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05화 (205/240)

“다시 해볼게.”

“후우. 준비 됐어요.”

작은 방 안. 서율이와 내가 마주한 채 앉아있다.

연인이라 서로를 정의한 이후, 이렇게 단 둘이 있을라치면 묘한 긴장감이 생겨났다. 친밀한 관계 그 이상이 되면서 따라오는 부산물이라 해야 할까. 나쁘지 않은 느낌. 하지만 지금은 그 긴장감을 이겨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하는 건 ‘링크’를 이용한 서율이와 나의 공명이다.

링크는 유대가 깊은 상대를 통해 감각을 공유 할 수 있는 능력. 독특하고 유용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쓸모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의식의 공유는 혼의 결집과 유사하다.

긴 실로 서로를 이어 감각과 기억 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수차례 경험해 본 것처럼 의식의 검이나 망령제어와 같은 계통의 능력이다. 연결된 실을 통해서 내 의식을 대상자에게 보낼 수도 있어 보였다.

“으읏……!”

“집중해.”

링크가 발동하고, 서율이의 의식에 내가 접촉되었다.

기억이 온전하게 개방되고, 감각과 마음. 한 인간의 모든 것이 온전하게 열렸다. 이건 솔직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숨기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고, 치부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율이는 이를 받아 들였고, 돕기 위해 적극 나섰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링크라는 능력은 사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율이의 기억과 감정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지난날 느꼈던 죄책감과 현재 가진 감정. 어릴 적 어설펐던 날의 기억이나 실수. 조금은 부끄러운 시간의 정보도 낱낱이 들어왔다. 솔직히 나도 민망하다. 기억이라는 건 실수하거나, 창피했던 일이 가장 뚜렷하게 남지 않던가.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바로 그런 기억이었다.

스무 살에 소변을 참지 못해서……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떨쳐버렸다.

연인의 치부를 살피기 위해 연습을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연결된 링크에 더욱 집중하며 의식의 검을 사용하는 요령을 발휘해 보았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죽은 뒤 나타나는 혼의 파장과 흡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으로 현상에 결부한다. 라는 독특한 정의아래에 구동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은 링크시에도 작동을 한다.

서율이의 의식. 조금 간단하게 말해서 혼에 접촉을 한 뒤 그 반응에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그리자를 꺼냈다. 게이트의 반응은 결국 신성력과 결부되어 그 의식을 아노스에 연결하게 된다. 지금 당장은 게이트를 사용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통해 반응성을 보는 게 최선이었다.

흔들흔들.

혼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개척자라는 건 결국 보통 사람보다 이런 혼의 깨어남이 강한 존재.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반응성이 좋은 사람들이다. 혼의 크기나 밀도 등은 나도 재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적어도 내가 살핀 바에 의하면 그러했다.

“어, 어지러워요.”

“조금만 더 집중해. 내 의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부담을 더 느끼는 거야.”

“아……이 묵직한 게 삼촌의 의식이라는 건가요?”

“묘하지? 서로 이렇게 말 하면서 의식이 링크되어 있다는 게.”

조금은 가벼운 말로 서율이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는 이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던 혼의 결합이 강해지고 그리자를 통해 이끌려 들어갔다. 당장 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게이트가 없기 때문에 실제 액션은 없지만, 이 반응만으로도 가설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서율이의 어깨를 툭 쳐 주고는 링크를 풀었다.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쿤을 통해 이런 일에 익숙해진 나와는 달리 그녀는 꽤 피로가 심했다. 예전에 구비해 둔 반지를 양 손에 끼고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적어도 피로 정도는 풀 수 있을 것이다.

“으으……거기요. 아, 시원해라.”

“날짜 전까지 꾸준히 연습을 하면 좀 쉬워 질 거야. 지금은 평소보다 많은 짐을 짊어 진 거라 어렵다고 느끼는 거뿐이지. 그 감각의 차이만 익숙해지면 무리는 없을 거야.”

“삼촌을 업고 데이트 나가는 격이네요?”

“하하. 그렇게 되나? 이거 시작부터 너무 고생만 시키는군.”

“흣흣. 그럼 그 보답으로 맛있는 거나 좀 사줘요. 요 아래쪽에 곱창전골 맛있게 하는 집 생겼다고 하던데.”

뭔가 대단한 걸 말할 줄 알았는데, 곱창전골인가.

기억 속에서는 딱히 좋아한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말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귀엽기는. 머리를 슥슥 훑어주었다.

“하, 하지 마요. 머리 헝클어져요.”

“그러니까 더 하고 싶은데?”

“으……사람이 짓궂어 졌어.”

