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힘이 부딪혔다.
신성력과 타락한 이단의 기운. 악마의 힘이 충돌하며 강렬한 파동을 만들었다. 바닥이 부서져 모래 알갱이가 되고, 대기가 들끓어 물결무늬를 만들었다.
견디지 못하는 것들은 터져나갔다.
수많은 변이체들이 동시에 무너지고 벽을 두드리던 탱크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절규와 같은 충돌 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함께 하던 두 사람의 싸움을 슬퍼하듯이.
“네놈만큼은 용서 할 수 없다!!!”
“그리 슬펐다면, 차라리 울어라!”
어둠과 빛이 뒤엉켜, 회색 빛 물결을 만들었다.
이는 벽을 넘어 동굴 자체를 흔들어 모래 먼지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벽 안의 이들이 더욱 바빠지고 고성이 오갔다. 행방을 알 수 없던 드워프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너를 씹어 먹고, 잘난 신들의 목을 따고 난다면 그때가 돼서 눈물을 흘리겠다!!”
“원망을 남에게 돌리지 마!”
“시끄러워!!! 네놈이 아니었다면!! 네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건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절규가 어둠이 되어 하늘에서 떨어졌다.
아득할 정도의 탄식이 그 안에 스며 있었다. 의식이 검이 이를 잘라내며 그 파편을 내 감정에 쏟아냈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지만, 그만큼 깊은 절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쿤을 말리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심장을 찾아 본래의 세계로 도망 갈 수는 있지만 그 뒤로 남을 사람들은? 과거를 고쳐 현재를 바꾼다 해도 그것이 쉬운 선택이 될 수는 없다. 희생을 발판으로! 거침없이 외치는 영화 속 영웅처럼 나는 모질지 못하다.
“그만 둬—!”
그 순간, 새빨간 홍염과 함께 벽 너머로 누군가 뛰어 올랐다.
붉은 빛이 어둠에 충돌하며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바람이 응축했다가 좌우로 밀린 탓에 쿤과 내 거리도 크게 벌어졌다.
“언제까지 남 탓만 할 거야!”
“……루루?”
붉은 머리에 조금 더 성숙한 외모.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라라의 죽음과 쿤의 타락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의 상태를 묻지 못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있었지만.
“비켜라. 네 언니의 복수를 위해 나선 거니까.”
“집어치워. 그게 어떻게 언니의 복수야? 제국의 황가도 카넬도. 모두 오빠가 세상에서 지워버렸잖아. 정신 차리고 보라고. 정말 원망하고 싶다면, 카넬을 조정한 이단의 힘을 원망해. 바로 오빠가 몸에 두르고 있는 바로 그거!”
“시끄러워!!! 나는……나는 복수를 위해 이곳에 있다!!! 나를 기만한 신을 죽이고,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을 없애 버리겠어!!”
“나도! 나도 죽일 셈이야!?”
루루가 울듯이 외쳤다.
쿤이 잠시 몸을 움찔 떨었다. 사랑하는 이가 라라였다고는 하지만, 루루 역시 그만큼 정이 든 사람이다. 아무리 그가 이단에 타락했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녀에게 해를 끼칠까. 이렇게 생각했지만……
“비켜라!!!”
이미 세이혼을 죽인 전적이 있다.
검은 물결이 솟아올라 루루의 불꽃을 때렸다. 과거와 비교해 강해진 루루의 모습이지만 타락한 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단번에 수세로 몰리더니 벽 끝까지 물러나야 했다.
“쿤! 이 빌어먹을 놈이!!”
의식의 검을 뽑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희미하다. 이 상태로 낼 수 있는 전력이 거의 바닥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콰르르르릉—!!
하지만 의식의 검을 휘두르기 전, 루루의 불꽃 위로 다른 홍염이 끼어들었다.
하카림의 딸, 로리안이었다. 치료를 받고 난 건지, 인간의 형태 그대로 넝쿨을 밟고 벽 너머에 서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와 등 뒤로 솟은 날개가 그녀의 진면목을 알게 해 주었다.
“인간!! 아도란에게 들었다. 네게 이 상황을 뒤엎을 방법이 있다고?”
“……가능성은.”
확답은 할 수 없다.
미진한 답.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로리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을 길게 찢어, 웃음을 만들며 외쳤다.
