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09화 (209/240)

늪의 질척이는 질감과 몸을 휘감는 불쾌한 오물들.

대충 이런 것들이 다음으로 예상되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험머가 늪에 충돌하는 순간 무언가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고 주변 환경이 일순간 바뀌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동굴.

“……지금 기절해서 꿈꾸는 중인가요?”

“그건 아닌 거 같다. 차는 어때?”

“차는……응? 시동이 안 걸리네요?”

서율이가 몇 번 반복해서 시동을 걸어보려 했지만 먹통이었다.

거칠게 운전한 탓에 내부가 고장이 났든, 무언가의 힘이 방해를 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잠시 상태를 살피다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걸어서 이동하자. 짐 챙겨.”

“무기들도 챙겨요?”

“군사훈련 받았지? 쏠 수 있겠어?”

“……딱히 재능은 없었어요.”

냉큼 총을 뺏어서 안전장치를 점검했다.

전쟁에서 아군의 오발로 죽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하는 사람 손에 머리통이 날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한의 주머니를 쓸 수 없는 지금, 필요한 것들만 추려야 했다.

가볍고 탄이 넉넉하게 들어가는 K사의 자동소총. 섬광탄 2개와 수류탄 12개 들이 띠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탄창으로 충분히 담아 두었다.

“안 무거워요?”

“능력은 봉인됐지만, 힘 같은 건 그대로야. 신체 변형과는 완전히 반대 방식이네. 뭐, 둘 다 의식의 검은 다룰 수 있으니 위기에는 쓸 수 있지만.”

“위험 할 때는 삼촌 뒤로 피해야겠네요.”

“그런고로 뒤에서 따라 와.”

서율이를 뒤로 세우고 앞장서 걸었다.

손에 손전등을 들고, 소총 아래를 받쳤다. 조금 불편했지만 어차피 소총은 한 손으로도 쏠 수 있으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동굴은 습기가 많고, 전체적으로 미끌미끌했다.

벽에 잔뜩 낀 이끼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 환경을 대변했다. 동굴 주변이 습도가 높거나, 아니면 이 안쪽으로 물기를 품은 장소가 포함되어 있을 거 같았다.

걸을 때 마다 통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동굴은 꽤 길고 넓었다. 사람 열댓 명 정도는 나란히 걸어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너비가 넉넉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규모일까? 아무래도 그건 힘들어 보였다.

“삼촌, 여기가 황릉일까요?”

“글쎄. 황제의 무덤이라 하기에는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하지만 누군가 이곳을 인공적으로 만든 건 맞아 보여. 의문이라면 이유겠지.”

“이 정도 규모를 사람이 만든다면 보통 노동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게다가 아까 그 늪은……마법 같은 건가요?”

“아마도.”

아도란이 떠올랐다.

아르톤의 말에 의하면 황가 인근에 남아서 악마를 도와주었던 것이 아도란이라 한다. 그 말이 진짜라서 아도란이 살아 있다면 방금 마법 역시 그의 능력일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아르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아무래도 능력이 제한되면서 그와 맺은 계약 역시 약해진 것으로 보였다. 가까이 있다면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어? 삼촌, 저기 봐요.”

서율이의 손가락이 통로 저편으로 닿아 있었다.

울퉁불퉁한 동굴이 끝나고 반듯하게 정리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 부분 경계에서 공사가 중단되고, 부러진 곡괭이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나 두개가 아니었다. 경계를 기점으로 뒤로 쭉. 곡괭이를 비롯해서 어딘가 익숙한 공사 도구들. 급히 두고 도망가야만 했는지 정신없이 늘어서 있었다.

“……설마.”

“눈에 익은 게 있나요?”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이 도구들. 쿤의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이건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이야. 하카림의 동굴을 정비 할 때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어. 날의 곡률이나 손잡이의 문양. 같은 게 또 있으리라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몇 번이나 보았던가.

