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18화 (218/240)

무언가 이상하다.

나는 게이트를 통해서 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시선으로 세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금 보이는 건 뿌옇고 흐려진 세상.

분명 쿤이 잠들어 있는 아노스의 세계는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홀로 중얼거리며 안개 속을 걸어갔다.

몸이 달라붙는 안개는 축축하지도, 냉기가 서려 있지도 않았다. 마치 그림판에 그려 둔 그림처럼 그냥 주변만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변하는 건 없었다.

사방은 안개로 꽉 막혀있고, 공간위로 방향성이라는 것은 없었다. 공간과 안개. 이게 전부였다. 어디를 가도 내가 나아갔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걸음을 세웠다.

이건 물리적으로 걸어서 벗어 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상황이 벌어졌다면 일단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재의 쿤과 만난 것이 문제인가……”

나는 과거의 쿤과 연결되어 아노스의 세계를 바꿔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는 같은 시간대의 쿤을 만났다. 어쩌면 이것이 나와 쿤의 연결을 어그러뜨렸을지도 모르겠다. 타임 패러독스라고 하던가? 이치는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가능성 중 하나였다.

“아니면……”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대에서 게이트를 사용했을 때, 본래 가진 힘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 이건 신성력이 현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요락의 진언처럼 완전히 막힌 건 아니었다. 부분적인 제한. 이건 방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게 벨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회선 문제로 보였다.

나를 도와주는 신이 과거의 쿤으로 회선을 개통했다.

나는 그 회선을 통해서 힘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율이에게 링크를 걸어 다른 회선을 강제로 열었다. 익숙하지 않은 회선에 힘은 전송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특기와 스킬이 봉인되고 전력을 사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남혁 등은 신규 회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회선 자체의 품질이 떨어지는 거군.”

나는 단일 광케이블, 차남혁과 빅터는 허접한 렌선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전력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를 납득 할 수 있다.

“태고의 정령이 힘을 끌어온 것이 무언가 장애를 가져온 거군.”

짚어나가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새롭게 오픈한 회선으로 신의 힘을 끌어왔는데, 그게 너무 약했다. 그러던 중에 태고의 정령이 억지로 이를 비틀어 힘을 뽑아오고 회선이 손상을 당한 것이다. 새롭게 연 것도, 본래 있던 것도. 아무리 튼튼한 기계라 해도 마구잡이로 쓰면 망가지는 게 당연하다. 신이 나와 쿤을 위해 마련해둔 회선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회선을 어떻게 복구하느냐다.

이 회선은 신의 힘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르고가 세상에 개판치는 걸 신이 막기 위해 하나의 활로를 열어 둔 것. 이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신의 힘. 지금 내게 그것을 바라는 건 너무 요원한 일이다.

“중급 단검술. 중급 체력……이런 것들로는 부족해.”

모든 능력이 극으로 오르지도 못했다.

가지지 못한 능력도 굉장히 많다. 신의 힘은 모든 것에 열려있고, 어디로도 뻗어나갈 수 있으니까. 지금의 나는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그저 강렬하게 전해지는 신의 힘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신은 내가 가는 길을 밝혀준다.”

서율이도 말을 했고, 나도 그리 생각했던 부분이다.

만약 신이 단순히 힘을 주어 무언가를 하려 했다면 조금 더 분명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부서진 제단과 게임 시스템. 경험치와 정수 등으로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다.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공물을 바치며 기도할 때, 쿤이 가지는 심정이 이러할까. 조금 막연하기까지 하다. 그대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봤다. 하얀 안개로 뒤덮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거 같다.

“내가 신의 입장이었다면……”

가만히 누워 태고의 정령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거신. 그들의 이야기는 내가 알던 지금까지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본디 삼거신은 아노스도 지구도 아닌 다른 차원의 신이었다.

