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탱크가 이곳에 왔는가.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곧바로 해답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미네소타에 있는 게이트를 우리가 점유. 황가로 향하는 길이 막혔다고는 하지만, 주변에 다른 게이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거리와 안전성이 문제겠지만, 아예 싹 다 무시하고 움직인다면 이곳 주변으로 다른 전진기지를 설치했다 하여도 이상함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탱크라니.
볼튼사가 군수업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거목이라 하여도 이 정도 물건을 움직이려면 부담이 상당하다. 그만큼 상대도 이번 일에 힘을 주력하고 있다는 의미. 어쩌면 일전에 보았던 빅터 이고르나, 차남혁이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도란, 일단 저것부터 막자. 위쪽에 있는 문.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거지?”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최후의 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에 저항하게 설계된 마법적 장치. 다만, 포격해 보는 존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무기를 이곳으로 옮겨온 거였군.”
아노스의 역량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차남혁 등을 끌어들인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파해야 할 문이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탱크가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쾅……!
다시 한 번 충격음이 들려왔다.
땅이 우르르 떨렸다. 벽 위에서 모래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그냥 두면 지저의 공간이 위험 할지도 모르겠다.
아도란을 재촉해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비밀 통로로 이어진 지저세계는 앞서 보았던 거대한 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벽 내부, 층계로 이어지는 공간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바뀌고, 마법적으로 투영되는 공간을 통해 건너편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꺄아악!!”
도착하는 순간, 건너편 탱크가 불을 뿜고 포탄이 정면에서 폭발했다.
붉은 화염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우리를 흔들었다. 쉽게 중심을 잡지 못해 한참이나 휘청거려야 했다. 외벽이 쩍쩍 갈라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도란 마법으로 막을 수 없는 건가?”
“……아쉽지만 불가능 합니다. 저는 이 공간을 구축하는 것으로 모든 마력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에.”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의식의 검으로 때리려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
힘이 떨어진 지금 상황에서 장거리 타격을 하는 건 무리.
그렇다고 안으로 파고 들어가지 우글우글 거리는 변이체들과 중간에 서 있는 남자. 쿤이 걸렸다. 그와 싸우는 것도 마뜩치 않은데다가 얼마나 강할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다. 들고 온 수류탄 등도 생각해 봤지만 번들거리는 탱크에 통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 쿠우우우우우!!!
그 순간.
고막을 찢어버릴 듯 한 굉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벽 앞으로 드리워졌다.
또 다른 병기인가? 몸을 숙이며 서율이를 당겨 안았다.
하지만 그건 병기가 아니었다. 아니, 병기인가? 적어도 적의 것은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활강한 것은 바로 드래곤이었다.
“아……! 로리안!”
하카림의 딸. 드래곤 로리안이 본신으로 현현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강력한 위압감과 함께 붉은 화염이 땅 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하카림보다 덩치가 작고 힘도 미약해 보이지만, 너절한 변이체를 잡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뜨거운 화염은 한 번에 탱크를 가열시켜 색을 변질시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탱크 안에서 사람이 살아 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 αμπέλου!
그리고 그 사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바닥을 뚫고 갈색 넝쿨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숲의 여왕이 한 것이 분명했다. 불에 녹아 꿈틀거리던 변이체들이 단번에 엉켜 짜부라졌다. 단 두 번. 깔끔하게 벽 너머에 존재하는 적들을 물리쳤다. 위험하다면서 다급히 올라온 내가 민망할 정도로.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
아도란이 어둡게 말을 깔았다.
동시에 불꽃 사이로 검은 연기가 확 하고 올라왔다.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단에 대한 혐오이지만, 상당히 뒤틀려 있었다. 이단이 단순한 혐오의 대상이었다면 이것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심장을 옥죄는 그런 느낌이 서려 있었다.
쿠드득. 쿠득.
불에 타 재가 되었던 변이체들이 다시 엉겨 붙어서는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형태가 남아 있는 건 남아 있는 데로, 없는 건 없는 데로. 흉측한 몸뚱이를 일으켜서는 다시 장내위로 도열했다. 그리고 작동이 중단된 탱크가 다시금 포신을 움직였다. 열기에 타죽었을 거라 생각되는 내부의 인물들 역시 쿤의 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네크로맨시……”
“타락한 그의 힘은 네크로맨시에 집중되었습니다. 그가 거느리는 군세는 말 그대로 불멸. 주체가 되는 존재를 물리치지 않는 이상 무엇으로도 이들을 밀어 낼 수는 없습니다.”
“불명의 군세라니. 아무리 그래도 힘에는 제약이 있을 텐데?”
“세상은 유르고의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억겁의 시간동안 힘을 사역해도 그는 지치지 않습니다.”
