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를 통해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상황이었다.
뒤늦게 일어난 서율이가 상황을 물어 일단 설명을 해 주고, 바삐 자리를 옮겼다. 차남혁과 빅터의 행동을 파악하고 챙겨온 유르고의 심장을 숨겨야 한다.
“이곳이 다른 차원인가? 굉장히 복잡한 모습이군.”
태고의 정령은 게이트를 통해 따라왔다.
그녀자체도 정신체에 가깝기 때문에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심장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유르고의 심장을 봉인하는 건 그녀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 대신, 적의 눈을 피해 숨길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있었다.
“정령왕의 잔재. 이런 물건이 아직 남아 있었다니.”
오래전, 하카림의 동굴에서 토토가 찾아 주었던 물건이다.
사용 할 방법이 없어 가지고만 있던 것을 태고의 정령이 가져갔다. 그녀가 본래의 힘을 사용하고 세상에 수많은 정령이 있었을 때. 수많은 정령들의 힘이 모여서 탄생한 보석이라고 한다. 그 힘이라면 심장을 임시적으로 봉인 할 수 있다고 말 했다.
“나야. 상황은 어때?”
도구를 확보하고 즉시 사방으로 전화를 돌렸다.
서율이는 현재, 게이트 건너편의 상황을 브리핑하는 중. 변이체들의 득세와 이들을 조종하는 존재.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다른 개척자. 우리는 숨길 게 없었다. 볼튼 사와 차남혁이 이 일에 연관되어 있음을 토로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으니까.
“……행방이 묘연하다? 하퍼와 이야기는 해 본 건가? 그라면 군사위성을 사용 할 수 있잖아. 붙여 둔 사람도 있을 텐데.”
죠엘은 고무식 등, 국내에 있던 우리 측 인물들을 통해 정보를 내게 전달했다.
차남혁의 실종. 그리고 그건 볼튼 사의 빅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퍼가 붙여 둔 요원들이 당하고, 각종 감시체제의 눈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게이트에서 나가고 난 뒤, 내가 돌아온 게 2시간 정도 차이가 있으니, 그 사이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삼촌, 다 끝었어요.”
“아, 수고했다. 반응은 어때?”
그때, 서율이가 브리핑을 끝내고 나왔다.
워낙 보고 내용이 심각한지라 거짓말 탐지기와 각종 바이탈 체크도 겸행했다. 안 그래도 아노스에서 시달린 그녀인지라 지금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뭐, 복잡하죠. 당장 무언가 손을 써야 한다, 상황을 지켜보자. 기본적으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아마 제 뒤로 몇 명 정도 더 넘어가고 난 뒤 상황을 정할건가 봐요.”
“그렇겠지. 초거대 군수업체의 인물과 국내 제일 기업의 자식이 무언가 이상한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덜컥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게다가……”
“이런 보고를 받아들이는 사람 중에도 이단에 타락한 사람들이 또 있을거라 이거죠.”
그게 문제다.
어디까지 이단의 힘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 확실하게 상대를 점하고 콕 집어 낼 수만 있다면 싸움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이단을 감지하는 레이더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음.”
그러다 불쑥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가 헨드폰을 사용 할 때 전파가 통해가는 곳을 무어라 부르는가. 기지국이다. 그리고 이 기지국은 주변 사용자의 정보를 받아서 저장한다. 만약, 이런 기능이 신성력과 통하면 어떻게 될까?
“신성력이 전파되고, 중간 기지국에서 주변 정보를 저장한다. 그렇게 되면 전 세계 이단의 규모를 파악 할 수 있다는 말인데.”
괜찮은 생각이다.
다만, 그런 구조물의 건설이 과연 쉬울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단에 타락한 자들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도 모르는데. 반발이 심할 테니까.
“기지국? 무슨 말이에요?”
“아. 신성력을 전파처럼 사용해서, 이단을 찾을 수 없지 않을까 해서. 차남혁도 숨어 버리고, 적을 찾아낼 수 있는 정보력을 갖추는 게 필요 할 거 같아.”
“제단을 사용하면 되지 않아요?”
“나도 그 생각은 했어. 하지만 지방 단체 같은 곳들에서 쉽게 허락을 해 주겠어?”
“굳이 지방단체로 나가야 하나요? 그냥 개인이나, 몇 사람 모여서 건축 할 수 있지 않아요?”
“그게 가능할리가……”
제단은 기본적으로 일정 지역을 아우르는 건축물이다.
