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19화 (219/240)

신의 목소리?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주변을 둘러봤다. 동그랗게 눈을 뜬 라라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응시했다.

‘잘못 들은 걸까?’

더 이상의 목소리는 없었다.

쿤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되짚어 봐도 헛것을 들은 거 같지는 않다.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봤을 때, 무언가 다른 소리를 혼동하는 건 있기 힘든 일. 즉, 누군가 자신의 뇌리로 속삭인 건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오빠,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아무것도 아니야. 피로가 좀 쌓였나 봐.”

“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그 동안 일에 치였으니까요. 자요, 이리로 와서 좀 쉬어요.”

라라가 손을 벌리며 웃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쿤이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채우던 고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있어서 이리도 따듯하고 편안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지금껏 꽤 많은 여자를 안아 보았지만 이런 건 단언하건데 처음이었다.

‘경계하라. 대체 무엇을?’

작은 의문을 남긴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라라의 말대로 피로가 쌓였을까. 금세 다시 잠이 들었다.

#

“이게 뭐야……”

같은 날 오후.

창가로 내려오는 햇살에 잠을 깬 쿤은 잠을 털어낼 겸, 화장실로 향했다. 배수부터 장식까지 잘 꾸며둔 공간. 찬 물을 얼굴을 씻고 화려한 장식과 함께 달린 거울을 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보며 상태창을 열었다. 버릇처럼 행해지는 일. 하지만 결과는 평소와는 상당히 달랐다.

[상태창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뚜렷하게 들려오는 알람.

손등에 새겨진 문양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몇 번을 두드려도 상태창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에 휩싸인 쿤이 몇 가지 능력을 직접 사용해 봤다. 축복과 망령제어 등. 다행히 상태창 열람은 막혔어도 능력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생각했다.

확실히 전날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공물을 바치고 난 뒤 찾아온 이상한 피로감. 잠에서 깨고 난 뒤 들려온 목소리. 평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최종적으로 닫혀버린 상태창 역시.

쿵쿵쿵.

“쿤, 자네 안에 있는가? 출병식 관계로 사람들이 찾고 있네.”

“……아. 곧 나가지.”

몇 가지를 더 실험해 보고 쿤이 허리를 폈다.

능력 자체가 막힌 건 아니다. 상태창이 닫히고 일어난 일련의 사태가 무언가를 토로하는 건 맞지만 당장 미룰 수 없는 일이 있다.

결혼식으로 각 지역의 유력가들을 한 번에 불러서 처리했다. 공백으로 나라가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시스템은 변함이 없다. 미리 선출해 둔 관리를 그곳으로 보내고, 불온한 움직임을 제압했다. 서 준경 신을 모시는 사도로서 그 영향력은 민간부터 고위직의 사람까지 골고루 뻗어나가 있었다. 유력가들의 죽음이 알려지고 난 뒤 수도 인근을 중심으로 천천히 상황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남은 건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돼.’

문제는 제국 사절단.

남은 시간은 이틀 정도고, 프리실라와 아도란을 통해 공간 이동을 한다고 해도 빠듯하다. 황제의 목적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일단은……지금 상황에 집중하자.’

마음이 심란하면 일이 안 되는 법이다.

쿤이 양 뺨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라라 말처럼 제국으로 향하는 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심란해 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상심. 평상심.’ 몇 번을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리려 했다.

[카넬과 흰 눈의 남자를 조심해라.]

거울에 적힌 한 줄의 글귀를 보기 전까지는.

쿤이 화장실을 벗어난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

간단한 출병식 이후, 사절단은 마법진을 통해 방울 군도로 이동했다.

쿤은 출발 전 마지막으로 하카림의 동굴을 살피며 이단의 상태를 점검했다. 축복을 중첩해서 깔고, 추후 프리실라가 이를 지켜봐 주기로 약속을 했다. 본디, 아도란을 남기려고 했는데, 방울 군도에서 제국으로 이동한 다음 다시 공화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프리실라만 가능했다. 결국 아도란이 사절단에 남고, 그녀가 공화국으로 돌아가 하카림의 동굴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은 매우 단출했다.