“그럼, 가라! 저기 있는 머저리는 우리가 막아 줄 테니까. 네가 정말로 아빠가 말 한 모습의 절반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희망을 걸어 볼 만 하겠지.”
“하카림이?”
“군소리 할 시간 없어! 어서, 가!!”
그녀 옆으로 넝쿨을 동여맨 숲의 여왕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삐 움직이던 드워프들도 무언가 신기한 무기를 들고 그 주변으로 합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 너머로 살기 위해 도망쳤던 사람들. 과거에 보았던 리자드맨이나, 중무장한 제국의 기사도 비장한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당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어긋난 우리의 세계를 바로잡아 주세요.”
아도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발밑으로 녹색 기운이 몰아치더니, 반투명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황가의 무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그냥 두고 가야 하는가……
이들을 전부 합친다 해도 쿤을 이기지 못하리란 건 잘 알고 있다. 그 죽음이 슬프다. 하지만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는 건 그렇게 분노를 토해낸 쿤의 마음이었다. 텅 빈 마음은 재조차 쌓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끝없이 쏟아내고 쏟아내. 모든 것이 비어버렸을 때, 자신을 좀먹고 사멸해 버리겠지.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같다.
“삼촌……가야 해요.”
그런 내 손을 서율이가 잡았다.
그녀는 이미 울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고 슬퍼하는 것일까. 먹먹한 가슴 위로 물이 번지는 거 같았다.
“삼촌!!”
“……알고 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돌렸다.
슬픔이 발을 잡아끌지만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서율이와 함께 통로로 발을 들였다.
빛이 우리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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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란이 만들어준 통로를 건너자 회색빛 돌들이 길게 늘어진 제단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사방으로 원소를 기호화 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굉장히 아름다운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저게 바로……”
“유르고의 심장. 아니, 일단은 황가의 심장이라 불러야겠군.”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색으로 뒤덮인 보석이 하나 있었다.
태고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황가의 심장. 유르고의 심장을 봉인한 채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은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대해를 내려다보는 기분과 흡사했다. 직접 그 바닥을 보지 않아도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기운은 느낄 수 있으니까.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취한 듯 몽롱해져 있던 머리를 흔들어 깨운 뒤 심장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서니 생각보다 크기가 제법 컸다. 들고 왔던 배낭을 싹 비우면 겨우 들어 갈 거 같았다.
“서율아 와서 배낭 좀 잡아 줘.”
무게야 그렇다 쳐도, 혼자서 넣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서율이를 불렀다.
“……”
그런데, 그녀가 답이 없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봤다. 그녀는 딱 벌어진 입으로 내 어깨 너머. 제단의 끝자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어둠 속에 통로가 어디 론가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그 위로 무언가 보였다.
“차……남혁?”
그림자로 가려져 있지만, 분명 그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예의 주시했기 때문에, 적어도 접속 전에 미네소타 인근에 없단 건 확인하고 있었다. 완전히 떨어진 다른 게이트가 이 주변으로 연결되어 있던 걸까?
“서 준경. 그랬군, 그랬어. 어쩐지 자꾸 눈에 밟힌다 했더니, 네놈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던 거였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 온 거냐?”
“네놈이 잘난 마술을 사용하듯, 우리도 비슷한 게 있어서. 너와 이놈은 연결되어 있더군. 좋은 길잡이가 되었어.”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림자 안에서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나는 빅터 이고르. 볼튼 사의 인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르톤이었다. 악마 주제에 포로로 잡힌 건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아니었다.
“네놈, 설마……”
“미안하게 됐군. 이쪽 조건이 워낙 좋아서 말이야. 배신의 악마의 덕목이 아니겠어?”
“나와의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하하. 재미있는 게 말이야, 네가 이곳으로 넘어오니까 본래의 계약도 희미해졌다는 거야. 풀린 고삐에 처음에는 그냥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건 나름대로 기회가 될 거 같더군. 그러던 차에 이들을 만났지. 좋은 파트너로.”
“네가 봉인을 넘어 우리 세계로 온 이유를 잊은 건가?”
이단의 횡횡하면 인간이 타락하고 악마는 살 길이 막힌다.
계약이 풀려서 그가 배신을 하는 건 이해해도, 그 대상이 이단의 종자라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득이 될 게 있어야 배신을 할 거 아닌가.
