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99화 (199/240)

느닷없는 청혼에 라라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

결혼 발표와 준비가 순풍에 돛 단 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결혼 공문이 공화국 전역으로 이어지고, 각지의 인사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그래서 그 아이와 결혼을 하겠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장인의 허락.

쿤은 날을 잡아 다시 제국 황제와 접촉을 했다. 귀찮음이 가득 찬 얼굴로 나왔던 그는 쿤이 던진 폭탄 발언에 자세까지 고치며 응대를 했다.

제국의 황제라 해도, 혈육을 냉큼 잡아다 결혼하겠다는 당돌한 말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사절로 가기 전, 공화국 내부에서 결혼 절차를 마치고 싶습니다.”

“그럴 거면 먼저 제국으로 들어와 내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나?”

“오가는 길이 험하고, 그녀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지극한 바. 부디 공화국에서 식을 치루고 넘어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십시오.”

“결혼을 미끼로 사용하는 건 아니고?”

황제의 눈이 뱀같이 빛났다.

쿤이 마른침을 삼켰다. 속셈을 간파하고 있는 건 과연 황제인가 싶다. 하지만 오로지 수단으로 결혼을 사용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꿀린 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단은 뒷전이다.

‘그녀와 결혼을 한다……’

이 마음이 우선이었다.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담담하게 주고받은 마음은 그의 제동장치를 날려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허락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그런 위치까지 차고 올라간 놈이 사랑을 논한다? 혈기에 취한 건가, 아니면 이 또한 술책인가?”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생각이 있는 법이죠. 사랑하고, 경애하고, 공경하며. 다른 방식으로 이 위치를 공고하게 하고자 하니, 진심임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하하하. 옛 성군의 이름이라도 달고 싶은 모양이구나. 좋아, 좋아. 세상이 넓으니 너 같은 지도자가 있어도 나쁘지는 않겠지.”

호탕하게 웃지만 눈은 그대로다.

황제가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쿤은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렇다면 허락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손녀를 내어주는 대가로 바라는 것이라.

금? 보석? 설마 영토 같은 걸 요구하지는 않겠지? 황제가 바랄 수 있는 항목들이 쿤의 머리위로 빠르게 스쳐갔다.

“행복하게 해 주거라.”

“……네?”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은 쓰임을 입증하기 위해 무엇으로든 전락 할 수 있는 위치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지. 지금까지는 핏줄임을 숨겨 두었으나, 밖으로 드러난 이상 결국 도구.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처지. 타국에 시집가 제멋대로 살 수 있다면 그런 처지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와서 혈육의 정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이미 그가 저지른 일들이 가혹하다. 제국내의 반도를 추리기 위해 미끼로 둘을 던지고, 그 후로 손을 놔 버리는 모습.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행적 뒤로 온정을 기대하는 것이 우습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력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하하. 그것이 균형의 사자가 가지는 자신감인가?”

“황제께서는……”

“아, 됐네. 그 이야기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들어야 하는 것이니. 두 아이를 잘 챙겨 기한 내에 들어오기나 하게나.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황가의 핏줄과 이어졌다고 그 점으로 득세를 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네. 황가, 그리고 황제의 힘이라는 것은 혈통이 아닌, 그 위치를 다루는 자에게서 나오는 법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마법 통신이 끝났다.

쿤이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장인이기 때문일까, 제국의 황제이기 때문일까. 먼 거리의 통신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만민을 다스리는 위치가 강력한 위압감을 가져다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허락은 받았다.

이 소식을 라라에게 전해야지.

쿤의 얼굴이 더없이 밝았다.

#

북부, 남부. 그리고 서부까지.

결혼 소식이 전해진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쿤은 결혼을 공개적으로 하고, 이를 위한 축하연을 수도 전역에서 진행했다.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했지만, 하카림 동굴에 쟁여 둔 보석들로 충당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융은 도른과 쉔의 도움을 받으며 남아있는 의회 연줄을 통해 반란도의 무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숫자는 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지방 선민관부터, 요새의 관리. 수도 인근 지역의 유력가까지. 계층과 직위를 막론하고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그동안 의회가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쨌든 그 덕에 무사히 암살건을 도모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세력가들 중 쿤을 싫어하는 이들은 굉장히 많았다. 특히, 의회와 손을 잡고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은 백이면 백 쿤을 싫어했다. 암살건을 진행하는 인물이 융임을 알고, 이를 위해 제국의 도움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에 혹하는 반응을 보였다.