유르고는 파괴. 나를 돕는 신은 균형. 그리고 벨은 재생이었다. 세 신이 균형을 맞춰 세상을 꾸려갔고, 억겁의 시간동안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세상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아주 작은 호기심의 발로였다.

벨이 생각한 것이다. ‘만약 내가 재생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태고부터 줄곧 유르고에 의해 부서진 세상을 재생시키고만 있었으니까. 자신이 건드리지 않아도 세계가 수복 될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생을 멈췄다.

파괴된 세상은 잿더미로 남고, 무엇 하나 되살아나지 못했다. ‘이렇게 되는구나.’ 벨이 실망을 했다. 자신의 작은 실험이 실패한 것에 실망했다. 딱 그 정도의 이야기. 아마 그렇게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더 이상 파괴할 것이 남지 않은 유르고는 자신들의 세상 자체를 부수기 시작했다.

차원이 갈라지고 시간축이 뒤틀렸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안 벨이 황급히 나서 이를 재생하려고 했다. 부서진 곳을 메우고 어긋난 시간을 바로 잡았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파괴는 끝이 나지 않는 이상은 멈출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세상은 무너지고 모든 생명이 사멸했다.

벨은 크게 후회를 하며 잠들어 있던 균형의 신을 깨웠다. 그리고 빌었다. 자신의 실수로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다고. 제발 도와달라고.

하여……균형의 신은 유르고를 품에 안은 채 봉인에 들어갔다.

더 이상의 파괴는 있지 않도록. 하지만 그건 균형에서 어긋나는 일. 그는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벨 또한 차원에서 추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세계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가능한 곳.

바로 차원의 경계였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세 명의 거신은 봉인되고 추방되어 본래의 세계에서 멀어졌다. 후회와 안타까움이 남지만 지나간 일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신이 남긴 흔적은 너무나 깊은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셈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별의 탑. 탑지기들이 유르고를 불렀다 이거지.”

지식의 탐구를 위하여.

다른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디 거신의 힘은 탑지기들의 부름 정도에 끌려 갈 수준이 아니었으나 억겁에 가까운 봉인 탓에 힘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들은 봉인된 모습 그대로 탑지기들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 뒤는……

“내가 아는 이야기들이지.”

유르고는 봉인에서 깨어나 파괴를 위한 힘을 퍼뜨리고 있으며, 균형의 신을 이를 막기 위해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차원의 경계에 있는 벨은 간접적인 영향력으로 양 측 세계의 말들을 움직이고 있다.

목적이라면 아마도……

“경계에서 벗어나는 것.”

이건 아직까지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경계로 쫓겨난 벨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결국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나를 돕는 척 하면서 유르고의 완전한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그 결말이 경계의 벽을 부수고 세상에 진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다.

……개판 오 분 전인 형제네.

쭉 나열해 놓고 살피니, 완전 개차반이다.

한 놈은 파괴마고, 다른 한 놈은 호기심으로 차원 하나를 말아먹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겨우겨우 애들 끌어 모아 봉인은 하려 하는데, 그마저 마뜩치 않다. 하지만 실제 가정사로 놓고 비교해 보자면 또 그렇게 희귀한 일도 아니다. 형제끼리 갈라져 재산 다툼하고 상처 주는 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일이니까.

“……형제라 이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쩌면 조금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신성력이라는 것이 유르고의 힘에 반발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상극이고 천적의 관계라 예상했다. 하지만 형제라면 그 힘의 방향성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파괴의 끝은 허무. 그렇게 되면 유르고는 살 수 없어.”

파괴도 재생도 항상 쌍으로 존재를 해야 한다.

재생의 신이 없는 이상 모든 것이 파괴되면 유르고는 차원을 부수고 종국에는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균형의 신은 이를 막고 싶어 하는 것이다. 철없는 벨은 아직도 자신만 생각하여 경계를 허물고자 하지만.

