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16화 (216/240)

무언가 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막혀있던 힘이 흘러들어와 몸을 채워갔다. 막혀있던 시야가 트이고, 숨이 크게 들이마셔졌다. 고원지대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온 거 같다. 나를 막던 한계가 사라져, 행동에 막힘이 없었다.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힘을 모아 그대로 쿤을 후려쳤다. 어둠으로 휩싸여 있던 그가 큰 폭발과 함께 뒤로 튕겨나갔다. 너무나 쉬웠다. 지금까지 아둥바둥 싸운 것이 허무할 정도로.

늘어진 서율이와 싸늘하게 식은 루루를 힘으로 당겨왔다.

그리고 뒤쪽, 싸움의 영역 밖으로 물렸다. 필요한 건 잠시의 시간뿐이니, 그 동안만 머물러 있으면 충분 할 거 같았다.

“크……아아아아!!!”

“모자란 놈. 아무리 아프다 해도, 이렇게까지 날뛰면 되겠냐?”

달려드는 쿤을 그대로 잡아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어둠이 밀려왔지만, 몸에 두른 의식의 힘이 이를 막았다. 지금의 나는 모든 힘을 느끼고, 제어 할 수 있다. 악마를 갈아서 만든 어둠이라 해도 이를 이겨 낼 방법은 없다.

쿤이 버둥거리며 어둠을 밀어 올렸다.

시커먼 폭포가 거꾸로 올라오는 거 같다. 무서운 모습이지만 감흥은 없다. 손으로 후려쳐서 바닥으로 돌려 보렸다.

어둠이 한 차례 출렁이더니 쿤의 발치 아래로 숨었다.

"크아아아아!!!!"

"여기까지 하자."

손을 움켜 쥔 채 그대로 좌우로 당겼다.

우드득—!!

어둠이 갈라지고, 쿤의 모습이 드러났다.

끓어 오르는 용암처럼 어둠이 날뛰며 저항해 봤지만 나는 지금 모든 힘을 제어 할 수 있었다. 좌우로 당긴 손에 힘을 더 주어 그대로 찢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만 둬!!”

울면서 외쳤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그대로 의식의 검을 만들어 쿤의 머리 위를 베어냈다. 공왕의 그것을 잘라냈을 때와 같다. 다만 그 당시와는 다른 것이 있다. 서투른 도축업자와, 섬세한 외과의의 차이라고 할까. 나는 과거보다 훨씬 예민하게 힘을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마……”

쿤 안으로 파고 들어간 이단의 힘을 잘라내고, 상처 입은 그를 온전히 밖으로 드러냈다. 힘은 손끝에서 반항하다, 빛과 함께 사멸했다. 무엇도 지금의 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대로 남은 어둠을 찍어 누리고, 폭주하던 유르고의 심장을 뜯어냈다.

보석처럼 빛나던 심장은 겉면이 모두 사라져, 붉은 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한의 주머니를 열어 그리자를 잔뜩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틀 모양으로 성물을 만들어 심장을 집어넣었다. 굉장한 힘으로 반발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연기와 함께 심장은 상자 안으로 사라졌다.

“그만 해. 돌려 줘……”

“고개를 들어. 숨어있는 건 그만해라.”

눈물 흘리는 쿤의 멱살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초췌하고 힘없는 모습. 가슴 한 켠이 쓰리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어둠으로 몸을 감싸고 숨어버린 어린아이.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과 상실이 그를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냉정하고, 사리 판단이 빠른 사람이지만 감정이라는 건 쉽게 예단되는 일이 아니다.

안타까움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발.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어. 돌려줘……”

“아이처럼 굴지마라. 고개를 들고, 네가 한 짓을 똑바로 응시해.”

“나는……”

“보라고!! 저기 죽어있는 사람이 누구지? 네 손으로 죽인 사람이 누구냐고!?”

“루루……크윽!”

이단의 힘이 잘려나간 쿤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의 원동력은 오로지 복수. 이단이 증폭하던 것도 그 갈망이다. 그리고 그 갈망이 커질수록 가슴에 자리하는 허무감은 커져갔다. 그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내게 이단을 잡아 뜯겼다. 눈을 가리던 장막이 벗겨지고, 현실을 외면하게 해 주던 커다란 차양막이 걷어졌다.

허무로 쪼그라든 쿤은 자신이 저지른 일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라버린 가슴의 흐느낌만을 계속 흘려댈 뿐.