지역 인구와 신앙에 비례하여 나에게 신앙 점수를 부여해 주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제단을 건설한다는 생각. 조금은 어긋난 제안이라 생각이 되었다.
“삼촌이 가진 능력은 꼭 그렇게 고정되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노스의 지역과 현대의 지역은 의미가 다르고, 만약 이 영역이라는 것을 사이버 세계로 확장하면 어떻게 처리되는 건데요? 인터넷을 통한 종교모임도 있는데, 의미가 없을까요?”
“……꼭 정해진 대로 쓸 필요는 없다?”
“능력이 합쳐지기도 하고, 다른 것과 섞어서 쓰기도 했다면서요. 이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가 삼촌의 이야기를 쭉 들으면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누군가 길을 인도하고 있다는 거예요. 필요한 힘을 딱딱 준다기 보다는, 그것으로 무언가를 깨닫기 바라는.”
서율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흐름은 그런 면이 있다. 게다가 차남혁과 싸울 당시. 나는 무의식적으로 요락의 진언을 사용했다. 다른 특기는 모두 봉인된 상태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일까? 어쩌면 특기가 봉인되었다고 생각 한 건 가지고 있던 힘의 상태가 바뀌면서 내 스스로 제약을 건 걸지도 모른다.
내 힘의 주체는 거신 중 하나인 존재인가, 아니면 그것을 이어받은 나 자신인가.
아바타가 현체로. 알에 쌓인 병아리가 그 껍질을 깨어 나가듯. 어쩌면 특기와 스킬 등으로 묶여있던 내 능력을 다른 방향으로 깨우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구나.”
“삼촌이라면 분명 좋은 해답을 낼 거라 믿어요.”
믿어주는 사람이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말이지.
서율이의 손을 꾹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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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조사가 끝나고, 나와 서율이를 포함한 인원은 귀국 할 수 있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소환 될 가능성은 있었다. 상황이 워낙 예상을 벗어난 상태로 진행된 터라 조사단과 유엔의 결정자들도 쉽게 판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왕창 모여 토론을 하는 터라 타국 권력자들을 보는 게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귀국한 뒤 가장 먼저 한 건 심장의 봉인이었다.
태고의 정령이 원한 재료가 몇 가지 있었다. 아노스에서 받아 둔 물건이 제법 있어서 이를 충당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봉인을 위한 장소 선별과 구조물의 건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선정하였다.
차남혁과 빅터 등의 행적을 찾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내가 눈여겨보던 크랙과 몇 몇 요주의 인물들 역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나를 옥죄려 들 거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사라지니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뭐? 그게 정말이냐?”
그러다 한 가지 소식을 접했다.
출처는 차동혁이다. 차남혁이 사라지고 난 뒤, 부친과 주고받은 메일 한 통을 그가 발견한 것이다. 그 안에는 상당히 놀라운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차남혁을 비롯한 무리들이 전부 북한에 거주중이라 이건가. 그래서 눈에 안 들어왔던 거군.”
“북한이라니. 대체 거기서 뭘 하자는 걸까요? 게이트가 있는 건 맞지만 딱히 중요한 위치는 아닌 거 같은데.”
정보를 확인하고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공유했다. 그들은 차남혁의 계획을 듣고 경악했다. 특히 각자의 신을 품고 있는 자들은 이단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잘 안다. 차남혁이 이를 제어하여 세계를 제패하겠다 말 하는 걸 미친 짓이라 단언했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
“원하는 바라. 일단은 유르고의 심장이겠지. 심장이 없다면 그 웃긴 계획도 실행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심장은 네가 봉인했다고 했지? 아무리 수단이 좋아도 당장 그걸 찾아 낼 수는 없잖아.”
“그렇지. 그래서 더 이상해. 상황이 이렇게 흘러 갈 것을 차남혁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어. 분명 빠르게 치고 나올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말이지.”
고무식이 던지는 말을 따라 하나씩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제 하루 뒤, 봉인이 완료되면 과거의 쿤과 만나기 위해 게이트에 접촉 할 터. 그 전에 적어도 상대의 속셈과 그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해 두고 싶었다.
“만약, 그걸 예상하고 북한으로 들어간 거라면?”
“……내가 대비 할 걸 예상해서?”
“그래. 만약 차남혁이 즉시 움직여 심장을 노리려 했다면 당장은 어려움을 겪겠지. 하지만 네가 대비를 잘 한다면 이를 막는 건 어렵지 않아. 그리고 그 뒤는 난감함 뿐이지. 사람을 움직이면 흔적이 남고, 안 그래도 이름이 거론되는 차남혁의 상항에서는 분위기가 안 좋지.”
