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흐릿하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손을 휘저어 봤다. 밀리는 건 없다. 내 손 역시 흐릿한 형태로 허우적거릴 뿐. 시야가 이상해 진 걸까? 의문으로 눈을 더듬으려는 순간.
“삼촌.”
“아……!”
흐릿하던 세상이 또렷해지고, 서율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날렵해 보이는 경장에 머리를 틀어 올려 마치 고궁의 아낙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외모는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채로.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들어온 건가?”
“네. 삼촌도 같이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이네요.”
내가 들어와 있는 곳은 바로 아노스.
그것도 쿤이 있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아노스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인 건 쿤이 아닌 나 자신. 서율이와 마찬가지로 개척자의 형태를 취해 발을 들인 것이다.
“모습은 어때? 무언가 모습을 선택한 기억은 없는데.”
“밖에서 있던 모습과 같아요.”
“내 모습 자체가 투영된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움직여 봤다.
손과 발. 말단의 관절까지. 딱히 거부감이 있는 곳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상태창이 안 나온다. 스킬도, 특기도 모조리 사용이 불가능하군.”
의식의 검도 그러한가 싶어 정신을 집중해 보니 희미하게나마 불러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본래 육신에서 하던 것과는 차이가 심했다. 마치 ‘신’에 의한 가호가 전부 벗겨진 거 같다. 지금 이곳에서 서 있는 나는 서 준경이라는 인간 그 자체.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서 있게 된 것이다.
……긴장되는군.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입술이 말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율이가 안 보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부릅떴다. 어차피 넘어서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바. 이 정도에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그럼 일단 주변 정찰부터 시작해 보자고.”
“네.”
주둔지에 비치된 장비들도 좀 챙겨가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뒤, 걸음을 떼었다.
#
사방 100미터 정도 되는 공간은 주둔지라는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잘 구비되어 있었다. 전자 펜스와 간이식 숙소. 긴 트레일러와 주변을 경계하게끔 만들어진 무기들이 구석구석에서 보였다.
“이쪽이군.”
그 가운데로 보이는 오점이라고는 바톤들이 돌진했던 흔적뿐이다.
펜스의 일부가 무너져 있고, 그 부근으로 바톤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널려있었다. 흔적을 되짚어 헤아려 보니, 내가 쫓아낸 놈들은 왔던 길 그대로를 돌아서 간 거 같다.
“봉인지가 수도 근처라고 했죠?”
“쿤이 죽게 되는 건 제국 수도에 도착한 이후. 차남혁이 찾던 건 황릉. 역시 수도로 가는 것이 최선일 거 같다.”
“시간이 괜찮을까요? 접속 시간을 최대한 늘려도 하루를 넘기가 어려 울 텐데.”
“하루라. 어떻게든 해 봐야지.”
주둔지 내부를 살펴, 탄탄해 보이는 개조 험머를 찾을 수 있었다.
험지로 예상되는 곳을 가려면 이렇게 튼튼한 차가 최고다. 만약을 대비해 수류탄을 비롯한 화기를 넉넉하게 챙겨 집어넣은 뒤 시동을 걸었다.
구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야, 타.”
“……설마.”
“미안하다, 아저씨 개그였다.”
왕년에 유행하던 말 한번 던졌다가 눈총을 샀다.
그럭저럭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서율이가 샐쭉 웃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몸이 딱 붙는 옷이라 그런지 도도하게 앉은 그녀가 조금 요염해 보였다.
……정신 차리자 준경아.
시선을 돌리고는 바로 험머를 출발시켰다.
#
개척자들이 닦아 둔 길이 끝나고 수풀이 우거진 지역이 나왔다.
이단이 횡횡해도 자연에는 영향이 없는지 수풀은 우거지고 나무는 하늘 끝에 닿을 듯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중간 중간, 번쩍이는 금덩이와 다이아몬드. 각종 보석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걸 직접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말 그대로 길에 뿌려진 보물이다. 개척자들이 바닥에서 금 등을 긁어온다 할 때도 그 정도로 채굴량이 많구나 싶었지 이렇게 널브러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음? 잠깐만.”
그렇게 길에 널린 보석을 감상하며 가는 도중에 내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바닥에 내려 흙을 손으로 헤집었다. 희미하지만 차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앞서 다른 개척자들이 이동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맞게 가는 거 같죠?”
“아마도. 이대로 쭉 달린 다음에 상황을 살피……”
무언가 거슬리는 감각.