힘이 떨어지지 않는 네크로맨서라니.
신성력을 기반으로 하는 축복을 사용하지 않는 쿤이라 해도 어떨까 했는데, 이건 과하다. 이런 식이면 아무리 싸워도 힘 낭비일 뿐이다.
“삼촌, 그럼 쿤이라는 사람은 아예 안 죽는 건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네크로맨시로 불사성을 유지하는 건 힘의 주체가 있을 때 뿐. 그 주체가 쿤인 이상, 그는 타격을 받으면 죽게 돼 있어.”
“그럼, 저 불꽃에는 왜 타격을 입지 않았죠?”
이글거리는 불꽃 사이로 쿤이 걸어오고 있다.
재가 된 옷자락이 휘날려 연기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땅을 녹이는 고열조차 그의 몸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서율이가 말 한 대로 어디에도 타격받은 흔적은 없었다.
“악마의 장막……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악마? 타락한 악마가 그를 돕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쿤에게 복속당한 악마들이죠. 형태조차 잃은 채 그의 몸 주변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정신체인 그들은 쿤의 제어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다급히, 악마왕 몇과 계약을 맺어 그들을 봉인하기는 했지만 늦은 감이 있죠.”
아르톤이 아도란의 힘을 빌린 이유가 지금 나왔다.
아마 지금의 형태를 취하기 전. 아도란이 힘을 사역 할 수 있었을 때, 봉인을 한 거겠지. 하지만 그의 말대로 늦은 감이 있다. 쿤 주변을 돌고 있는 악마의 흔적. 드래곤의 불꽃조차 침범하지 못한다면 그를 처리하는 건 요원하다.
— 기다려라. 이제 곧 네놈들의 피와 살점을 씹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내 부름을 외면한 그 기만의 신조차 앞에 무릎을 꿇리겠다. 나락의 끝. 절망에서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겠다!!
쿤의 몸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동굴 위쪽으로 선회해 돌아오던 로리안의 날개가 한쪽으로 꺾였다. 거친 비명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동체가 벽에 부딪혀서는 그대로 떨어졌다.
“로리안!!”
누군가의 외침.
그리고 바닥에서 넝쿨이 폭발적으로 올라와 쿤을 옭아맸다. 하지만 의미 없다. 넝쿨은 단 일초조차 그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닿는 순간 모든 넝쿨이 증발하고, 검은 기운은 바닥으로 스며들어 힘을 사역하던 숲의 여왕을 노렸다.
“젠장……!”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마법적으로 열린 벽의 틈 사이로 발을 걸치고는 들고 온 라이플을 견착 했다.
그리고 바로 쿤을 향해서 사격.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빠르게 튀었다.
“네놈은?”
쿤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붉게 물든 눈동자와 갈라진 피부. 하지만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외모가 아직 남아 있다. 그 사실이 가슴을 턱 막히게 했다. 그는 내 분신. 또 다른 나이다. 그가 살아온 생을 알고, 함께 경험했었다. 그런 그가 타락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마치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네 삶은 의미 없었어.
결국 타락하여 종말로 귀결될 뿐이니.
이렇게……
“네놈은!?”
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도 알아봤을까? 어쩌면. 꿈을 통해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게다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해도 결국에는 나라는 걸 알아채게 될 것이다. 내가 쿤을 본 만큼, 쿤도 나를 느끼며 살아왔으니까.
“서 준경—!!!!”
피를 토하듯, 쿤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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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고 두렵기보다 쓰린 아픔이 먼저 다가왔다.
쿤의 절망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라라의 죽음 이후, 비난을 쏟아낼 곳이 필요했던 그의 마음. 아마 그 어떤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지키지 못했는가.
반드시.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지킨다 맹세를 했는데.
“우는 건가, 쿤.”
“네놈……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올라 쿤의 전신을 뒤덮었다.
답답할 정도의 기운이다. 갈라진 벽의 틈 사이로 압력이 가해져 균열을 더욱 크게 벌리고 있다. 탱크의 지원사격이 없다 해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를 원망하는 건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기만하고……! 그녀의 죽음을 못 본 척 하고! 네 살을 씹어 먹어 그 증오를 씻어내겠다!”
“씻어 낼 수 있겠나?”
말과 동시에 손짓으로 아도란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가 쿤을 막아둘 때, 로리안을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법진을 통해 어디론가로 이동을 했다.
로리안을 구한다고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어 보이지만, 일단 되는대로 해 보기는 해야지.
“또 다시 나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이젠 더 이상 속지 않는다. 그토록 네가 싫어하던 힘 앞에 무력하게 죽어 봐라!!”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날아왔다.