“그래서 심장을 찾으러 온 거 아닌가?”
“……하. 설마 심장이 돌아오면 이단이 멀끔하게 정신이라도 차릴 거라 본 건가?”
“혼자 바동거리는 그쪽에 투자하는 것보다, 이곳이 더 확률이 높아 보여서 말이지. 아노스의 인간들과 다르게, 지구의 인간들은 꽤나 대단한 부분이 있어. 스스로의 기술로 유르고의 침식을 방어하기도 하잖아?”
역시 악마는 악마라 이거군.
눈치를 보고 이길 수 있는 곳에 붙었다. 만약을 대비한다고 계약까지 맺어 놨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실수인가.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 건 의미 없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이 심장을 손에 넣었을 때나 허락되는 이야기다.”
“쯧쯧. 허세는 그만 부리지? 별 볼일 없던 일개 소시민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결국 여기까지다. 심장을 놓고 물러나라. 그렇게 한다면 고통은 없이 죽여 줄 테니까.”
차남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무거운. 그리고 질척거리는 이단의 기운이 확 하고 다가왔다. 쿤의 것이 마치 밤하늘과 같이 막막했다면 이건 심해에 사는 생명체처럼 이질적이다. 다리를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잡아 뜯어버릴 거 같다.
……셋.
상대를 가늠하는 것부터 했다.
아르톤은 악마왕. 차남혁과 빅터는 본래의 전력으로도 쉽게 상대 할 수 있을 거라 예단하기 어려웠던 이들이다. 객관적으로 봐서 내가 이길 확률은 극도로 낮다. 더군다나 나는 서율이까지 지켜야 하는 몸.
승산은 한 자리수로도 안 될 것이다.
“이건 내어 줄 수 없어요.”
“서율아……?”
“몇 사람이나 우리 앞에서 목숨을 걸었는지 알고 있잖아요. 저런 사람들에게 심장까지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뻔해요. 결코 건네 줄 수 없어요.”
서율이가 내 옆으로 와서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힐끔 본 뒤 말없이 마주잡아 주었다. 그제야 떨림이 가라앉았다.
이를 본 차남혁이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하. 우습군. 날 거부하고 선택한 것이 고작 그런 인간인가?”
“흥. 삼촌이 그쪽 보다는 몇 배 나아요. 처음부터 너는 마음에 안 들었다고요!”
“꽤 거슬리는 소리군. 어디서 무슨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인간 따위가 나와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몸은 그리자를 통제하여 전 세계를 손에 넣을 남자다. 네가 고작 그 정도 남자에게 만족하는 여자라 하니 실망이군.”
“아아……클래식이라니.”
웃음이 나온다.
세계 정복이라니. 설마 현실에서 이딴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르고의 심장을 가지고 가, 이단의 힘을 통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계를 재패? 아주 중2병이 단단히 걸려서 골수까지 침범을 했구나.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말 하는가 보다.”
“……명을 재촉하는군.”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했겠지? 가문을 이끌어 줄 재목이라고? 동생이 가진 것도 빼앗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을 거야.”
“건방떨지 마라. 네놈 따위를 죽이는 데는 손가락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때처럼 말인가? 새벽에 미친 듯 차를 몰아 나를 치고 죄를 동생에게 떠맡긴 그 일처럼? 결국 넌 자신의 일에 책임지지 않는 겁쟁이일 뿐이야. 스스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지. 가문? 네 것이 아니야. 유르고의 힘? 역시 네 것이 아니야. 그런 주제에 세계를 어쩌고 저째? 동네 건달패도 적어도 너보다는 나아.”
쩌저저적—!!
그 순간, 바닥이 새파랗게 얼어붙더니 내 쪽을 향해서 밀려왔다.
이단의 기운이 강하게 풍겼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저놈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의식의 검을 손에 쥔 단검에 실어 그대로 그었다.
새파란 얼음이 반으로 쪼개지며 나와 차남혁을 잇는 길을 만들었다.
“덤벼라, 애송이. 인생의 쓴 맛을 보여 줄 테니까.”
도발의 효과는 강력했다.
※작가의 말
고조되는 싸움.
배신자 아르톤.
준경은 과연 무사히 심장을 가지고 돌아 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