마법으로 이동하는 터라 사람 숫자가 많으면 안 됐다.

쿤과 세이혼. 라라, 루루 자매. 포로, 융. 그리고 보좌관 몇과 호위 몇 정도. 아도란과 프리실라를 제외하면 총원이 서른도 안 되는 작은 그룹이었다.

“다시 돌아오니 감회가 다르군.”

소금 냄새 가득한 방울 군도에 서서 쿤이 중얼거렸다.

1차 이동이 끝나고, 하루를 쉰 뒤 다시 제국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제국 측 마법사가 좌표와 통로를 열기로 했으니, 무리 할 것 없이 푹 쉬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는 살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절단이라니.”

“처지가 많이 바뀌었지. 우리 뒤를 쫓던 융은 저 뒤에 묶여있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은 느긋하게 군것질도 할 수 있지요!”

뒷말은 루루다.

양 손에 어디선가 난 꼬치를 들고 있다. 고기와 야채를 번갈아 꽃은 뒤 그대로 직화를 해서 양념을 바른 거 같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와아. 냄새가 좋은데? 루루야, 어디서 샀니?”

“저기 골목 어귀에서.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여기 은근히 먹을 게 많아.”

“하하. 우리도 가서 하나씩 먹을까?”

군침이라도 흐를 듯 한 라라를 이끌고 쿤이 골목으로 걸어갔다.

루루의 설명대로 널찍한 가판에 불을 놓은 채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양인지, 말인지 모르겠지만 냄새가 꽤 좋았다. 동전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주문했다.

‘해적이군.’

고기를 굽는 사람은 해적이었다.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이를 증명했다.

낮에는 고기를 구워 팔고, 밤에는 바다로 나가서 노략질을 한다. 군도 특유 환경에 맞춰서 적응한 생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응이라. 나 역시 그런건지 모르겠군.’

쫓겨서 올 때는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다. 군도에 새워진 집들이 어떤 형태이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넉넉한 군것질 거리와, 해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행도 그러하다.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상태창도 그런건가?’

특기와 스킬의 나열은 일종의 지침서와 같다.

이걸 써라. 저걸 써라. 저건 위력이 저렇고, 저건 효과가 저렇다. 세상 천지에 그렇게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완전히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다. 단검을 씀에, 실력이 붙고 자신이 능숙하다 여기면 그게 상급 단계인 것이다. 수치로 지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상태창에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불편함은 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은 아니다.

지금도 축복, 권능, 스킬 등. 가지고 있던 능력을 모두 쓸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스탯창과 같은 중계소가 사라진 덕분인지 힘의 유동이 더욱 잘 느껴졌다.

‘신성 점수의 분배 역시도.’

공물을 바치고 신과 소통을 한다.

그 대가로 능력을 얻는다. 이제는 그 단계가 하나 줄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끝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 이 힘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조금 더 깊이 알게 된다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신은 내가 나아가기를 바라는군.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경계하라는 말. 카넬과 흰 눈의 남자를 조심하라는 말. 모두 직접적인 경고다. 지금껏 이 정도로 뚜렷하게 경고를 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은 도처한 위험을 막기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죽음이 보이는군."

“……음?”

생각의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쿤이 시선을 돌렸다. 가판 옆. 어둑한 골목 사이로 로브를 깊이 눌러쓴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눈치 채지 못한 건가?’ 신기할 정도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쿤이 라라와 루루 앞을 슬쩍 가리며 그를 봤다.

“경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나가는 방랑자일 뿐이니까.”

“그렇게 지나갈 거면 말을 걸지 말았어야지. 누구냐?”

“그냥 가기에는 그대에게 걸려있는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짙다. 세상을 덮고, 벽 너머의 영역까지 물들여 버릴 피 냄새. 너무 독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거 같다.”

