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04화 (204/240)

아파트 밖. 작은 언덕위에 자리한 놀이터에서 서율이를 찾을 수 있었다.

일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라도 한 잔 할라치면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 종종 찾았던 곳이다. 한적하고, 바람이 잘 불어 근심을 날려버리기에 좋은 장소였다.

“서율아.”

“……아.”

놀란 눈을 한 채 서율이가 돌아봤다.

저 눈을 언제고 본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사고를 당할 때였을까? 깜짝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저런 눈동자만 내게 보였었다.

옆으로 걸어가 난간을 손으로 잡고 섰다.

“그렇게 나가버려서 놀랐다.”

“죄, 죄송해요. 그건 그러니까……”

“당황했다고?”

흐릿해지는 뒷말을 마무리 지어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나와 마주치지 못한 채. 난간 너머 한껏 치장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둘이서 이런 곳에 선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몸을 돌려 등을 기대고 서율이를 옆으로 돌아봤다.

“우리가 안지 얼마나 됐지?”

“……사고 나기 전부터요?”

“뭐, 그렇게 셈해보면.”

“3년이 조금 안 돼요.”

공백을 제외하면 채 1년도 안 되는 건가.

워낙 많은 일이 있었고, 남들은 감당하기 힘든 시간의 괴리를 겪고 있기 때문일까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아 보였다. 사고에서 깨어나 그녀를 만나고 비밀을 공유하며 힘든 일을 겪어낸 것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잘 나가던 유명인이 나랑 꼬여서 고생이 많네.”

“그렇게 생각 한 적 없어요. 삼촌한테는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걸요. 그날 그렇게……사고만 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까?”

“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말이야. 내가 정말로 행복했을 거 같아?”

아마 사고를 피해 무사히 회식을 끝냈다면 내 삶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업무에 회식. 그리고 냉담한 아내와의 관계. 딸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표현하지 못한 채 돈만 건네주는 ATM기계가 되었을 것이다. 조각난 채 굴러가는 시계와 같이. 무미건조한 삶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난 그날의 일을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해. 잠시의 괴로움은 있었지만, 나 같은 사람한테도 빛날 수 있는 영광의 시기를 쥐어준 거니까. 쳇바퀴 위에서 구르던 햄스터가 언제 우리를 열고 하늘 위를 날아 볼 수 있을까.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날 그렇게 사고가 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네 괴로움과 죄책감이 뭔지는 알아. 나를 구하지 못한. 그리고 병석에 들어선 시간 동안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한 거지.”

서율이는 사고가 난 직후부터 나를 돕고자 했다.

이를 막은 게 내 전처고. 병원을 옮기고 도움을 거부해 버린 상황에서 억지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자신의 삶에 치이면서 끝없이 고민했던 것이, 서율이를 괴롭게 한 원흉이다.

정말로 도울 생각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쓰든 찾아왔을 것이다.

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 자신과 함께 있다가 사고가 난 사람의 와이프가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면, 마음 여린 사람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건 깨어난 직후부터 서율이와 얘기하며 뚜렷하게 느낀 점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나아지고 과거의 일을 그냥 기억만으로 간직한 시점에서도 서율이의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은 건 마음의 유약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떨쳐 버렸으면 해.”

“삼촌……”

“네가 날 대하는 것에 죄책감이 서려있다면, 나는 그 마음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

고개만 돌린 채 그녀를 직시했다.

그래, 이것 때문이다.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내가 겁쟁이처럼 주저했다면, 서율이는 죄책감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공포영화를 보고 난 뒤 이불을 코 위까지 덮어 올린 채 그림자에 덜덜 떠는 어린아이처럼.

“날 보면서 말 해 봐. 죄책감이 아니라면, 네가 날 바라보는 건 어떤 감정이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한 번의 질문이 그리도 어렵나. 마흔 줄에 들어선 나이에 멜로영화에 두 손을 꽉 쥐는 청소년처럼. 참 우습지만, 그렇기에 진심임을 스스로가 느낄 수 있다. 가슴 뛰는 감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소중한 것이니까.