장난삼아 머리를 헝클어트리니 서율이가 입을 비죽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유치하다. 나이 마흔에 이런 짓을 하는 게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이에 맞는 일이 꼭 정해져 있는가?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내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책이다. 내 나이에 무슨……이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이 후회될 따름이다.

지금 이런 상황이 이렇게나 좋은데.

우우우웅—!

음. 하여튼 즐거운 꼴은 오래 못 가는 모양이다.

거칠게 우는 핸드폰 진동에 서율이에게서 손을 떼고 이름을 살폈다. 소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무래도 게이트 관련 소집 인원이 정해진 모양이다.

“언니네요? 정식 공문이 내려온 모양이죠?”

“아마도. 지금 와서 너는 안 된다고 말 하는 건 경우 없겠지?”

“삼촌. 걱정하지 마요. 만일을 대비해서 많은 준비를 했잖아요. 게다가 상대 쪽에서 저를 꼭 적으로 상정한다는 확신도 없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에요. 삼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이번에는 제가 꼭 가고 싶어요.”

“그래.”

옥석같이 빛나는 얼굴로 말 하는 통에 거절 할 수 없었다.

고개를 한 번 흔들고 걱정을 지웠다. 결정은 내려졌고, 서율이를 통해 게이트에 접속 할 것이다. 물론, 아직 몇 가지 공작이 더 필요하겠지만,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이에 걸맞은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최선.

“넌 내가 꼭 지킨다.”

발그레한 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각오를 다졌다.

#

볼튼사를 흔들어 합리적인 의혹을 만들고자 한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름 없는 자’의 등장과 화려한 싸움. 그리고 경고를 남기고 사라진 퇴장의 여파는 방송을 통해서 퍼져나갔고, 각 기관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볼튼사가 거대 기업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문 닫고 언론을 모두 무시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틈에 국내에서는 차남혁과 연관 지어 이를 계속 공격하니, 몇 몇 힘 있는 국제기구에서 이를 감시하고 제지해야 하는 집단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등장한지 벌써 3년 가까이 되는 시간. 국가별로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통합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딱 원하던 대로 되었다.

하퍼가 즉시 인맥을 동원해 기구의 창설을 극적으로 가속화 시켰다. 세계를 흔드는 거물들이 그에게 동조를 했고, 거액의 돈이 투입되었다. 그 결과 유엔의 부속기구로 각국의 게이트를 감시, 관리 할 수 있는 집단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뭔가 후다닥 처리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미 틀은 유엔에서 마련하고 있었다. 그걸 하퍼가 보다 빠르게 당겨서 구축했을 뿐이다.

첫 감시 대상에는 당연히 미네소타에 있는, 볼튼사가 관리하는 게이트로 지정되었다.

볼튼사 측은 이미 자신들이 돈을 주고 권한을 구입하였으니, 사적 제산 침해라 반발을 했다. 허나 언론, 국제 정세, 게이트에 대한 법률적 해석 등의 문제로 따박따박 붙여오는 기구의 압박에 결국 이들도 손을 들고 말았다. 마냥 버티기에는 흘러가는 형국이 너무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사 시기가 정해지고, ‘게이트 관리기구’에서는 필요한 인원을 차출하기 시작했다.

유엔 산하 게이트 보유국에 한하여 공문을 돌리고, 필요 인원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에도 공문이 도착했고, 추천인은 서율이로 정해졌다.

서율이를 보조하는 인원으로는 당연히 우리 회사가 뽑혔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왔으니 굳이 다른 인원이 붙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정부에서 몇 사람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저 연락책에 불과했다.

“도둑놈.”

“도둑.”

“날도둑.”

문제는 회사 식구들이란 것들이 서율이와 내 관계를 알리고 난 뒤 만나는 시간마다 이런 말들을 툭툭 뱉는다는 것이다. 그래, 내가 도둑인 건 맞다. 남규와 동식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깝겠는가. 하지만 소향도 나를 보며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세상 천지에 내편이 없다.

“으……삼촌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서율이가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불에 기름 붓는 격이다.

뜨거운 눈총이 무서워 사무실 밖으로 총총 걸어 도망쳤다. 어차피 준비는 다 끝냈으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준비는 다 끝났나 봐요?”

“아, 죠엘. 회사는 어떻게 하고?”

“그래도 마중은 나와야죠. 저도 일전에 있었던 게이트 너머 이상현상 보고 때문에 제네바로 떠나야 하거든요. 계속 연락은 하겠지만, 한 동안은 직접 볼 수가 없잖아요.”

일전에 조직된 게이트 너머 이상 현상 파악 그룹은 결국 이번 기구에 흡수되었다.