잊을 수 없다. 이건 분명 하카람의 동굴에서 나를 돕던 드워프들의 물건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이곳까지? 공화국과 제국 수도의 거리는 절대 가깝지 않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이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어째서 자신의 목숨과 같은 도구를 내팽개치며 도망가야 했는가?

알아야 할 것이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

안으로 들어갈수록 내부는 정교하고, 단단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심미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기둥과 주변 구조물의 결합 상태. 바닥과의 거리 등. 굉장히 내구성을 고려하여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로를 건축한 이유가 편의성을 유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의도……이것이 읽혔다.

“역시 이단을 피해서 이곳까지 도망을 왔다. 이게 가장 타당한 가정이겠죠?”

“아마도. 침입 전에 통로를 구축하여 외부와의 숨통을 만들려고 한 거겠지. 습격을 당해, 공사는 중단되고 나머지는 모두 안으로 피신 한 거 같지만.”

“혹시 안으로 가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글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겠지.”

그 대상이 아도란을 비롯한 우군이라 한다면 이를 처리하기 위한 적군도 존재할 것이다.

이미 바톤이 게이트를 넘어온 것으로 상황을 조작하는 상대가 있음은 견지하고 있다. 그 대상이 과연 어디까지 진출해 있는지가 중요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걸었다.

정비된 통로는 앞선 동굴보다 넓고 길었다. 중간중간 빛을 발하는 돌이 박혀있어 더 이상 손전등은 필요 없었다. 드워프들은 저것들을 ‘발광석’이라 불렀다. 지하에서 일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며 좋아 했었지.

그렇게 웃던 드워프들은 다 어디 있을까.

— 키르르르

그 순간.

익숙한. 그리고 듣기 싫었던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즉시 손짓을 해 서율이를 뒤로 물리고 몸을 낮췄다. 벽에 박힌 발광석의 빛 너머로 희미한 인영이 하나 보였다.

“변이체……”

입맛이 쓰다.

저들이 이곳까지 들어와 있다는 것은 내부 침입을 받아 일하던 이들이 도망갔다는 가정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니까. 다만, 늪으로는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우리 뒤로 적들이 쫓아오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늪은 아군을 들이기 위한 비상구 같은 개념. 변이체들은 다른 곳을 통해 들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셋. 아니, 전부 넷이다.

마치 동면에 든 흡혈귀들마냥 변이체들은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숫자는 전부 넷. 건너편 통로를 살폈음에도 더 이상 보이는 건 없었다. 총과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손에 탄소강 단검을 들었다. 여기는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밖에서야 몰려드는 적이 워낙 많아 냅다 화력을 퍼부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발을 가볍게 떼어 적에게 접근을 했다.

눅눅한 바닥에서 발이 떨어질 때 마다 껌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더 가벼운 움직임이 필요하지만 능력이 봉인된 터라 힘들었다. ‘특기의 도움이 컸구나.’ 이런 상황에서 예전 능력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특기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어 항시 능력을 발휘하던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힘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크르르르

숨소리에 걸음을 세웠다.

거리는 기둥 하나. 몸을 돌리면 바로 변이체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숨을 고르고 적의 위치를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집중 사고나 냉정한 사고의 도움은 없다. 여기서 판단하고 사고해야 하는 건 온전히 내 능력이다.

“후—”

숨을 뱉고 몸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머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단검으로 목을 꿰뚫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옅은 소리. 재빨리 찔러 넣은 단검을 횡으로 긋고 떨리는 몸을 눌러서 잠재웠다. 더 이상 소란은 없었다.

하나.

곧바로 발을 끌며 옆으로 이동했다.

다른 변이체가 등을 기둥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입을 막을 것도 없이 그대로 목을 찔렀다. 덜컥. 하고 몸이 흔들렸지만 됐다. 발로 하복부를 밟은 채 목을 옆으로 그었다. 잘린 머리통이 데구르 굴렀지만 발끝으로 잡아 세운 채 몸 위로 떨궜다.

— 크르르?

기척에 하나가 깼다.