“……모르겠어요. 정말 친 삼촌처럼 따듯하게 느껴 질 때도 있고, 어깨를 기대고 싶은 오빠 같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어떨 때는 남자……로 보일 때도 있죠. 하지만 저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싶어서 항상 고개를 젓게 돼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니까.”

“하지만 떨쳐버리기 힘들어요. 아무리 생활이 힘들고, 찾아오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해도, 삼촌이 사고 난 걸 외면했던 건 사실인걸요. 잘 지내고 있다하니 괜찮겠지. 지금 찾아가도 의미가 없겠지. 그런 말로 합리화를 했다고요!”

내 팔을 꽉 쥐고는 서율이가 크게 외쳤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내 생각보다 품고 있던 죄책감이 컸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를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그 날의 보상심리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다. 그녀의 마음이 죄책감 위에 구축된 거라면 나는 진심으로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힘든 일을 피해가려고 해.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람은 정말로 손에 꼽지. 비록 네가 한 순간 그것을 회피했다고 해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잖아. 내가 찾아갔을 때, 그냥 무시하는 것도 가능했어. 너는 이미 잘 나가는 상황이었고, 나는 이제 막 병원에서 깨어난 백수였으니까. 하지만 넌 눈물로 사과를 하고 나를 돕기 위해 노력을 했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네가 돕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길에서 해매고 다녔을지도 몰라. 미소의 일도 어렵게 풀렸을 거고. 사람의 인연이 정해진 바가 있다면, 너를 만난 건 아마도 선연이겠지. 그만큼 힘들게 지녔으면 됐다고. 이제 그만 행복해도 좋다는 누군가의 도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서율이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꽤 힘들었을 것이다. 게이트에 접촉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미소 문제도 해결하기 힘들었을 터. 선연이라 말 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서는.

손을 뻗어 서율이의 뺨을 훑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발치를 적시고 있었다. 참, 눈물이 많다 싶다. 저런 여린 마음으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나 걱정이다. 빨개진 볼을 두드리고는 살짝 당겨서 품에 안았다. 살짝 놀란 듯 몸을 떨었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전에도 한 번 얘기했죠. 회사내에서 삼촌의 인기가 많다고.”

“아, 그랬지. 하지만 솔직히 그건 벗겨먹기 좋은 호구상 아니었을까?”

“아뇨. 전혀 아니에요. 윗사람 막아 아래 직원들 편하게 해 주고, 항상 회식 끝자리까지 남아 책임을 져 주셨죠. 힘들어 휘청거리는 사람들한테 꿀물 건네주고, 실수한 직원들을 잘 보듬어 주었어요. 삼촌은 그냥 못 이겨 한다고 말하지만, 그걸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은 얼마 없어요. 사실 그때부터 삼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난 유부남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반 농담으로 말을 하자, 서율이가 샐쭉이 웃고는 가슴팍을 툭 쳤다.

아, 이런 거 영화에서 본 거 같다. 내가 직접 하게 되다니. 어째 입 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주책인가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서, 삼촌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같은 취미에 즐거워 할 시간도 없이 사고가 나고 말았죠. 참, 많이 울었어요. 내가 나쁜 년이라고. 평소에 죄를 많이 지어서 삼촌이 그렇게 된 거라고.”

“서율아……”

“훌쩍. 괜찮아요. 정말로 많이 힘들었지만 삼촌이 용서해 줬는걸요. 그리고 이렇게 나란히 있을 수 있는 기회도 얻었고.”

서율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눈매와 입술. 매혹적인 자태가 내 망막에 새겨졌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예쁜 건 죠엘이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건 서율이다. 왜? 어떤 이유로? 그런 걸 묻는다면 해 줄 답이 없다.

그냥 그런 거다.

