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11화 (211/240)

카넬은 라라를 유혹했다.

그녀의 힘으로 쿤을 도울 수 있다고. 대마법사의 조력과 사랑하는 이의 위기. 라라는 선택을 했고, 결국 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는 이미 결정된 일일 뿐. 라라는 미궁에서 길을 잃고, 혼란의 하나로 쿤과 마주하게 됐다.

미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내비된 곳.

라라의 등장은 그 싸움의 일환으로 통했다. 쿤의 어떤 능력도 이 혼란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쿤은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싸웠고,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라라를 죽음으로 몰았다. 미궁의 환각으로도 거부 할 수 없는 그녀의 죽음.

쿤은 간절히 기도했다.

싸늘하게 식은 라라의 시체를 손에 쥔 채. 그녀를 살려 달라고. 모든 일을 함께 해 온 신에게 빌었다. 하지만 죽은 이를 되돌리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절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 채 쿤은 울었다.

그리고 부정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가장 필요 할 때 도와주지 못한 신을 부정했다. 가득 차 있던 신성력은 밀려나고, 강대하던 용기는 절망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비어버린 쿤의 마음속으로 유르고의 힘이 파고들었다.

빛의 용사는 타락하고, 어둠이 그 위로 내렸다.

이 모든 것이 아도란을 통해 들은 그간의 진실.

“……그럼 문 밖에 있는 사람이?”

먹먹한 가슴을 쥐어짜며 물었다.

쿤의 절망이 내게 전해져 오는 거 같았다.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던졌을 뿐.

아도란이 낮은 한숨과 함께 답을 해 왔다.

“네. 과거 당신이 주시하던 남자. 쿤입니다. 지금은 이단에 휩싸여 복수만을 위한 존재가 되고 말았죠.”

“복수라니, 누구한테?”

“신을 원망했지만, 그 당시 당신은 최후의 경고만을 남기고 사라진 후였죠. 쿤이 눈을 돌린 건 황제였어요. 자신을 미궁에 가두고 허튼 오해로 사단을 불러왔다 여긴 거죠. 이단을 받아들인 쿤은 지독할 정도로 강했습니다. 일주야의 싸움 끝에 황도는 넝마가 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갔죠.”

“세상에 그럴 수가……”

쿤이다.

지금껏 쭉 함께 해 온 쿤이다. 그런 그가 사람들을 학살하고, 복수에 몸을 맡겼다고? 솔직히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냉정한 성격의 쿤이지만, 내면이 따듯하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라라가 죽었다면……

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라라에게 가지는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도 인지하고 있다. 희망이라 해야 할까. 쿤 자신이 남들과 같은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믿게 한 여자. 그런 대상이 죽었다고 한다면 지독할 정도의 상실감과 분노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이단이 침투한다면……

나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미소나 서율이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을 해 보자. 과연 제정신을 유지 할 수 있을까? 어렵다. 미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

“그렇기에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타락해 버린 그의 마음을 돌려 줄 수 있습니까?

아도란이 또렷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미래의 내가 경고를 남긴 바. 내게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말리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거니까.

“그의 마음을 돌리는 건 무리야. 나는 신이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과거의 쿤과 연결하는 건 가능해.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겠지.”

“과거를 바꾼다 이 말입니까?”

“이미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지.”

쿤으로 과거를 바꾸어, 아노스의 세계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끔 했었다.

이번에도 가능할지 모른다. 필요 한 건 쿤이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과, 카넬을 사전에 처리하는 일. 그리고 만약을 위해 이 장소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를 파악하는 것이다.

“황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차남혁을 비롯한 이단의 무리가 노리고 있다.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미리 파악하고 대비시킨다면 쿤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무덤이라. 그건 제가 허락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군요.”

“네가 이곳의 최고 책임자 아니었나?”

“아닙니다. 최후의 문을 이끌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은 제가 맞지만, 책임자는 따로 있죠. 제가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만나면……”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15살 정도? 굉장히 어려보이는 소년이었다. 몸보다 큰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는 큼지막한 왕관도 쓰고 있었다.

“누구지?”

“어허! 말을 조심해라. 폐하께 무슨 망발인 것이냐!?”

“폐하?”

눈을 깜빡이며 소년을 다시금 바라봤다.

큰 망토와 왕관. 확실히 보통 사람에게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도 고관대작의 자제. 하지만 황제라니. 그건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인사하세요. 데마시안 올그라프 7세.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간 제국의 황제입니다.”