“하아. 한심하군. 예전, 그 강인하던 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의미 없어. 삶의 목적이 사라진 내게 뭘 바라는 거냐. 그래, 네가 이겼다. 이대로 죽여. 어차피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살아 갈 이유가 없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슨 헛소리지? 이제 와서 내게 얻어낼 건 없다. 그냥 죽여.”

이단의 힘이 사라진 그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있었다.

“나는 과거의 너와 접촉 할 수 있다. 어긋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헛소리. 또 다시 나를 속이려는 거냐, 기만의 신? 그렇게 나를 가지고 놀고도 성에 안 차는 거냐!”

그래,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그래서 애초부터 과거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거고. 하지만 이단이 씻겨나간 쿤이라면 설득이 가능하다.

“네 말대로 나는 네게 더 이상 얻을 만 한 것이 없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나는 지옥과 같은 광경을 눈으로 확인했다. 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현실을 바꾸겠어. 그렇게 된다면 라라가 죽을 일도, 네가 이단에 휩싸일 일도 없겠지.”

“말 도 안 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야.”

틱. 그 순간, 팔 부근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의 균열. 몸 전체로 두르고 있는 신성력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히어로메이커 모드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건 너무 빠르다. 하지만 시작이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묻는 말에 답을 해. 제국에 와서 황제를 보았을 때. 그는 이단에 노출되어 있었는가?”

“황제……?”

“똑바로 내 눈을 보고 답을 해. 나는 진심이다. 네가 과거의 정보를 제대로만 준다면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어. 라라를 살리고 싶지 않은 거냐!?”

“라라를……그녀를 정말로 살릴 수 있다는 건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먹힌 건지,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 하여 수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쿤이 표정을 달리했다. 멱살을 놔 주니,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희미한 잔금이 퍼지고 있었다.

외과의의 섬세한 손으로 이단을 잘라내기는 했으나, 그 동안 혹사된 육체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어쩌면 내 히어로 메이커 모드가 끝나는 것보다 그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황제는……이단과 관계가 없다.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매우 자세히 살펴봤으니까. 이단과 관계있는 자라면 카넬. 대마법사 카넬이 이단의 힘을 사용한다. 미리 알았다면 방비를 했겠지만……”

“카넬이 이단의 종자인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일을 획책한 자는 아니야. 너를 꾀어내고, 앞서 보았던 자들을 이용한건 다른 존재다. 누가 있지? 이렇게 판을 짠 자라면 분명 한 번 쯤은 너를 보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을 거야. 굳이 이단이 아니라도 좋아.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나?”

배후에 숨겨진 1인.

과연 황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차남혁 등을 선동하여 이번 일을 계획한 이가 누구인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과거로 돌아가도 당할 수밖에 없다.

“……한 명. 이상하다 생각한 사람이 있다.”

“누구지?”

“이름은 모른다. 다만, 키가 크고 눈이 하얗게 물들어 있어서 이를 특이하게 생각했을 뿐. 대면식이 끝나고, 누명을 쓴 채 감옥으로 끌려 갈 때 문관들이 서 있는 곳에서 발견 할 수 있었다.”

“큰 키에 하얀 눈? 정말인가!?”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딱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이단과 획책하여 나를 방해하려 드는가?

“정말이다. 아는 자인가?”

“어쩌면. 아직 이해는 안 가지만, 설명대로라면 내가 아는 자가 맞을 거 같다.”

“그럼, 과거로 돌아가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건가? 정말로 그녀를……쿨럭!! 커억!”

쿤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피를 토해냈다.

육체가 한계를 넘어 붕괴하고 있는 것이라 내 힘으로도 이를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면 공왕 때와 다를 바 없다. 어차피 과거를 돌려 사라질 쿤이라 생각해도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다.”

“흐……그런가. 정말이었으면 좋겠군. 만약 이번에도 나를 기만하려는 거면, 죽어서도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쿤의 몸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한 번 가속화되기 시작한 몸의 붕괴는 멈출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지워야 할 현실이라 하여도, 쿤의 죽음을 눈으로 목도하는 건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루……를. 이곳으로.”

비틀거리는 손으로 쿤이 부탁했다.

힘으로 루루를 당겨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힘겨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는 부서지는 손으로 창백하게 식은 루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게 내가 저지른 일이군……”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슬픔을 이해한다 해도, 그가 죽인 이들이 너무나 많다. 세이혼을 비롯해서 아도란과 루루까지. 함께 어깨를 대고 고난을 이겨온 사람들을 그리 죽였다는 건,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의미 없겠지. 나는 이제 곧 죽는다. 기만의 신……정말로 네가 과거를 바꿔 이 더러운 현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부디 그렇게 해 다오. 그리고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이 일을 잊는다 해도 영혼으로 맹세하겠다.”