평상시 느끼던 초감각의 정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무언가 적대적인 것이 주변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다시 차에 탔다.
“운전 할 수 있지?”
“배우기는 했지만 조금 서툰데……”
“대충 밟아. 나무만 잘 피하고.”
운전대를 서율이한테 넘겨주고 뒷자리로 넘어왔다.
그리고 챙겨 두었던 화기를 손에 쥐었다. 소음기까지 달려있는 T사 모델 라이플이었다. 장탄수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장전을 했다.
가용 가능한 시간은 하루 정도. 힘이 평소보다 많이 약한 상황에서 능력을 남발하는 건 좋지 않다. 최대한 힘을 아끼며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것이 필요했다.
— 키르륵!!
그 순간. 조금 떨어진 수풀 사이로 붉은 눈의 변이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짐승처럼 네 발로 지면을 걷고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각질과 흉흉한 손톱과 발톱. 게다가 수풀 사이로 보이는 안광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밟아.”
구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험머가 다시 수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변이체들도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전신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위기감이 증폭되었다. 겨우 이 정도 무리에 이런 느낌이라니. ‘제한 퀘스트인가.’ 입술을 틀어 올리고는 한 팔을 뒷좌석 창문에 걸쳤다.
그리고 사격.
드르륵! 드르륵!!
소음기를 달았다고는 하지만, 권총도 아니고 라이플의 소리가 완전히 먹힐 수는 없다. 게다가 연발! 꽤나 육중하게 대기를 때렸다. 이 소리에 몰려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어차피 몰려들기 시작한 상황에서 고민은 의미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른 시점에 우리를 찾아 달려드는 걸 보니, 의도적인 행위임을 읽을 수 있다.
“으, 으아아!! 삼촌 꽉 잡아요!!!”
지면이 거칠게 밀리는 소리와 함께 험머가 옆으로 휘청거렸다.
아슬아슬하게 거목 하나가 차 옆으로 스쳐갔다. 조신하게 말 하던 것과는 달리 운전 솜씨가 꽤나 거칠다. 군사 훈련을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의심스럽다.
— 캬르르르르!!!
물론,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탄 떨어진 탄창을 빼고, 바닥에 쌓아 둔 탄창으로 갈아 끼었다. 그리고 곧바로 연사. 드륵. 드륵. 한 번 울릴 때 마다 변이체가 두엇씩 나자빠졌다. 생명체 쏘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그렇지만 손맛이 죽였다.
“서율아 폭발 대비해!!”
그렇게 쏴도 숫자가 줄지 않고 늘어만 간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도 달려드는 변이체들이 보였다. 라이플로 긁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닌 바. 조금 더 과격한 수단을 쓸 필요가 있었다.
팅—!
핀을 뽑고, 그대로 수류탄을 양쪽으로 나눠 던졌다.
훈련소에서 쓰던 그런 수류탄이 아니라 살짝 당황했지만 어차피 핀 뽑고 던지는 방식은 동일했다. 통. 하고 바닥에 한번 구른 수류탄이 잠시의 텀을 두고 동시에 폭발했다.
콰르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이러할까.
양쪽에서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귀가 멍해졌다. 내가 경험했던 수류탄보다 폭발력이 월등하다. 머리를 한 번 휘휘 털고는 창문 너머를 살폈다.
“와우.”
크레이터라 불러도 마땅한 구덩이가 양쪽으로 파여 있었다.
그 위로는 완전히 뭉개진 변이체들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고약한 모습.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써 줄 의리는 없었다.
재차 수류탄을 뽑아서 던졌다.
“삼촌!!! 으아아!!”
“아차차. 서율아 소리 조심!”
폭음과 진동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서율이가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험머가 좌우로 흔들리고 내 몸도 그에 맞춰 쓸려갔다. 창틈으로 나뭇가지가 들어와 우드득 부러지고, 흙더미가 안으로 튀었다. 이것이 오프로드의 매력! 이라고 외치기에는 상황이 너무 거칠었다.
“서율아, 뚜껑 열어!!”
“어, 어떻게요?”
“아래에 버튼!”
아래쪽을 더듬던 서율이가 버튼을 찾아서 눌렀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상부 지붕이 앞뒤로 열렸다. 험머의 사각 프레임에는 고리와 부착되어 사람을 고정 할 수 있게 설비되어 있었다. 즉, 허리에 고리를 걸고 위로 나가서 싸워라. 이렇게 개조 된 형태였다.
그렇다면 써먹어 주는 것이 예의.