“우직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큰 형이 철부지 둘을 아우르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가 내게 바라는 게 무언지 딱 감이 왔다. 절대적인 파괴력으로 이단의 멸망? 아니다. 그런 거였다면 이미 유르고가 날뛸 때 직접 처리를 했겠지. 아마 그가 바라는 것은 포용. 날뛰는 철부지 동생을 다독여 줄 정도의 힘이다.

균형의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파괴에 균형을 맞춰 재생을 사용하고, 재생에 균형을 맞춰 파괴를 사용하는 일이 가능하다. 머리를 긁적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에 펼쳐진 안개를 몸으로 느끼고자 했다.

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안개가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낱알처럼 흩어진 이것들 자체가 힘이다. 게이트를 구동하고, 특기와 스킬을 마련해 주는 근원. 파괴와 재생을 균형잡는 신이기 때문 두 영역 모두에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안개는 상처 입은 흔적이 아니다.

“단검술, 분노, 네크로맨시……”

파괴적인 힘들이 한쪽에 집약되었다.

“생명력, 축복, 신념의 증표……”

다른 한 쪽에는 재생에 관련된 능력들이 집약되었다.

아랑겔로 주변의 힘들을 빨아들일 때, 히어로 메이커 모드로 모든 힘을 제어 할 수 있을 때. 그 색색의 구별과 적아를 구별하지 않는 영역에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두 힘을 양 손에 나눠서 지고 있으니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래서 균형의 신이구나.

이 뿌연 안개는 그 길을 안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구나.

“열려라.”

양 손을 모아 힘을 합친 뒤 양쪽으로 다시 갈랐다.

안개로 뒤덮여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리고 뚜렷하게 보이는 길 하나를 보여주었다. 두 세계를 잇는 통로.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지나다니던 길을 이제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뚜벅뚜벅.

그 위로 천천히 걸어갔다.

#

멍 한 느낌에 쿤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물병이 손에 잡혔다. 눈도 뜨지 않은 채 그대로 물을 넘겼다. 청량감이 퍼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

머릿속이 이상했다.

마치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느낌이었다. 피의 결혼식이 끝나고, 제국 출병까지 하루 정도가 남은 시점.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라며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난 뒤 쓰러지듯 잠든 것뿐인데, 깨어나니 몸이 이렇다. 무언가 잘못 먹은 거라도 있나 싶어 머리를 굴려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으응……벌써 깼어요?”

“아, 미안. 부산스러웠지?”

“아뇨. 이제 일어나려고 했는데요.”

옆에서 라라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에 화장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모습인데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쿤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불쑥 품에 안았다.

“어머……왜 그래요?”

“아, 그냥. 왠지 이렇게 하고 싶었어.”

이상하다.

마치 잃었던 사람을 찾은 거 같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는데도 안고 싶다. 체온이, 체취가. 너무나 오랫동안 접하지 못한 것만 같다. 잠시 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오빠도 불안해서 그래요?”

“불안하다?”

“제국에 가는 거요. 솔직히 저도 불안한걸요. 할아버지라 해도 딱히 기억도 없는데다가, 소문으로 전해들은 성격은 그리 좋지 못하잖아요.”

“아, 그거 말이군. 너무 걱정 할 필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오빠?”

쿤의 말이 너무 비장했을까, 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하지만 쿤은 들리지 않은 채 그녀를 안은 팔에만 더욱 힘을 주었을 뿐이다. 그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안감. 마치 금이 간 유리잔을 손에 쥔 것 같아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만 같다.

‘서 준경 신이시여, 제 앞날에 무엇이 펼쳐져 있는 겁니까?’

항상 기대고 의지하던 신의 이름으로 속으로 불러 보았다.

— 경계하라.

벌떡!

쿤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작가의 말

으으...이번 편은 오타가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평소 올리기 전에 검수를 시도하는데, 지금 제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럴 수가 없을 거 같네요.

병원에 갔다와서 추가 수정을 하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려요 (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