문을 닫고 피한다면? 일차적 피해는 모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쿤과의 대담에서 우위를 찾을 수 없다.
짧게 숨을 내쉬고 정신을 집중해 의식의 검을 휘둘렀다.
하얀 색 실선이 검은 기운을 통째로 베어냈다.
악마를 갈아 넣은 힘이라 해도 의식으로 검으로 베어내지 못할 것은 없다. 부서진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의식의 검……!”
“이제는 더 이상 그 힘을 쓰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그 힘을 사용할 때 떠오르는 후회에 겁이 나는 건가?”
“무슨 개소리냐!?”
“내게 물을 내용인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라라를 지키지 못했는지. 가장 원망해야 하는 건 네 자신 아니던가?”
미안……
“닥쳐!!!!”
불같이 화를 낸 쿤의 등 뒤로 드래곤 모양의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형태를 만드는 것도 자유자재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는 큰 아가리를 벌려 내 목을 노렸다.
이번에도 의식의 검으로 베어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손끝이 떨려왔다. 무한한 힘의 쿤과 달리 나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이 상대로 대치가 길어지면 버틸 수 없다.
“어째서 그런 거지? 네 분노를 네게 돌릴 만큼 용기가 없었나?”
“도망쳐 버린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도망쳤다. 그렇게 변명하는 건가? 나를 기만의 신으로 만들어야 네 죄책감이 조금은 줄어드니까?”
“시끄러워!!!!”
검은 폭풍이다.
사방의 변이체들을 휘감아 그대로 허공으로 띄웠다. 압도적인 힘에 속이 매스꺼웠다. 육중한 탱크조차 그 힘에 들썩이고 있으니, 위력을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벽의 균열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세계의 것이 아닌 물리적 피해가 최후의 문에 깊은 상처를 낸 모양이다. 이대로는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다.
“삼촌, 로리안을 구했어요.”
그때, 서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너머. 드래곤의 형태를 잃고 쓰러져 있던 로리안이 사라져 있었다. 희미하게 남은 넝쿨 조각으로 봐서, 숲의 여왕이 그녀를 구한 모양이다.
“이제 어떻게 해요?”
“이대로 벽이 돌파당해 심장을 쿤에게 빼앗기면 당장 우리 세계가 위험하다. 과거의 쿤으로 시간의 축을 돌린다 해도, 당장 세상이 무너지면 일이 어려워. 일단, 쿤을 시선을 돌리고 봉인된 심장을 빼돌린다.”
“심장을요? 설마, 우리 세계로?”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그 전에 심장이라는 거. 내가 옮길 수 있는 규격이기는 한 건가? 워낙 일이 급해서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로리안을 구출했습니다.”
그 순간, 아도란이 마법진을 통해 다시 올라왔다.
꽤 지쳐 보이는 인상. 딱히 큰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이렇다는 건 벽 자체가 그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도란, 버틸 수 있겠어?”
“어렵습니다. 반복된 피격에 벽 사이로 균열이 번졌습니다. 마법이 약해져, 쿤의 힘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으니, 이대로 견딘다면 길어야 한 두 시간 정도.”
“봉인된 심장. 내가 옮길 수 있는 크기인가?”
“심장을? 크기 자체는 크지 않지만, 이 마당에 어디로 옮길 생각인가요?”
“내가 사는 곳으로.”
일단 옮길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의 경우 들고 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말이다.
아도란이 잠시 멍 한 얼굴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세계로 심장을 옮기고자 하는군요.”
“과거의 쿤과 만나, 지금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도 당장 심장이 저들 손에 들어가면 일이 어려워져. 적어도 안전을 도모하고, 시간을 역행해 보겠어.”
“과거의 쿤과……정말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이 장소에 있는 것부터 그걸 증명하지 않겠어?”
“하긴. 그렇군요.”
어떻게, 라는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신성력으로 가득 찬 그리자를 통해 쿤에게 내 의지를 일부 전달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하지 않다. 게다가 의지를 똑바로 받는다 해서 쿤이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물론, 그 고민은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고 해도 충분하다.
“네놈은 언제까지 나를 기만하려 드는가!!! 내 절망과 고통! 피로 흘린 눈물의 대가를 이곳에서 치르게 해 주겠다!!!”
고통에 찬 쿤의 외침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입술을 잘근 씹고는 배낭에 가득 채웠던 화기를 바닥에 풀어놓았다. 전쟁이다. 시간을 벌고 아도란이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 때 까지 틈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만약 시간이 돌아가, 지금의 현실이 거짓이 된다면.
그때 사과를 하겠다.
“라라를 죽인 것은 네놈 아닌가!?”
모진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작가의 말
독설마왕 서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