단검을 손에서 돌린 뒤 그대로 던졌다. 이마에 푹 박히고, 소리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러지는 소리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풀썩. 먼지가 피어오르고 구석에서 자던 마지막 놈이 눈을 떴다.

— 벤다!

아쉽지만 여기서 까지 아낄 수는 없다.

의식을 집중해 손끝으로 제어했다. 하얀 포망이 실선처럼 그려지더니 그대로 적의 몸통을 양단했다. 놀란 눈과 꿈틀거리는 목. 하나의 움직임이 완성되기도 전에 양단된 몸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됐다. 나와도 돼.”

이제 초입일 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적이 남아 있을까.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통로가 동일한 규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두 시간 가량을 꼬박 걸었을 무렵이었다. 그 와중에 변이체를 몇 번이나 더 만났다. 의식의 검과 단검으로 소리 없이 처리하기는 했으나, 안으로 갈수록 숫자가 늘어 그것도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었다.

“문.”

“그리고 많은 변이체네요.”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건 거대한 문이었다.

높이로 보면 족히 10미터는 될 거 같았다. 두께는 여기서 알 수 없었지만 규모를 보건대 미터 단위이지 않을까? 거인이라도 살 법 한 규모였다.

그리고 그 앞에 잔뜩 늘어서 있는 것은 변이체.

지금까지 보던 두셋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얼추 셈을 해 봐도 백 단위 이상이 모여 있었다.

“삼촌, 어떻게 해요? 아무리 봐도 저 안쪽이 황릉 같은데.”

“돌파한다고 해도 들어갈 방법이 안 보이는군.”

“안쪽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만 있다면 같은 편이라 설득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

거대한 문과 도열한 변이체.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아군이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의식의 검으로 말을 퍼뜨릴 수는 있지만 상대가 믿어 준다는 보증도 없고.

이래저래 막막한 상황이었다.

— 문을 열어라!!

그 순간. 귀를 찢어버릴 듯 한 굉음이 들렸다.

목소리.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고 흉악했다. 지저에서 용암이 끓어올라 숨을 토해내면 이러할까. 듣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거 같았다.

몸을 떠는 서율이의 손을 잡고 다독여야 했다.

— 네놈의 사지를 찢고 뼈를 씹어 먹겠다. 그 뒤에 숨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이체의 앞. 누더기를 덮고 있는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산발이고 누더기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변이체들을 통솔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남은 수백의 변이체들이 그가 말 할 때면 고개를 숙이고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누굴까요?”

“글쎄. 이단 중에 수좌를 칭할 수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건 알고 있지만……”

예전 오리쥬가 그러했다.

이 남자도 그런 경우인가? 특별한 자가 이단에 타락하여 무리를 이끌게 된? 하지만 지금 당장은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지저의 악마가 되어서라도 네놈들의 뼈를 씹어 먹고 말 테니까! 최후의 문이 너희를 보호 할 수 있다 생각하지 마라!!!

최후의 문?

남자의 목소리에 익숙한 단어가 섞여 있다. 그건 아도란과 프리실리가 포함된 조직의 이름. 그냥 우연히 같은 것일까? 아니, 아도란이 이곳에 있다는 가정 하에 우연이라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역시 저 문이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 일 터.

키이?

그래, 저걸 돌파할 키를 찾기가 더욱 요원하다는 말이다.

변이체를 이끄는 남자도 찾지 못한 걸 내가 찾는다고 장담 할 수도 없으……응?

“키이?”

루비를 박아 넣은 듯 한 눈에 쥐를 닮은 외관.

굉장히 익숙한 생명체가 발치에 와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순간 내가 잘못 본 가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니었다.

“토토?”

“키이~”

하카림이 자신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공 생명체.

드워프들과 마찬가지로 하카림의 동굴에 남아 있어야 할 그 존재가 지금 내 발치에 와 있다.

“와, 와! 귀여워!”

서율이의 손에 고개를 부비면서.

※작가의 말

짧아서 죄송합니다.

파트를 정리하면서 조금 축약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음 편은 더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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