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10화 (210/240)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요락의 진언을 사용했다.

토토의 울음소리가 흐려지고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기다렸음. 둘. 나를 따라와.]

[따라오라고? 우리가 올 줄 알았다는 건가?]

[아도란이 시켰음. 이쪽. 망설이면 못 들어와.]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토토는 이미 꼬리를 살랑거리며 앞서가고 있었다.

의문은 잠시 접어두자. 서율이의 손을 잡고 그 뒤를 쫓았다.

토토는 문 옆으로 늘어선 기둥 중 하나에 서더니 꼬리로 그 겉면을 훑었다. 그러자 희미한 불빛과 함께 기둥 아래쪽으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늪을 통과 할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한 마법이었다.

[이쪽. 이쪽]

쫓아가도 될까라는 일말의 걱정은 있었지만,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토토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계단에 들어서자 뒤쪽 입구는 금세 사라졌다. 어둡고 가파른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삼촌, 손전등.”

어둠을 밀어내며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높이로 치자면 대충 10여 미터? 이미 문이 있던 통로가 지하임을 고려해 보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 속의 지하라. 어쩌면 적의 상식을 찌르는 이중 트릭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그때, 토토가 꼬리를 팍 세우고는 외쳤다.

계단이 끝나고 넓은 공터가 등장했는데, 그 끝자락에 누군가 있었다. 동그란 눈에 귀여운 인상. 그리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여왕!?”

“오셨군요. 신의 사자여.”

숲의 여왕.

어린아이 모습을 한 채, 나를 반기고 있었다. 대체 뭔가. 그녀가 살아있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나를 보고 하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 신의 사자? 나와 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건가?

“정말로 왔군. 아도란의 예언이 맞았다는 말인가.”

“……음?”

옆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이 다가왔다.

이 여성은 처음 본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익숙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왜 익숙하게 느끼고 있을까?

“하카림의 딸인 로리안입니다.”

“하, 하카림의 딸!? 그럼 이 여성분도 드래곤이라는?”

“역시 알아보는군. 정말로 네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를 보던 신의 사자인가?”

“그의 눈?”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하도록 하죠. 이쪽으로.”

여왕이 끼어들었다.

묻고 싶은 게 말았지만, 로리안도 고개를 돌린 터라 그럴 수 없었다. 서율이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여왕의 뒤를 쫓았다.

내부 공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계단 앞쪽으로 조금 벗어나면 인공 수정 아래로 넓은 농경지가 있고, 그 주변으로 길이 뻗어 가호를 이루고 있었다. 시선을 멀리 두고 살펴보니 어디선가 끌어온 물이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음도 확인이 가능했다.

지저세계.

딱 그런 모습이었다.

적어도 이 장소는 임시 대피를 위해 마련해 둔 것이 아니다. 장시간. 어쩌면 멸망의 그 순간까지. 대를 이어가며 살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 분명했다.

“들어가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금색 테두리가 쳐 진 문 앞에 도착했다.

여왕이 손짓을 하고 물러났다. 대체 누가? 의문이 있지만, 그녀를 잡기보다는 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예상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로 다가온다는 사실에서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서린다.

끼익. 손잡이를 돌렸다.

#

희미한 불빛 사이로 훌쩍 선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녹색 로브를 걸치고 창틈에 몸을 기댄 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아도란이다. 당장이라도 빙글빙글 돌면서 내게 다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빙글빙글 도는 대신 천천히 고개만 돌려 나를 봤다. 로브의 어둠으로 가려져 있던 얼굴은 온전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다만, 그 얼굴을 두꺼운 붕대가 칭칭 감고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붕대 아래로 보이는 검은 흉터.

장난이나 멋이 아니다. 붕대로 얼굴을 전부 가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도란임을 알아보면서도 그 이질적인 모습에 가슴이 콱 하고 막혔다.

“이렇게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군요.”

“아……!”

침착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예전처럼 더듬지 않았다.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다. 내가 알던 아도란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좋은 걸까. 모르겠다.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그쪽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신의 사자라 칭하는 것은 불편할 텐데.”

“준경. 서 준경이라 불러.”