각 지역에서 찬동하는 이들의 숫자가 집계되었다.

대략 절반 정도. 현재 고위급 위치에 있는 이들만 추려도 그 정도였다. 쿤과 다른 관료들이 이 숫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찬동하는 숫자가 이정도로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과합니다. 이들을 모두 잘라낸다면 나라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도른이 말했다.

베인스도 찬동했다. 머리를 베어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은 상책이지만 그것이 나라의 머리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요직에 앉은 이들은 업무 인수인계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 갑자기 실무자들을 대거 잘라내면 나라가 혼란에 휩싸일 위험이 있었다.

“상관없다. 잠시의 혼란이 오더라도 썩은 싹은 확실하게 잘라내야 한다. 혼란이 오는 지방은 수도에서 직접 관리를 하면 된다. 부족한 세수는 내가 가진 재물로 충당을 하고, 그동안 추려 둔 예비 관리들로 위치를 채운다.”

하지만 쿤은 리스크를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점진적인 개혁이 가장 출혈이 적겠지만, 그 정도로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다. 당장 제국으로 사절 행사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단과의 싸움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단하기 어려웠다. 빠르게 안정화를 시키고 후방을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계획은 완성되고, 초대 인원이 추려지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융에게 노예 인장을 찍고 후환을 대비했다.

제국에 도착하기 전 까지 남은 시간은 5일 정도. 각지의 사절단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남부에서. 그리고 서부에서.

죽느냐 죽이느냐.

축복 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 험악한 계획이 오고가고 있었다.

#

“언니, 준비는 다 됐어?”

“응. 그런 거 같아. 아니, 됐어.”

“킥. 떨고 있는 게 별로 신빙성은 없는데?”

거울 앞에 앉은 라라.

그 뒤에서 루루가 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라라는 화려한 드레스에 옅은 화장. 굵은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고,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걸. 결혼이라니……아직도 실감이 안 나.”

“솔직히 너무 급하기는 했어. 쿤 오빠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평생 한 번 뿐인 결혼이 이렇게 급해서야 조금 그래.”

“쿤 오빠 사정도 이해를 해 줘야지. 곧 제국으로 가야 하는데, 상황을 방치 할 수는 없잖니.”

“헤헤. 이제 결혼한다고 남편 편 드는 거?”

“누, 누가?”

부끄러운 듯 라라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루루가 깔깔 거리며 웃고는 뒤에서 라라를 끌어안았다. 잠시 둘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급한 건 라라만이 아니라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뿐인 친언니가, 후다닥 처리하듯 결혼을 하고 있으니 심란한 건 비슷할 것이다.

“결혼하고 나면, 우리 루루도 좋은 남자 소개시켜 줘야겠다.”

“피. 나는 됐어. 나는 일찍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걸. 모험을 즐기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다가, 나중에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거야.”

“그러다 혼기 놓치고 후회한다?”

“그래도 괜찮아. 언젠가 불꽃의 정령사 루루. 이런 이름으로 영웅의 시가가 울려퍼질 수도 있는데. 그때는 부럽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후후. 그때가 되면 언니가 우러러 봐야겠는데?”

결혼 전의 소소한 잡담.

자매는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고, 결혼 전의 긴장을 희석시켜갔다. 작은 문 하나를 경계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있음은 누구보다 그녀들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융의 부름을 받아 암살을 위해서 온 사람이다.

“준비는 다 끝났나?”

문밖에서 세이혼이 물었다.

병력을 몰아 수도로 돌아온 뒤 결혼 소식을 접하고는 가장 크게 놀랐던 인물이다. ‘제대로 생각한 것 맞나?’라며 쿤에게 몇 번이고 물어서 라라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신부를 안내하는 역할로 손수 나서 주었다.

“네.”

짧은 대답을 끝으로, 라라가 대기실 문을 열고 나왔다.

커다란 샹들리에에 화려한 장식품들이 회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왕이 사용하던 왕성을 개조한 것이다. 돈이 꽤나 깨졌지만 쿤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한 번 뿐인 결혼식. 그리고 희생을 해야 하는 라라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예쁘네……’

먼저 나가 대기하던 쿤이 라라를 보며 입을 벌렸다.

