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다가가며 게이트를 살폈다.
뛰쳐나오는 바톤들은 모두 의식의 검으로 날려버렸다. 신체 변형으로 모든 스텟이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미 농익을 대로 농익은 능력이라 사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 옆에 서거라, 개척하는 자여.”
“네, 삼……아니 이름 없는 자시여.”
서율이가 쭈뼛거리며 옆으로 내려섰다.
연기력이 부족하다. 슬쩍 옆을 바라봐 주니 멋쩍은지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연기학원이라도 하나 끊어줘야 할 거 같다.
“위험합니다!!”
후방에 있는 병사 중 하나가 외쳤다.
게이트를 돌파해 나온 바톤 하나가 펄쩍 뛰어 내게 달려든 것이다.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무작위로 달려가던 바톤들은 주변 적들 중 내가 가장 위협적임을 알아챘는지 집중해서 몰려들었다. 아르톤은 이들을 경비견 정도로 표현했는데, 그보다는 지적 능력이 조금 더 있는 거 같았다.
“멈춰라—”
망령제어에 테이밍 기술을 같이 사용했다.
상대인 바톤이 짐승과 정신체의 중간 정도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시도해 본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혀들었다. 바톤들이 제자리에서 정지하고 고개를 숙였다.
— 키잉. 키잉.
— 크르르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낑낑거리는 대부분의 바톤 사이로 이를 드러내는 놈들이 있었다. 대가 세거나 이단의 기운이 농밀하게 쌓인 거 같다. 무리 사이로 걸어가 손끝으로 이를 잘라냈다. 이단의 기운이 먼지처럼 날리고 탁했던 눈이 풀어졌다.
“확실히 농도가 옅군.”
“농도요?”
“봉인지에 있던 영향인지, 이단에 의해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매우 낮아. 이 정도라면……”
의식의 검에 집중하여 주변에 깔린 축복과 힘을 공명시켰다.
이는 초감각으로 전달되는 감각을 육체로 응대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축복의 기반은 신성력. 이를 의식의 검으로 잡아서 구현화 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치 해변에 뿌려진 모래를 쓸어 담아 물을 촉촉이 묻히고, 조형물을 빚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파앗—!!
짧은 빛이 터지고, 으르렁거리던 바톤들이 갑자기 ‘낑!’하고 울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죄다 고개를 숙이며 발발 기었다. 이단의 힘이 풀리면서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알아보는 법.
바톤들은 상황실에서 내 모습으로 대기 중인 아르톤의 기운을 느끼고 꼬리를 만 것이다.
“자, 개척하는 자여.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대충 몇 웨이브 정도를 그렇게 처리하고 나자 더는 넘어오는 바톤이 없었다.
의미 없음을 파악하고 상대 쪽이 포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 정도 시기면 됐다 싶다. 일부로 근엄하게 목소리를 깔며 서율이를 향해 말했다.
“……어떻게 말인가요?”
“그대는 다른 세계를 거닐 수 있는 존재. 그 힘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막을 수도 있다.”
“제게 길을 알려 주세요. 이름 없는 자여.”
이제야 연기력에 탄력이 받는 모양이다.
간절해 보이는 서율이의 음성에 긴장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자’라 불리는 내 다른 모습은 일종의 신처럼 움직인다. 여기에 도움의 손을 뻗을 수 있는 현실 속 캐릭터가 더해진다면 그 모습은 몇 배나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길 잃은 자들을 본래의 세계로.”
서율이에게 눈짓을 하며 힘을 사역하여, 고개 숙인 바톤들을 다시 게이트 쪽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미 화려하게 열어 둔 축복을 서율이까지 연결하여 화려하게 폭발시켰다. 흰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눈부신 이들이 손으로 앞을 가리며 허둥거릴 때……
게이트를 닫았다.
말 그대로. 게이트의 원동력은 신성력이다. 이 힘이 개척자들의 두드러진 힘과 공명하여 다른 세계의 아바타를 형성하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정신체인 악마들은 이 힘을 바탕으로 영역을 옮기기만 하면 이동이 가능하니 예외로 두어도 좋은 것. 결국 중요한 것은 게이트를 구동하는 신성력이라 볼 수 있다.
의식의 검으로 장판으로 깔아 둔 축복들을 끌어와 마음대로 빚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게이트의 신성력 역시 의식의 검을 사역할 때 동일한 반응이 왔다. 마치 리모컨을 손에 넣은 것과 비슷하다고 말을 해야 할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게이트의 권한은 내가 손에 넣었다.
……조금 버겁다.
게이트를 구동하는 신성력은 상당히 거칠고 난해했다.
바닥에 깐 장판이 개천이었다면 이건 바다. 그것도 풍랑이 치는 바다다. 그만큼 제어가 어렵고, 들어가는 힘도 만만치 않았다. 변형으로 모든 스텟이 제한된 지금의 모습으로는 더더욱 힘이 든다.