“시비를 걸겠다는 건가?”

불쾌한 언사에 쿤이 인상을 구겼다.

뚜렷한 적의가 신성력을 타고 구현화 되었다. 이것은 위압에 관련된 능력. 의식의 검과 섞여서는 실체화를 하고 있었다. 만약 이를 가지고 공격을 펼치고자 한다면 바로 커다란 칼을 뽑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해.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건가?”

“느닷없이 사람한테 피 냄새가 난다고 말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가? 그렇다면 그 점은 내가 사과를 하지. 하지만 그대에게서 지독할 정도의 피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다.”

“깨끗하게 씻고 옷 갈아입고 나왔다. 이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상대의 분위기가 있어보였다.

쿤이 농담을 앞으로 내세우며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짙은 그림자에 얼굴이 대부분 가려 있었지만, 체구가 그리 크지 않고 목소리가 어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 가변적인 시간 속에 그대는 피바다 위를 걷고 있다. 세상의 끝에서 울부짖는 모습과, 존재하지 않는 자와의 만남.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니, 그대의 피 냄새가 아니라도 내가 관심 가질 이유는 충분하지.”

“……대체 뭐하는 놈이냐. 농담 하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해.”

“그렇군.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서 그대를 만나는 것도 운명의 변곡점. 그 하나일 수 있겠어.”

또 헛소리. 쿤이 역정을 내려하는 순간,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로브를 뒤로 넘겼다. 은색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고, 매우 독특한.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그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속의 인사법을 모른다. 그러니 무언가 맞지 않는다 해도 너무 탓하지 말기를. 내 이름은 뮬라. 오래 전 별의 탑에 적을 두고 있던 사람이다.”

“……별의 탑.”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인연이었나?

쿤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

신나게 군것질하는 라라와 루루를 불러, 다시 행렬로 돌아왔다.

로브로 얼굴을 푹 가린 채 따라오는 뮬라에 다들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당장은 해 줄 말이 없었다. 쿤은 객실 하나를 비운 뒤 그와 독대를 했다. 별의 탑이라면 거신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 말 한 장소다. 그곳에서 나온 사람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목적이 있는 건가?”

그래서 가장 첫 물음은 이것이 되었다.

“목적이라. 목적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치는 것. 그렇기에 그대를 찾은 건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다. 길을 걷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듯. 들꽃 냄새에 취해, 반려자를 만나듯. 세상이 정해준 운명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 해. 피 냄새는 뭐고, 대체 원하는 게 뭐냐?”

“나는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원하고 있는지 모르지. 그대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 그건 한 둘의 죽음으로 풍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만, 수십만.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종의 멸망을 부르는 냄새일수도. 그것을 막기 위해 세상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면 그것이 바라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말은 길고, 이해하기 어렵다.

쿤이 인상을 팍 쓴 채,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기세를 잔뜩 돋우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내가 그런 피 냄새를 풍긴다는 거냐? 네가 정말로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말 해 봐라.”

“알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그대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라면 답을 할 수 있겠다. 그대는 얼마 안 있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뭐야!?”

덜컹!

쿤이 뮬라의 멱살을 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작고 가벼운 그의 몸은 그대로 딸려 들어왔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탁자위에 올려 둔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깨어졌다.

“이해를 못 한 건가? 그대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죽는다. 그것도……”

쿤이 힘을 더 주며 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뮬라는 태연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쿤을 보며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대의 손으로.”

덜컥. 쿤이 뮬라를 놓치고 말았다.

※작가의 말

뮬라의 대사는 쓰는 제가 가장 힘듭니다. 쿨럭;

별의 탑지기 등장.

준경은 쿤의 과거 이야기를 전부 전해들은 게 아닙니다. 과연 전해듣지 못한. 그리고 알지 못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용.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통은 아직 조금 남아 있지만, 그래도 살아는 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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