투두둑. 잘게 부서진 쿤의 몸이 루루의 위로 쏟아졌다.

소리가 먹히고, 입만 달싹였다. 이내, 눈동자가 흐려지고 남은 육체 역시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루루의 시체와 회색빛 먼지.

그게 남은 전부였다.

#

쿤이 죽고 얼마 안지나 히어로 메이커 모드 역시 해제되었다.

곧바로 서율이를 챙겨서 자리를 떴다. 차남혁 등이 왔던 통로를 관통하니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통로 중간이 녹아있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적으로 보호되는 길을 그들이 억지로 뜯어버린 거 같았다.

서둘러야 했다.

차남혁과 빅터는 연결이 해지되었고, 내가 그들을 방해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곧바로 사람을 보내, 나를 공격 할 수 있다. W.K로 주변을 보호하고는 있지만 안심하기는 힘들다.

“……”

통로(아마도 황릉의 일부)를 나와서 본 밖의 전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드워프, 리자드맨. 그리고 하카림의 딸인 로리안과 아도란의 시체도 보였다.

소설로 치자면 이건 세드 엔딩이다.

이런 꼴을 보기는 싫다. 저절로 이에 힘이 들어갔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탈 만 한 것을 찾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 그쪽은 아니다.

그 순간. 내 발을 잡아채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건 기억에 있다. 히어로 메이커 모드가 발동하기 전에 들려왔던 바로 그 목소리다. 의문이 있었지만, 상황이 급해서 묻어 두었던 그것.

걸음을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 기다려. 이편이 너와는 얘기하기 편하겠네.

흰 빛이 눈앞에서 맺히더니 하나의 형태를 이뤄갔다.

손바닥에 가려지는 작은 크기에 등 뒤로 세 쌍의 날개가 달렸다.

요정. 그래, 딱 요정의 모습이었다.

“됐네. 내 목소리가 들려? 육체로 현현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

“……잘 들린다. 대체 너는 누구지? 요정인가?”

“비슷하지만 달라. 나는 태고의 정령. 모든 정령의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야.”

“태고의 정령! 유르고의 심장을 봉인하고 있던?”

“그래. 상황이 어려워, 봉인을 포기하고 네게 힘을 전해 줄 수밖에 없었어. 덕분에 이제 심장은 완전하게 밖으로 드러나게 됐지.”

한숨을 폭 내쉬며 태고의 정령이 말했다.

그리고는 날개를 파르르 떨어 내 어깨위에 앉았다. ‘서쪽으로 가. 네가 타고 온 것과 비슷한 물건이 있어.’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일단 걸음을 떼면서 물었다.

“심장은 성물로 보호를 했다. 괜찮지 않을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심장의 영향력은 내 봉인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 네가 가진 힘이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막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

“거신, 유르고가 다시 일어나는 거지.”

“……거신이라고?”

서쪽으로 달려, 멀쩡해 보이는 트럭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주변으로 변이체들이 남아 있었지만 쓸어버리는 건 문제가 없었다. 빠르게 정리를 하고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 고장 난 곳은 없었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길어. 유르고는 삼 거신 중 하나이며,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신이야. 우연히 이곳의 존재들에 의해 불려왔지만 본래대로라면 별 하나를 감싸고도 남을 육체를 지니고 있어야지.”

“삼거신이라. 유르고 같은 존재가 더 있다는 건가?”

“하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네가 품고 있는 바로 그 존재. 유르고의 형제이며 질서와 균형의 가치를 표방하는 자.”

“……내게 힘을 준 존재가 유르고와 형제라고?”

“그래. 유르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원을 맡고 있던 세 명의 거신 중 하나이지.”

무언가 중요한 게 벗겨지는 기분이다.

다른 차원의 신들. 그 중 둘이 지금 밖으로 드러났다. 어째서 그들은 싸우고, 타락시키며, 우리의 세계로 영역을 뻗쳤는가.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남은 거신은 누구지? 둘이나 관련됐는데, 남은 하나만 그렇지 않다는 건 이상해.”

“예리하네. 네 말이 옳아. 사실, 이 일의 시작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입으로 그의 이름을 말 할 수는 없어. 자칫 잘못하면 그를 이곳으로 불러 올 수도 있으니까.”

“잠깐. 그럼 내가 말 해 볼게. 맞는지만 확인을 해 줘.”

“……그 정도라면 괜찮겠네.”

나는 즉시, 떠오르는 이름 하나를 그녀에게 말 했다.

“바로 맞췄어.”

“아.”

탄성이 흘러나왔다.

※작가의 말

누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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