“후읍……!”
M 시리즈 미니건을 프레임 위로 올리고는 단단이 거치했다.
아래로 늘어진 탄띠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보통은 이걸 그냥 당겨서 쏘기 힘들 것이다. 반동도 크고 무게가 대단하니까.
하지만 나는. 비록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되었다고 해도 육체적 스펙 자체는 향상된 그대로의 것을 따르고 있다. 이 정도의 반동과 무게는 견딜 수 있다는 얘기.
콰르르르르르르르—!!!
미니건의 총열이 거칠게 회전하면서 불꽃을 뿜어냈다.
분당 4000발 이상을 쏟아내는 미니건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몰려드는 변이체들이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돼서는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푸르를. 취이이……
회전을 끝내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즉시, 부가 배터리를 교체하고 그대로 들어 반대편을 조준했다. 탄띠를 정비하고 예열을 하며 상대를 조준했다. 몰려드는 변이체와의 거리가 꽤나 가까워졌다.
“삼촌!!! 하늘! 하늘!”
그때, 서율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로 날개 달린 변이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었다. 박쥐? 어찌 보면 닮았다. 나도 처음 보는 종들. 현대와 쿤을 통해 내가 겪었던 이들 중에는 분명 없었던 타입이다. 어쩌면 쿤이 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의 긴 시간을 겪으며 그 형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니건으로 공중 사격을 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거치하지 않고 들고 쏘는 것도 힘들었지만 맞출 거라 자신하기 어려웠다. ‘지상전에 공군 투입이라니.’ 혀를 차고는 미니건은 그대로 본래 목표를 향해서 갈겼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달려들던 변이체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캬아아아!!!!
그 사이에 가까워진 박쥐형 변이체.
연기가 솟아오르는 미니건을 뒷 자석으로 던져 놓고는 그대로 몸을 숙였다. 날카로운 발톱이 뒷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박쥐라기보다는 가고일이라 부르자. 인간과 박쥐의 혼혈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달라붙지 마!”
의식의 검을 뽑아 실처럼 휘둘렀다.
가장 근접했던 가고일이 반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꺄아아악!!’ 그 절반이 보닛 위로 떨어진 탓에 서율이가 기겁을 했다. 차가 다시 한 번 출렁. 이러다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날것이라 이거지!?”
발끝으로 바닥에 놓인 띠 하나를 튕겨 올렸다.
수류탄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폭발용이 아닌, 적의 시야를 막기 위한 용도. 바로 섬광탄이었다. 띠에서 네 개를 뽑아 낸 뒤 험머가 가는 방향과 가고일의 위치를 살폈다.
잘못 던져서 서율이 눈이 멀어버리면 득보다 실이 크다.
잘 조준하고 하늘 위로 냅다 던졌다. 타이머 타입이라 누르고 던지면 정확하게 3초 후에 터지는 방식이었다.
퍼퍼펑—!!
새하얀 빛이 하늘에서 터졌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음에도 밀려오는 빛에 뒷목이 다 화끈했다.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위력이 강했다.
— 끼이이이!!!
— 캬아아아아!!
그만큼 효과 역시 탁월했다.
하늘을 날아 나를 노리면 가고일들이 휘청거리다 나무에 처박고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땅을 차고 달려들던 변이체들도 비슷했다. 눈을 가리고 울부짖기 바쁘다. 효과 면에서는 수류탄이나 미니건보다 좋았다.
“하—! 맛이 어떠냐!?”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전쟁 영화에서 가끔 멋지게 한 방 먹인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곤 하지 않던가. 집중해야 할 병사가 왜 저라나 싶었는데, 실제 해 보니 이해가 됐다.
검과 능력으로 싸우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삼촌, 삼촌!!! 앞에!”
그때, 서율이가 다시금 급히 외쳤다.
늪. 수풀 사이로 넓게 펼쳐진 늪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비슷하고 별 다른 경계선이 없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거운 험비가 늪에 들어가면? 그대로 끝이다. 방향을 돌리라고 다급히 외치려 했다.
— 찌릿.
하지만 무언가. 특기나 스킬은 아니지만 내 자신이 가진 감각이 어떤 것을 토로했다. 발굴로 찾은 보물의 빛과 흡사하다 해야 할까? 약초꾼의 후각으로 발견한 약초의 냄새와 닮았다고 해야 할까.
중요한 건 하나.
“그대로 밟아!!”
저 늪에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
언니 달려~!
이번에는 밀리터리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