“솔직히 겁나요. 과연 내가 이래도 될까 하고.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될까 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아 두려워요. 괜히 또 삼촌이 나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그건 반대가 아닐까. 마흔 넘은 남자가 너같이 팔팔한 아가씨를 채가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아마 도둑놈이라고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싫어요! 삼촌은 도둑이 아닌데……훔친 건 난데.”

아, 요즘 애들이 쓰는 심쿵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딱 어울리는 거 같다.

입술을 비죽이는 서율이가 이렇게나 사랑스럽다. 두 볼을 손으로 잡고 가볍게 당겨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계획 한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서율이가 깜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더니 부끄러운지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가,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집에서 내 마음을 토해내고 난 뒤에 망설이는 건 그만하기로 했어. 미소가 그러더라. 그러고 있지 말라고. 용기를 낼 거면 확실하게 내는 게 옳겠지.”

“미소가요? 절 싫어하거나 그렇지 않았어요?”

“반대던데? 언니 같은 여자가 올 거면 차라리 네가 낫다고.”

서율이가 얼굴을 흔들었다.

또 눈물을 흘리는 거 같다. 참, 많이도 운다 싶다.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마스카라가 옅게 번져 있었다.

“그만 울어. 예쁜 얼굴 망가진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나도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 이거야. 녹슬었지만 그냥저냥 굴러는 간다고.”

“기름칠을 조금 더 해야겠는데요? 요즘 그런 멘트에 넘어가는 여자는 없어요.”

“여기 한 명 있잖아.”

아, 내 손과 발.

하지만 나름대로 효과는 있어나 보다. 서율이가 슬쩍 볼을 붉히고는 입 꼬리를 달싹였다. 웃긴 건지 달콤한 건지.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신파극 쪽으로는 안 갈 거 같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러게요. 그런 촌스러운 말에 넘어가는 여자가 여기에 있네요.”

“넘어와 주는 거지? 이제 삼촌이 아닌……”

“아, 그. 호칭은 조금 천천히 해요. 그것까지 바꾸려면 머리가 터져버릴 지 몰라요.”

“그래. 이제 시작이고 아직 시간은 많잖아.”

눈에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쿤도, 이단의 일도.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신의 일 역시도. 하지만 시작이 없다면 끝도 없는 법이다. 서율이와의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있잖아요.”

“응.”

“잘 할게요. 삼촌한테, 미소한테도. 지은 죄를 갚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둔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것까지 전부 다 할게요.”

“그런 건 보통 남자가 말 하지 않아?”

“남녀평등 사회잖아요.”

다 풀린 듯 한 농담에 킥 웃고 말았다.

서율이도 배실배실 웃었다. 잘 해 준다. 누군가 누구에게.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온전하게 다 한다면 무게 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아깝다는 말 없는 그런 관계.

서율이와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럼 나도 분명하게 말 할게. 삼촌이 아닌, 남자로서.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을 아끼고 보듬을 것을. 마음을 다하는 것이 부족함이 없고, 거짓 없이 대하며, 망설임 없이 너를 아끼겠어. 연인……의 입장으로.”

“여, 연인.”

“말 더듬지 말라고. 나도 부끄러워.”

“와, 진짜 얼굴 빨개졌어요.”

“밤바람이 차서 그래.”

서율이가 배를 잡고 웃었다.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도 배어나오는 미소는 참지 못했다.

돈도, 성공도, 권력도. 무엇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은 이런 감정일까 싶다. 사랑은 3년이니, 부질없는 짓이라 말 하는 자도 있지만, 그 3년조차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싶다.

“삼촌.”

“응.”

낮은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서율이도 웃음기를 지우고는 발그레한 눈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천천히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젖은 입술을 맞대었다. 따듯한 체온과 서로를 은애하는 마음이 그 사이를 오고갔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민 달빛이 은색 휘광을 배경으로 깔아주고, 언덕 너머로 간질거리는 바람이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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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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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뒤에 사족이 더 있었는데 분위기 깨는 거 같아서 그냥 잘랐습니다.

역시 애정씬은 쓰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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