“서 준경……그렇군요. 그 이름은 당신에게서 온 거였어요. 신이 가진 독특한 언어일까 싶어서 연구를 한 적도 있는데. 이건 조금 허망하군요.”

아도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나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다.

“그쪽에 계신 분은?”

“아! 서율이라고 불러라.”

“반……가워요. 김 서율이라고 합니다.”

중간에서 통역을 해 주었다.

뭔가 어색하다. 쿤의 기억과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굉장히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내가 알던 아도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일까. 호기심과 걱정이 가슴을 채우고 있어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앉으시죠.”

나무를 깎아 만든 의자.

우리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대자, 아도란이 물을 끓여서는 차를 한 잔 내 왔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익숙한. 오랫동안 즐겨 마시던 차의 냄새다.

“레퓌르 잎을 우린 차……”

“알고 있군요.”

“그럼. 이 차는, 라라가 즐겨 타오던 차였으니까.”

쿤으로 보고 듣고 마시던 것들이 계속해서 내 앞에 등장하고 있다.

이미 멸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세계 안에서. 이걸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솔직히 가늠이 안 됐다. 설마 라라도 살아 있는 걸까?

“혼란스러워 하는군요. 당신께서는 이 모든 일을 알지 못했습니까?”

“내가 이를 어떻게 알겠어? 나는 단지 쿤의 눈으로 이곳을 보았을 뿐인데.”

“그렇군요. 제 가정 중 가장 마지막에 두었던 것이 정답이네요. 당신은 신의 힘을 대리하여 쿤과 연결. 이 세계를 바라보던 존재였어요.”

“……알고 물어보던 것이 아니었나?”

아도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 자체가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신을 대변하는 존재인지 단순한 도구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죠. 그 당시의 모습으로 보아……후자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그야, 당신께 직접 들었으니까요.”

“……뭐?”

내가 담화를 못 쫓아가는 걸까?

아도란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오래전. 아마 당신이 기억하는 순간에서는 미래겠군요. 당신은 쿤의 몸에 현신을 하여 우리에게 몇 가지 경고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신이 아니고 대리자임을 암시하는 말도 했었죠.”

“내가? 내가 너에게 말을 했다고?”

“시간이 뒤집힐 수 있다면, 과거의 내가 너희를 다시 찾아 올 거다. 부디 지금의 이 일을 막아다오. 그가. 아니, 당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럴 때는 봉인된 특기들이 아쉬웠다.

차를 한 입 털어 넣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도란의 말인즉슨, 미래의 내가 어느 시점에서 쿤을 통해서 현신. 아노스 기준으로 과거의 아도란에게 일어난 일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마치 SF공상영화와 같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 당시의 내가 미래의 나라면 이미 지금의 일을 경험하고 갔을 거잖아.”

“아뇨. 그가 말하기를, 멸망을 막을 수 없으니 시간에 흠집을 내어 기회를 만든다고 했어요. 신들 중 하나. 엘본의 힘을 빌려, 그 경전에 흔적을 새긴다고.”

“엘본……!”

엘본이라면 죠엘이 모시는 신이다.

그리고 그녀의 성물이 바로 경전이다. 아노스의 역사를 기록하는 물건.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무언가 신호를 남기고자 한다면 이것이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인연이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쿤이 죽는다는 말도 결국 미래의 삼촌이 남겼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래야 내가 이곳에 개입 할 거라 예상한 거겠지. 절대로 쿤을 죽게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

“아……근데 그럼 본래의 삼촌. 미래의 삼촌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지금의 꼴을 보건데 무언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거 같다. 쿤과 연결된 나도 이 상황에서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 이곳 사람들이 현신한 나를 봤다면 그 결과도 알지 않을까?

아도란을 보며 다시 물었다.

“부정되었습니다.”

“……음? 무슨 의미지?”

“당신이 현신한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함. 하지만 아쉽게도 당신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습니다. 절망한 쿤은 당신을 부정했고, 당신의 힘과 존재는 그 순간 이 세계에서 사라졌습니다.”

“쿤이 나를 부정했다고? 어째서? 내 힘이 완벽하지 않음은 쿤도 알 텐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그의 절망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설마 내가 살리지 못했다는 사람이?”