유일한. 그 말이 가슴을 찔러왔다.

#

쿤이 이단에 침식당하고 난 뒤, 신의 가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성물도, 신성력으로 재배되던 작물도. 모든 것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하카림은 다시 이단에 타락하고, 숲의 여왕은 숲을 포기하고 말았다. 도처에서 이단에 잠식된 이들이 일어나 전쟁을 벌이고, 살육과 광기만이 그 위를 덮었다.

10년. 남아있던 인간들이 대부분 죽고, 타락한 자들만이 남은 것에는 그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제국의 황가만이 아도란과 몇 몇 조력자의 도움 하에 겨우 형태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지하 깊숙한 곳, 토굴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군. 어째서 제국이지? 공화국은 그냥 버린 건가?”

“루루 양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국에 있었으니까요.”

“세이혼은? 가족이 공화국에 남아 있으니, 그냥 있었을 거 같지는 않은데.”

“……그는, 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숨이 턱하니 막혔다.

제국 황제라고 찾아온 꼬마보다도 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쿤이 세이혼을 죽이다니. 분노에 사로잡힌 그의 눈에는 등을 맞댄 전우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건가.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건 폐하께서 말 해 주시겠죠.”

“괜찮은 건가, 아도란? 그대의 예언대로 방문자가 찾아 온 건 맞지만, 나는 쉽게 믿음이 안 간다.”

“괜찮습니다, 폐하. 이 폐허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라면 그들뿐이니까요. 부디, 숨김없이 모든 것을 토로해 주세요.”

진중한 아도란이 어색하다.

아니, 그뿐이겠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어색하다. 라라의 죽음도 쿤의 타락도. 이야기로는 들었지만 솔직히 실감은 안 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눈으로 보던 이들인데.

“흠. 좋다. 아도란이 그렇게 말 하니, 믿고 모든 걸 털어놓겠다.”

그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황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가의 무덤. 가장 깊은 곳에 황가의 심장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는 태고의 정령이 잠들어 있는 장소. 세상의 시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으며, 황가의 주인들과 계약을 하여 힘을 보태주고 있지.”

“태고의 정령?”

“정령의 시작과 끝인 존재다. 유르고의 힘을 경계한 태고의 정령이 세상의 정령들을 불러 모아 봉인을 하고 있었지.”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말이군.

결국 유르고의 존재를 알고,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숨어버린 것이다.

“황가의 주인이 되는 자는 태고의 정령과 계약을 맞아 비상한 두뇌와 강철과 같은 육체. 무너지지 않은 마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이 힘의 영향으로 모두 빼어난 자질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되지.”

“정령사의 자질도 그렇게 이어지는 거였나?”

“그것도 알고 있군. 맞다. 혈통으로 전파되는 힘이지.”

“그래서, 그 황가의 보석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거지?”

독특하지만, 이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제국 정도 되면 그 정도 배경 스토리가 있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중요한 건 그 사실이 차남혁등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다. 단지 그런 보석을 노리고자 그들이 왔다?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유르고의 심장을 황가의 보석에 봉인하고 있다.”

“……뭐?”

“유르고가 세 갈래로 쪼개져서 떨어졌음은 알고 있겠지?”

“그건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유르고의 심장이라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럴 수밖에. 그 내용은 별의 탑지기들이 꼭꼭 숨겨온 거니까.”

“별의 탑지기?”

별의 탑. 들어 본 적이 있다.

분명 고신이 잠들기 전 내게 찾아보라고 한 장소다.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알고 있는 곳이라 했던가? 이번 일과 관련이 있나?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의 비밀들을 기록해 온 집단이다. 유르고에 대한 기록도 그곳에 남아 있었지. 세상의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꽁꽁 숨겨 두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황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말인즉슨, 별의 탑지기들은 이런 일을 모두 예상했다는 건가?

“그들이 왜 유르고의 심장에 대한 걸 숨긴 거지? 아무리 비밀을 숭배하는 자들이라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면 이해 못 할 행동인데.”

“그럴 수밖에. 그들이 유르고를 이 세상으로 불러온 자들이니까.”

“……뭐?”

놀람의 연속이다.

유르고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다. 마지막 남은 탑지기가 후회를 담아 말을 전해, 그나마 이 정도도 알게 된 거니까.”

“하……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그들이 유르고를 소환? 그렇게 말 하면 되나? 그렇게 소환을 한 뒤에 치부가 들킬 것을 두려워 해, 심장을 숨겨두었다는 건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유르고가 이 세상 너머. 다른 차원과의 간섭을 가능하게 해 줄 도구라 여기고 지금껏 이용하고 있었지.”