아마도 하나 정도가 한계.
그 이상을 제어하는 건 무리였다. 내 힘과 제어력이 더 상승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뭐, 그 정도면 됐지.”
호흡을 정돈하며 사방의 빛을 거두었다.
버둥거리던 바톤들은 모두 게이트를 타고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게이트의 신성력은 내가 제어하여 그 유동을 정지시켰다. 이제는 넘어오고 싶어도 넘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고했다, 길을 개척하는 자여.”
“아, 네……”
가만히 서 있던 서율이가 한 박자 늦게 답을 했다.
물론 그녀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누차 말하듯이 보이는 게 중요한 법이다. 그녀가 내 부름에 따라 게이트에 다가갔고, 그 결과로 악마들이 사라졌다. 이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면 감시기구가 움직이는 것에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접속하면 된다.
“경계하라, 인간들이여. 그대의 탐욕이 몸과 정신을 좀먹고 있으니.”
“으……”
앓는 소리는 그만하고.
나도 오글거려서 손이 안 펴진다고.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의 끝을 불러오는 것도, 시작을 만들어 내는 것도 그대들임을.”
어휴, 대사 치기 힘들어.
좌중을 압박하는 말을 끝으로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나를 쫓아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
소동이 가라앉고 난 뒤, 나는 다시 아르톤과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밀어 두었던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 봉인을 도와준 사람이 아도란이라는 것과, 지금 이 수작질을 벌일 만 한 존재에 대한 질문.
하지만 딱히 소득 있는 답변은 듣지 못했다. 아도란은 인류 최후의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봉인지 인근. 아노스의 기준으로 제국의 황가가 있는 곳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아르톤도 알지 못하고, 다만 그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마계를 봉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움을 청했던 것뿐이라 말을 했다.
이단의 힘을 사용해서 봉인지의 틈을 파고들고, 바톤을 풀어낸 자가 누구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다수 존재들은 이단에 의한 타락이 심해져 본질을 잊고 그저 무너진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의적으로 이런 움직임을 가지고 갈 존재는 떠올리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기껏 왔는데?”
“그쪽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네가 최선이다. 가서 정황을 살펴. 그리고 아도란의 행방도 좀 알아 봐. 쿤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소득 없이 돌아왔다고, 다른 놈들이 쪼아 댈 거 같은데 말이죠.”
“시끄러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너희 악마도 살아 날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군소리 할 시간 있으면 후딱 넘어가기나 해.”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문이나 좀 열어 주시죠?”
게이트에 묶어 두었던 신성력을 풀어 다시 통로를 개방했다.
아르톤이 그 사이로 쏙 빠져 들어갔다. 정신체라는 것은 확실히 이럴 때 장점이 된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다시 신성력을 묶었다.
나와 서율이가 게이트에 접촉하여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한 바탕 소란으로 주 방위군과 온갖 정치인들이 모여든 덕에 시간은 조금 더 필요 할 거 같다.
“흐아. 흐아. 힘들어요……”
서율이가 늘어진 오징어처럼 허우적거리며 들어왔다.
바톤이 침입하고 난 뒤 3일째. 그날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서율이는 주야장천 끌려다녔다. 우리 입장이 있어서 무슨 어두컴컴한 취조실에 들어서는 건 아니었지만, 압박 질문을 반복해서 받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으……거기요. 조금 더 세게.”
해서, 돌아오는 때면 내가 이렇게 안마를 해 주곤 했다.
체력회복을 시켜주는 마법 반지의 효능을 이럴 때 안 쓰면 언제 쓰겠는가. 꾹꾹 눌러 줄 때 마다 욕탕에 들어간 할머니처럼 골골거렸다.
“분위기는 어때?”
“뭐, 이제는 좀 진정되는 분위기에요. 게이트를 봉쇄하고 당장 군 병력으로 주변을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상황을 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역시 내가 등장한 덕분인가?”
“그렇죠. 외계인의 침공에서 이유가 있는 사건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기구 측 사람들도 그렇고, 미국 주 정부에서도 볼튼사가 무언가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어요. 삼촌이 등장해서 흔들어 둔 게 영향을 미쳤죠. 우리가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연관시킬 수만 있다면 사건이 확대되지는 않을 거 같아요.”
서율이가 정확한 부분을 지적했다.
만약 볼튼사를 흔들지 않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장 전 세계에 분포된 게이트들이 봉쇄 조치에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껏 일개 기업이 게이트의 권한을 양도받고 조사를 착수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게이트가 위험하지 않다는 가정 덕이었다. 하지만 변이체의 발견에 이어 이번 사건까지. 이런 것들이 특정한 유발요인 없이 일어났다는 확증이 생긴다면 사람들의 불안을 지울 방법이 없다.
“황릉을 찾고자 게이트를 독점하려고 했으니, 그 부분으로 연결하면 되겠지.”
“황릉을 건드렸더니 괴물이 나왔다?”