조금 주먹구구식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렇게 국제기구가 합쳐지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전문가라고 해 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니, 통폐합해서 한꺼번에 다루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고생이 많네. 지역 정보 업데이트 되면 계속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요. 그리고……축하해요.”

“아, 음. 들었구나.”

“그런 건 직접 전해주지 그랬어요. 남을 통해서 듣는 건 조금 기분 나쁜데.”

“미안.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죠엘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녀와 나는 같은 처지의 동료이기도 하며, 사업을 함께하는 파트너다. 서율이와 마찬가지로 비밀을 공유하며 힘든 일을 함께 겪어왔다. 첫 만남은 우연으로, 그 뒤는 계획적으로. 하지만 지금껏 꾸준히 나를 돕고, 많은 일을 대신해 준 좋은 사람이다.

호감이 없었냐고?

그럴 리가. 그녀 정도의 사람이 곁에서 맴돌고 있으면 없던 호감도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아름답고, 독립적이며 현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서율이를 택한 건 결국 마음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이미 서율이를 마음에 두게 됐는데.

미안하다면서 우는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어쩌면 같은 취미라며 게임을 논하며 웃는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가슴속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죠엘을 그 이상 깊게 품을 수 없었다.

“나쁜 사람이네요.”

“……”

죠엘이 내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말이다.

같은 처지에서 오는 동질감이 호감이 변한 건지, 아니면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든 정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녀같이 아름답고 훌륭한 여성이 내게 호감을 품었다면 삼배를 하며 환영해야 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휴. 됐어요. 어물거리다 시기를 놓친 내 잘못이죠.”

“죠엘.”

“걱정 마요. 이런 일로 앙심 품는 여자는 아니니까. 서율 양. 좋은 사람이니까 잘 해줘요. 이렇게 된 거 크리스티나가 해준다던 소개팅이나 한 번 해야겠네요. 스코틀랜드 왕자라던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뭐, 그런 거죠. 왕자랑 눈 맞아서 고궁에서 파티 열면 초대장은 없을 줄 알아요.”

조금은 가볍게. 그녀가 짓궂은 웃음으로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무어라 말 하겠는가. 알았다면 얼빠진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녀는 좋은 여자니 분명 딱 맞는 짝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딘가의 왕자일지도 모르겠다. 호화 유람선에서 손 흔들며 멀어지면 그때 웃으면서 넘어져야지.

“……조심해요. 감사 건으로 게이트를 조사하는 것이지만, 만약 상대 쪽에서 반드시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다 생각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응. 대강의 준비는 해 두었어.”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나중에 돌아왔을 때, 잘 됐다고 한 마디만 해 줘요.”

“반드시.”

죠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말 하지는 않았다.

팔을 툭. 한 번 두드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삼촌, 누가 왔었어요?”

“……친구.”

뒤늦게 문을 열고 나온 서율이게게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그래, 이것이 맞는 거겠지.

#

며칠 뒤 우리는 미네소타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율이를 필두로 한 회사 식구들과 정부에서 파견한 공무원 둘. 그리고 개별적인 경호업체 소속 인물 다섯.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섯의 로봇이었다.

죠엘이 경고한 것처럼, 서율이가 게이트에 접속했을 때.

그리고 링크를 통해서 나도 연결이 되었을 때, 만약 이단의 세력이 이를 막고자 해서 공작을 벌인다면 이를 방어 할 병력이 필요했다. 용병? 턱도 없다. 흑갑의 전사들이 내가 상대해서 약해 보였던 거지, 한 명으로도 능숙한 용병단 하나 정도는 능히 털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하퍼의 도움으로 내가 제작한 W.K 시리즈.

최대한 양산을 시도해 다섯대분의 여유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하퍼를 통해 외국계 경호업체로 변장. 행렬에 합류시켰다. 공인된 기업에 공인된 인원이니 나라에서도 거부 할 이유가 없던 터. 이렇게 비행기에 함께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로봇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 건은 하퍼가 알아서 처리를 했다.

왜 사람들이 돈 많으면 사는 게 편하다고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를 하퍼는 돈으로 뚝딱 처리했다.

조금 속물적이기는 하지만, 나도 이런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비행기는 날아 미네소타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하던 지역 공무원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무장한 병력이 주변으로 꽤 배치되어 있었다. 그냥 환영하는 절차 치고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숫자가 너무 많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소향이 대표로 물었다.

이에 푸른 눈을 가진 군인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답을 했다.

“작은 소란입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이걸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소향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며 다시금 물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말 한 권리라는 건 상당히 강했다. 이에 푸른 눈의 군인이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답을 했다.

“……게이트에서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잠시 동안 누구도 이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작가의 말

괴물이 크앙.

좋아 이대로 레이드 물로 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