“이용? 유르고를?”

“그래. 세 조각으로 갈린 유르고의 파편 중 남은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하여 멸망하고 말았지만.”

셋 중 남은 하나의 행방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 유르고를 소환했다면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걸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고?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군. 나도 그랬다. 하지만 지식 탐구에 탐닉한 광신자들의 사고는 일반인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들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파해치고, 차원 너머. 다른 세상의 것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르고를 소환했다? 하. 단단히 미쳤군.”

차원의 경계.

어차피 그건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이미 차원의 경계에서 장사를 하는 벨도 만나보지 않았던가? 그 너머의 지식을 탐구한다는 행동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정도가 질리는 부분이었다.

무언가를 탐구하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뒤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순수한 의도인가. 정도를 넘지 않는가. 그것에 탐닉하여 선을 넘어버리면 결국 재앙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노스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도 그런 꼴을 몇 번 보지 않았던가.

무조건적인 집착과 탐구만이 좋은 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기록은 딱히 남아있지 않지만, 황가의 윗대에서 우연하게 유르고의 심장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당시 이를 발견한 이는 이 심장이 매우 위험한 거라는 걸 바로 파악 했다고 하지. 그래서 계약을 한 태고의 정령에게 부탁을 했다.”

“이미 한 차례 데인 존재에게 말인가?”

“뭐, 결과적으로 그렇지. 하지만 재미있는 것이 심장은 다른 유르고의 부분과는 다르게 힘이 강하지 않았어.”

“보호하던 껍질이 벗겨졌으니, 심장은 약하다 이거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태고의 정령으로 심장을 봉인했다는 말. 어쩌면 이 부분에서 지금까지 이단이 취한 행동의 방향성을 이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단은 탐욕을 증폭하지만 그 행동 방침은 오로지 그 대상자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 마치 의지가 없는 바이러스처럼. 퍼뜨리고 오염만 시킬 뿐, 그 자체의 목적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심장의 부재.

말하자면 머리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차남혁을 비롯한 인간들이 이를 찾고자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도 이리 강력한 이단인데, 심장까지 찾게 되면 얼마나 대단할까.

“……아니, 잠깐만.”

뭔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턱밑을 긁으며 생각을 했다. 차남혁은 대체 어디에서 이 정보를 얻은 거지? 아노스에 내통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 역시 유르고의 사고와는 개별적인 존재. 어째서 심장을 노리는 거지? 그런 명령을 내려야 하는 주체는 여전히 봉인이 되어 있는데.

“혹시 별의 탑지기 중 이단에 타락한 존재가 있나? 아직까지 살아있는?”

“그건 아니다. 당시, 탑지기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짠 하카림에 의해서 모조리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자 역시 우리에게 비밀을 토로하고 재가 되었지.”

“음. 그렇다면, 황가의 비밀을 아는 자 중 타락하게 된 인물은? 아! 대마법사 카넬도 이런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나?”

“아니, 그렇지 않다. 카넬이 비록 제국의 대마법사이기는 했으나, 비밀은 황가에서만 전해지는 것. 그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만약 상대의 목적이 정말로 유르고의 심장이라면 확실하게 모든 사정을 알면서 차남혁 등도 부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체 누구 있어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단 말일까? 탑지기들도 모두 죽고, 카넬도 비밀을 모른다고 하면.

콰아아앙—!!!!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지반에 통째로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벽에 걸어둔 장식품이 흘러내렸다. 진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서율이의 어깨를 잡은 채 몸을 낮춰 이를 견뎌야 했다.

“무, 무슨 일이냐!?”

황제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외쳤다.

당차게 말하는 듯싶었지만,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그를 보조하여 왔던 이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아도란이 앞으로 나섰다.

녹색 물결이 퍼졌다.

마법. 잠시 공간 위를 맴돌던 녹색 빛은 이내, 아도란의 손끝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대리자시여. 이것은 당신들이 가진 병기인 겁니까?”

텅 비어 있던 공간 위로 일렁임이 생기더니, 브라운관처럼 낯선 곳의 영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부러진 나무와 꺾인 수풀. 주변으로 모여든 변이체.

그리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동체를 자랑하고 선 존재.

“탱크!?”

포신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작가의 말

탱크 등장!

* 쿤 최종보스 설. 과연 사실이 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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