“하지만 그것과 북으로 간 게 무슨 상관이야?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가장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사람이 어떤 종류인지 알아?”
“……욕심이 많은 자?”
“아니. 절박한 사람이야.”
순간 무언가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절박함. 그래, 맞는 말이다. 기댈 곳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한 줄기 빛을 내려 준다면 사람은 그것을 잡으려 한다. 그게 터무니없고 허황된 일이라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상황만을 벗어 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테니까.
“설마, 북한을 움직여서 전쟁이라도 일으킨다는 건가?”
“독제국가는 믿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그만큼 그릇된 신앙이 전파되기 쉬워. 가장 윗선에 있는 돼지 놈 하나 타락시킨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
전쟁에 대한 야욕이 깊은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이단으로 타락시켜, 전 국가를 오염시킨다. 하나의 권력으로 통일 된 국가는 그 전파가 빠르고 아무런 의심이 없다. 거부 할 수 있는 방법도, 도망칠 곳도 없다. 마치 고립된 국가에 퍼지는 좀비 바이러스처럼, 이는 순식간에 영향력을 뻗칠 것이다.
“미친. 그렇게 되면 몇 명이나 죽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탐욕이 머리가 돌아버린 놈이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 아마 부친에게 보낸 메일에는 이 상황을 넌지시 알린 내용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하. 죽어가는 사람들의 핏물로 돈을 벌겠다?”
“가능하지. 역사적으로 봐도. 지금의 상황을 봐도.”
과격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토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게이트 조사건이 크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나면 그 이야기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준비하든, 전쟁을 대비하기는 힘들다. 그 사이로 차남혁이 비집고 들어와 심장을 노린다면 솔직히 막기 어렵다.
그리고 이건……
“내 정체를 알기 때문에 하는 짓이군.”
내가 한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이다. 지인. 사랑하는 가족. 집. 모든 게 이 나라 위에 있다. 그렇기에 북을 흔들어 전쟁을 만들었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기회를 노리고, 나를 가장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아주 치졸하게 나오는군.”
“삼촌……”
“흥분하지 마. 그보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책은 어떻게 할 거지?”
“차라리 외국으로 이주하는 건 어떨까요? 전쟁이 난다 해도, 피하면 그만 아닐까요?”
“안 돼. 이미 봉인을 시작한 마당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힘들어. 게다가 국토가 전쟁터로 휘말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이미 한 번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목도했다.
나라에 큰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꼴을 또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상대가 전쟁을 벌이고자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막아설 것이다.
“나한테 몇 가지 생각이 있어.”
어차피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다.
내 신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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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꼬박 세우는 토론 끝에 몇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수정할 부분이 있고, 실효성이 의심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다. 게다가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변수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할 일이다.
“……걱정되는군.”
나는 은신을 한 채 집 근처에 있는 게이트에 접근했다.
쿤을 만나기 위해서. 죽어라 외치며 싸운 게 얼마 전인데 다시 그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렵다.
과거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몇 개 준비해 둔 것이 있다.
일단 지금 쿤과 만나려는 것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법이기 때문에, 어쩌면 내 의지를 직접 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바꾼 과거가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칠건가다.
지금까지의 변화는 큰 줄기를 바꾸지 못했다. 결국 세상은 이단에 먹혔고, 최후의 항전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영향을 미쳐 쿤의 행보를 달리하면 상황은 변한다. 라라를 잃지 않고, 쿤은 타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됐을 때.
현재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유르고의 심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실의 내가 심장을 봉인한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무효가 된다.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솔직히 제대로 예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지금부터 하는 건 모두 미지의 일이니까. 어쩌면 이단을 온전히 막아서 현실에 열린 게이트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그러지는 상황에 지켜보던 마지막 거신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벨.”
차원에 경계로 쫓겨나, 형제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마지막 거신.
어쩌면 최후의 싸움은 그를 향해 열려있지 않을까……
복잡한 생각을 품은 채 손을 뻗었다.
흰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작가의 말
벨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군요.
맞습니다. 삼 거신 중 하나는 벨이었습니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뒤에 나올 예정입니다.
* 차남혁 등이 북으로 가는 건 꽤 오래전에 구상했던 내용인데,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쓰기가 굉장히 망설여 졌습니다. 다행히 일이 조속히 해결되고 지금은 무리없이 쓸 수 있었지만 며칠 전만 해도 어쩌나 하고 절절 맸지요.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