평소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라라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남달랐다. 태양을 뚝 떼어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이러할까. 밤마저 낮으로 바꿀 듯 그 아름다움이 대단했다. 축하를 위해 준비하던 악단조차 그 미모에 잠시 동안 동작을 멈췄을 정도다.

“신부께서 들어오십니다.”

빠암—! 빠바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주례.

쉔 노사의 음성에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에 발맞춰 라라도 천천히 회랑을 걸었다. 붉은 카페트에 흰색 드레스가 대비되어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마치 꽃잎 위를 거니는 요정이라 해야 할까. 저마다의 감정을 담은 탄식들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으득. ‘내것이야 하는데.’ 이 가는 소리와 탐욕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나름대로 조용히 중얼거린 거 같지만 회랑부터 일대 영역은 전부 쿤의 감각권에 들어와 있다. 아도란의 도움을 받아 설치한 것으로 작은 속삭임조차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남부. 필그람 가문의 로이라고 했던가.’

일전에도 와서 결혼 동맹을 주장하던 놈이다.

융의 제안을 가장 먼저 허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끌고 온 이들 중 절반이 이단의 냄새를 풍겼고, 하나는 놀랍게도 마법사였다. 작정을 하고 끌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라라가 회랑을 걸어 쿤 앞에 섰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발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봐.’ 쿤이 낮게 읊조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쉔이 한 걸음 물러나고 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워?”

“……네.”

여린 음성이 달콤하다.

쿤이 부드럽게 웃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사랑을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삼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일까. 우아하게 떨어지는 목선조차 시선을 빼앗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 주었다.

‘난 복을 받았구나.’

처지나 위치. 가진 재물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라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충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억만금보다. 많은 땅 보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사람이 소중했다.

쿤이 손을 뻗어 그녀를 바짝 당기고는 쉔을 봤다.

결혼. 빨리 하고 싶었다. 지금 이 여자를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짝이라 공증 받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빠.”

“지금은 이대로 즐기자.”

“걱정되지 않아요?”

“돼. 하지만 기쁨이 더 많아. 너는?”

“저도요.”

기습의 순간은 가장 행복하고, 무방비로 놓이는 때가 좋다.

그건 결혼의 서약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융은 제안을 했고, 쿤은 받아 들였다. 비록 행복한 시간을 망치는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식장에 서 라라를 보니, 선택이 후회가 되었다.

조금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하여도 이 순간을 만끽 할 걸.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라라와 나란히 서서 여러 사람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가슴 충만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앞서 축하의 의미를……”

쉔의 축사와 공화국 저명한 인사들.

그리고 각 지역에서 온 대표들의 축하 인사가 전해졌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라라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새치름하게 뜬 눈으로 쿤을 보면 깍지 긴 손을 오물거리는 모습은 주변의 상황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제국에 갔다 돌아오면 다시 한 번 하자.”

“괜찮아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때는 제단 앞에서 서준경 신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하자. 너와 나를 위해서는 세상 끝에 닿을 축복을 내려주실 거야.”

“킥. 그렇게 하려면 공물을 산처럼 바쳐야 할 텐데요?”

“하면 되지. 산이라도 하나 바칠까?”

라라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아, 이 얼굴을 평생토록 보고 싶다.’ 불숙 올라오는 생각에 쿤이 저도 모르게 비슷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한 웃음이었다. 웃는 걸 보며 웃고, 자신이 웃는 걸 느끼며 웃는. 마냥 웃게만 되는 그런 웃음.

“……의 의미로 서약의 입맞춤을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축사는 말미로 치달았고, 지나칠 수 없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쿤이 눈썹을 쓱 올리며 눈으로 물었다. 라라가 홍조를 띄운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예전에는 다람쥐 같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붉은 것이 꼭 꽃과 같았다.

쿤이 손으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잡고는 얼굴을 가져갔다.

“아……!”

짧은 탄성과 부드러운 접촉.

약간은 마른. 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옅은 온기와 부드러운 숨결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어쩌면 단순한 신체의 접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약의 말미. 두 사람의 시작을 알리는 증표로서, 이 입맞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사실은 두 사람이 잘 느끼고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입맞춤의 시간만큼이나.

키릭.

“아.”

하지만 행복의 시간은 잠시 밀어두는 것이 좋다.

계획된 올가미 안으로 목을 들이미는 자들이 있으니까.

“눈 감아. 금방 끝날 테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에서 참혹한 처단자로.

쿤의 눈빛이 바뀌었다.

※작가의 말

뭐가 끝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