“벌집을 건드려서 벌이 튀어나왔다면, 잘못을 지적하려 하겠지, 벌집 자체를 땅에 묻으려고는 안 할 테니까. 다만 걱정인 것은……”
“적대 세력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괜찮을까 하는 것이죠.”
아르톤을 먼저 보내 상황을 살피게 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노스로 향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바톤을 이용해 우리를 공격하려 할 정도라면 확실히 적의를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가 있다는 말. 이번일은 자칫 위험 할 수도 있다. 개척자의 아바타는 피해를 입는다 해도 본체에는 영향을 안 미친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상식. 악마도 등장하는 판에 그 상식을 뒤엎는 적이 없으란 법도 없다.
“괜찮아요.”
그때, 서율이가 내 손을 잡아왔다.
걱정이 얼굴로 드러난 모양이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예전에는 그래도 침착하게 대응 할 수 있었는데, 마음을 확인 한 뒤로는 그게 너무 힘들다. 그녀가 다친다면. 그녀가 잘못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을 거 같다.
내가 스무 살 혈기 넘치는 나이도 아닌데……
우습지만 이런 감정은 쉽게 제어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덜컹—!
진지한 고민은 길게 하면 안 되나 보다.
문이 열리고 소향을 비롯해서 동식이 등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꽤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개인 대면을 하는 서율이만큼이나 보조팀 일원들도 여기저기 끌려 다녀야 했다. 워낙 일이 갑작스러워 명령체계가 엉망이라, 같이 합을 맞출 사람들이 자꾸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향이 큰 걸음으로 와서는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대화가 거칠었던 모양이다. 내가 대신 참석 할 걸 그랬나?
“됐어요.”
“……음?”
“방금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우리가 가장 먼저 게이트에 접촉을 합니다. 볼튼사가 말 한 바에 의하면 전초기지가 구축되어 있으니, 장비 점검을 하고 외곽 순찰만 먼저 해 달라고 하는데 알 게 뭐람. 일단 넘어가서 상황이 어떤지 부터 알아보도록 하죠.”
“주 정부도?”
“본래 접촉하던 개척자들을 고집하기는 했는데, 본래 우리가 가진 목적으로 찍어 눌렀어요. 애초에 이 사태가 볼튼사의 잘못으로 일어났을 수도 있으니까요.”
역시 소향도 맹탕은 아니다.
주 정부 관료와 볼튼사의 인사. 그리고 정부의 감시인원까지 있는데도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냈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한 숨 돌리러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수고했다는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어 주었다.
“서율아, 넌 오늘 푹 쉬어. 내일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접촉을 해야 하니까.”
“네, 언니.”
“후. 준경 씨, 그럼 우리는 자리 세팅 좀 먼저 하러 가보죠.”
“볼튼사 애들이 해 놓은 건 마음에 안 들어요?”
“너저분해서 원.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이 제일 깔끔해요.”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 틈에 서율이 이마에 짧게 입맞춤. 붉어진 얼굴을 톡톡 치고는 나도 몸을 돌렸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거 같다.
#
“……바이탈 수치 양호합니다. 각 파트 점검 완료. 스탠바이에 들어갑니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게이트 앞으로 군인 대신 연구원 복장을 한 사람들과 보조팀 일원. 그리고 내가 끌고 온 경호 로봇과 각 조직 인사들이 대거 자리했다. 물론, 군인들은 뒤로 물러났을 뿐 여전히 엄중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현재 자리에 모인 이들의 면면만 해도 만만치 않은 수준. 확인을 하기 위해 직접 날아온 이들이 꽤 되니, 자칫 일이 틀어지면 누구 하나 목 떨어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뭐,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요. 링크는 언제 걸어요?”
“게이트 오픈하고, 들어가기 직전에.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되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후우. 만약 성공하면 오빠랑 같이 아노스로 떨어지는 건가요?”
“아마도.”
예상은 하지만 직접 해 본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대답이 두루뭉술하다.
서율이의 곁으로 의식만 딸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신성력을 바탕으로 아바타를 만들 수 있을까? 쿤과의 링크가 있기 때문에 솔직히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서율아, 준경 씨. 스탠바이.”
“들어가서 확인해 보자고.”
서율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경호로봇 다섯을 적당히 배치하고, 대기팀 쪽으로 물러났다. 소향은 내가 서율이 곁에서 보조하기를 원했지만, 개인적인 감정 탓에 실수 할지 모른다는 말로 거부해 두었다. 링크로 나 역시 서율이와 함께 끌려간다면 의식을 잃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으니까.
— 카운트 들어갑니다.
모든 결과는 두고 보면 알게 될 터.
[링크]
서율이와 나를 잇는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작가의 말
너와 나의 연결고리~
다음 편은 [멸망 그 후]입니다.
가끔 댓글에 코난 분들이 보여서 무서웡...
* 오늘은 오타 없죠!? 열심히 검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