 그 이름을 안배하였는지도 모르겠네요.”
말 하는 투도 비슷하다.
이 여자는 확실하게 뮬라와 같은 곳에서 나왔다. 즉, 별의 탑의 일원이라는 것.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안다던 인물들이 속세에는 무슨 일로 나왔을까. 쿤이 웃는 얼굴 안쪽으로 긴장의 기색을 늦추지 않았다.
“균형의 사자와 유르고에 대한 것은 모두 그녀에게서 들었다.”
“아……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을 알게 된 겁니까?”
“저는 별의 탑 출신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관조하고, 그 일말을 읽어 내릴 수 있죠. 당신의 이름과 균형의 사자. 그리고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유르고의 힘 역시 그렇게 알아 낸 것입니다.”
“별의 탑?”
일단은 모르는 척을 했다.
“세상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입니다. 미약하지만 세상의 앞일 또한 예지 할 수 있죠.”
“예언가라 이거군요.”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이리 만났으니, 그 동안 알고 싶었던 것을 직접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마라가 은발을 슥 쓸어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유르고의 대척점에 서서 그 힘을 정화 할 수 있습니까?”
“흠.”
공화국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다. 어째서 별의 탑의 인물이 유르고와 신의 힘을 궁금해 하는 걸까? 그 또한 진리의 하나라서?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을까?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쿤이 답을 했다.
“어느 정도는……이라고 말을 해야겠군요. 제가 모시는 분의 힘은 유르고의 존재를 정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타락이 깊은 자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기 어렵고, 힘의 규모 역시 부족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가능은 하다, 이 말씀이십니까?”
“일단은 그렇죠. 헌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폐하. 희망이 생긴 거 같습니다.”
쿤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마라는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힘이 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쿤이 속으로 의아해 했다. 이미 유르고를 알고, 반란도의 무리를 찍어냈다고 하지 않은가. 갑자기 다른 힘을 찾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 제가 너무 흥분을 했군요.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도 유르고의 힘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직접 경험했으니,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이 힘이 얼마나 집요하게 인간에게 달라붙는지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일부를 잘라낸다고 그 힘이 전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근원을 정화하고, 그 본질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최선이죠.”
“그래서 제가 모시는 신의 힘이 필요하다 이겁니까?”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무언가 꺼림칙하다. 뮬라에게 들었던 예언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귓가를 간질이는 거부감 때문일까. 마라가 말 하는 설명이 가슴에 와 닿지가 않는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남은 유르고의 힘을 깔끔하게 정화 할 수 있겠죠. 어지러워진 제국을 정비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제 힘은 신앙심에서 나옵니다. 제국은 국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그 점이 문제다.”
황제가 끼어들었다.
“내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제국 남단에서부터 진행된 이단의 행차 때문이다.”
“이단이라면……교리에 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아스모포스의 가르침에 반하여 움직이는 무리. 그리고 이들이 유르고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냈다. 반란도와는 상관없이, 종교를 타고 퍼지고 있더군.”
타락한 엘본의 신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유르고는 신앙을 왜곡, 그 뜻을 다른 방식으로 전파시킨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과격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제국에 그런 식의 병폐가 드러나고 있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허면 국교라도 갈아엎으실 생각입니까?”
“그건 무리다. 아스모포스는 제국이 뿌리를 내릴 때부터 함께 해 온 종교. 이를 함부로 건드리면 백성의 반감이 극심해 질 터. 황제라 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게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요?”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리 없다.
어쩌면 이번 사절단 자체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마라가 황제를 한 번 보더니, 쿤에게 말을 했다.
“저를 도와 유르고의 뿌리를 제어해 주십시오.”
“……뿌리?”
“본디 유르고는 오래 전 봉인되어 세상에 뿌려진 신의 일종. 그 뿌리 중 일부를 저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를 당신의 힘으로 정화. 우리가 제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유르고의 힘을 제어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네. 저희는 흐름을 읽고 관조하는 자. 지금까지는 그 도도한 유르고의 힘에 저항 할 수단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지만, 당신이 도와준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힘을 정화하면, 그때 제어를 하겠다?”
마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은 되지만.’ 쿤이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녀의 말이 일단 완전히 허황된 건 아니다. 이단의 힘은 신의 힘으로 정화 할 수 있고, 약해진 틈에 무언가 다른 힘으로 제어를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볼 수 있다.
하지만……
내키지가 않는다.
이걸 느낌이라 불러도 좋고, 어떤 예지라 보아도 무방하다. 마라라는 여성에게서 받는 느낌은 안개로 뒤덮인 낭떨어지. 그녀를 따라 움직인다면 분명 무언가 크게 잘못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신께서 경계하라 말씀 하신 건 바로 이것인가?’
쿤이 머뭇거리며 답을 하지 못하자, 마라가 다시 설득했다.
“부디 저버리지 마시기를. 당신의 힘으로 유르고를 제어 할 수 있다면 수많은 제국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생각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일행 중 유르고에 대해 박식한 인물이 있습니다. 과연 제 힘이 유르고를 제어 할 수 있을지 상의를 해 보고 싶군요. 만약 가망이 없다면, 지금 섣불리 허락하여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으음.”
조금 마뜩치 않은 표정이지만 황제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마라 역시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않았다.
회동은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하고 끝이 났다.
제국의 상황이나 공화국과의 관계. 라라나 루루. 이야기 할 것은 많았지만 주 안건이 끝나고 난 뒤 황제는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쿤은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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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이 회담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올 즈음에는 이미 연회도 끝나 있었다.
별채 앞에서 경호원은 돌아가고, 쿤은 커다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어둑한 전경 사이로 시야에 콕 박히는 사람이 하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키에 흰 눈을 가진 남자.
별채 입구 부근에서 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라는 의문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뇌를 장악한 것은 그 남자의 의도였다. 굳이 별채까지 와서 바라보고 있다는 건 무슨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내게 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
답이 없다.
잠시 대치를 이어가던 쿤이 직접 마주치자라는 생각으로 불쑥 다가갔다. 신이 경고했으니, 여차하면 그대로 제압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자의 발치로 도착하는 순간, 회색 연기와 함께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법도, 고속의 이동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을 최대한 뽑아서 주변을 살펴보아도 남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니, 앞선 광경이 떠오르며 무언가 확 하고 다가오는 점이 있었다. 홀에서 있었던 연회 중간. 흰 눈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부름이나 접촉을 당한 적이 없었다.
마치 그곳에 없는 존재처럼.
“……”
쿤이 한 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