아도란이 고개를 들었다.

붕대로 너머의 눈빛은 어떠할까.

왜인지 상상이 되는 거 같다.

“라라 양이었습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라라의 죽음. 그렇다면 쿤의 절망을 이해 할 수 있다. 표현은 많지 않았지만 쿤은 라라를 매우 깊게 마음에 두고 있다. 나를 만난 것만큼 라라와의 만남을 운명같이 여기고 있으니까. 바닥을 구르며 떠돌이로 죽어 갔을 자신이 처음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는다면 그 어떤 일보다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쿤은 강하다. 게다가 신중하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라라를 보호하려고 했을 터. 그녀가 덜컥 죽는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아도란밖에 없다.

그가 고개를 한 차례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살짝 갈라진 음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그 역시 그날의 일을 후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쿤이 제국 수도에 도착했을 때 벌어졌습니다.”

“사절단 말이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가장 큰 발단은 아마도 편지라고 해야겠죠.”

“편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오래전, 쿤이 제국 반란군에게 전한 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 설마 그걸 황제가 트집 잡았다고?”

“당시 쿤이 전달한 편지는 반란군의 주요 계획이 들어있던 것. 그 내용 중에는 라라 양과 루루 양을 납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엮였던 주요 인원을 잡아내면서 밝혀낸 내용이죠.”

“그런데? 어차피 쿤이 둘을 구했다면 문제가 없잖아.”

“아뇨. 당시 쿤이 건넸던 편지는 백지였습니다.”

“……뭐?”

백지라니? 쿤은 분명 약속했던 장소에서 편지를 건넸다.

그리고 그게 반란도에 엮인 일임을 알고 죽어라 도망갔지. 그 과정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 함께 지켜본 나는 알 수 있다.

그런데 편지가 백지라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백지를 건네고 왜 반란도의 무리로 엮여서 쫓기게 된단 말인가?

“내막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알려지고 난 뒤 쿤의 행적이 의심을 샀습니다. 납치 내용을 알고 고의로 두 황녀를 빼돌린 것이 아닌가 하고요.”

“말 도 안 되는! 일개 용병이 어떻게 그런 작당을 한다고!”

“융과 손을 잡고 계획을 했다면 가능하다……이것이 내부에서 나온 목소리였습니다.”

“융……!”

“죄인으로 끌려온 융이지만 그것마저 계획된 일이라 말이 나왔죠.”

“목적은? 쿤이 그럴 이유가 있나?”

“황가의 심장을 노린 거라 얘기했습니다.”

황가의 심장?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황가의 무덤과 관련이 있는 걸까?

“황가의 심장은 제국 뿌리와 같은 겁니다. 황가 혈통이나 제국을 이어 갈 인물에 한해서만 개방이 되는 곳이죠. 일반적으로 들어 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 계획을 짰다? 그래서 쿤이 역도로 몰리고 사단이 난 건가?”

“네. 재판에 회부되고 증인들이 소집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쿤은 공화국의 통령 대리. 타국의 대표를 그렇게 처리하면 큰 문제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국이 강대국이라 해도 말이죠.”

“그래서?”

“황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오는 방법이죠. 고대 미궁에 들어가 살아 돌아온다면 죄가 없음을 증명한다. 주먹구구식에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어진 방법이나 명분을 찾아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제격이었죠. 사실, 미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미궁이라.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쿤이라면 분명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 어디에도 라라의 죽음은 들어있지 않다. 아도란을 바라봤다. 그가 내 시선의 의미를 읽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쿤이 라라 양을 사랑한 만큼. 라라 양도 쿤을 사랑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미궁에 쿤을 보내고 난 뒤, 라라 양은 고심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 한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누구지……?”

“카넬.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라라 양에게 어릴 적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한 인물이죠. 그리고……”

아도란의 고개가 숙여졌다.

“최후의 문. 그 배신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말은?”

“네. 카넬은 이단에 의해서 타락한 존재였습니다.”

이제야 이야기가 납득할 수 있게 흐르고 있다.

※작가의 말

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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