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의 결혼식이라면 공화국 내부의 인사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
거부하기 힘든 명분일 뿐더러, 융이 비선으로 연락을 하여 암살건을 꾸미고자 하면 기회로 삼을 것이 명백했다. 확실히 한 번에 적을 모아 처리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키지가 않는다.
쿤이 집무실 뒤편 작은 화원에 홀로 나와 전경을 감상했다.
표정이 어두웠다. 융의 제안을 보류하고, 그를 따로 따로 가두고 난 뒤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니.’
단순한 미끼일 뿐이다.
융이 요구하는 건 유력가 중 두 황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을 테니, 그 중 하나를 잡아서 결혼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흐름이 될 테니, 다른 세력에서도 똥줄이 탈 터. 암살건을 설득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이다. 이미 남부에서 라라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 바. 이를 허락만 한다면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갈 것이다.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진심인가.’
적도를 모아 한 번에 처리하고 난 뒤 무효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생각을 해 봐도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이 좋다. 아마 라라에게 물어도 별 다른 거부는 하지 않을 터. 예전의 쿤이었다면 딱히 고민 할 만 한 문제가 아니었다.
“……쯧.”
엉클어진 머리에 쿤이 혀를 찼다.
괜히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만 집어 화원 뒤로 던졌다. 작은 호수위로 떨어져 물 튀는 소리를 길게 뽑아냈다. 속은 풀리긴 커녕 더 엉켰다. 던진 돌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머리가 텅 비어, 굴러가지가 않았다.
수많은 특기와 스킬도 이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합리적인 선택이 있음에도 그 선택을 고르기 싫어하는 마음.
“쿤. 쿤. 머리가 복잡.”
“……아도란?”
그런 쿤의 옆으로 아도란이 다가왔다.
어디선가 난 노란 꽃 하나를 손에 들고는 총총 거리는 걸음으로 걸었다. 그에게서는 고민이라는 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법서 때문에 머리가 헷가닥 했다고 하는데, 지금에서는 차라리 쿤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거. 쿤, 꺼.”
“꽃? 나한테 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필요 함. 쿤 고민. 해결 방법.”
“해결 방법이라고? 무슨 생각이 있는 거야?”
아도란에게 이런 걸 묻는다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궁지에 몰리니 어쩔 도리가 없다. 본래 마법사로 가지고 있던 번뜩임이 나올 수도 있는 거니, 쿤이 기대하는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아도란은 꽃을 건네고 빙빙 돌아 화원 저편으로 멀어져 갔을 뿐, 답 비슷한 것도 내어놓지 않았다.
쿤이 예쁘게 모인 꽃다발을 손에 쥔 채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냐.’
상대는 아도란이다.
차라리 란에게 찾아가서 고민 상담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머리를 벅벅 긁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무언가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쿤, 오빠?”
“……음?”
그때, 화원 입구 부근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라라였다. 머리에는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었다. 색과 모양. 아도란이 건넨 꽃이 머리에 쓴 꽃들과 같은 것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도란……’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이건 분명히 그가 만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아직도 고민 중인가요?”
“아……뭐, 그렇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기만술의 일종이잖아요. 혼인 건으로 적을 불러들이려는 것뿐인데,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네가 나보다 낫네.”
웃어야 되는데,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째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턱을 슥슥 쓰다듬고,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아직도 머리가 엉켜서 사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털썩. 라라가 바로 옆으로 와서 앉았다.
들꽃 냄새가 풍겼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거 같았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으, 응? 뭘?”
“제국으로 가는 거요. 사절단의 입장이지만, 가게 되면 저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제국의 황녀이기도 하지만, 공화국의 시민이기도 해. 이미 공화국 사람들에게 얼굴을 많이 알려 두었는데, 덜컥 제국에 잡아 두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내가 막아줄게. 너희를 강제하지 못하도록.”
“상대는 제국이고, 황제인데요?”
“신을 등에 업고 있어서 말이야. 어지간한 건 눈에 안 찬다고.”
장난스레 말을 하자, 라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는 슬쩍 몸을 숙여 얼굴을 쿤의 어깨에 기댔다. 들꽃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심장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려왔다.
“그냥……이런 일 다 없이 한적하게 지내고 싶어요.”
“예전처럼?”
“에이, 그건 조금 험난하다. 하지만……생각해 보면 그때가 즐거웠을 수도 있네요. 우리끼리 힘든 거 이겨내고, 공화국까지 함께 왔으니까요. 진짜 제국에서 누리던 모든 걸 다 버리고, 오빠 하나만 믿고 그 힘든 것들을 다 이겨냈네요.”
황녀임은 숨겼지만, 루니 백작 손아래에서 화초같이 지내왔던 그녀다.
융의 배신으로 고난이 시작된 시점부터 신분에 맞지 않는 험한 일들을 겪어왔다. 성정이 단단하여 군소리 없이 이를 버텼지만, 돌이켜 보면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일도 하고, 황녀의 신분으로 약초를 캐러 뒷산을 탐방하기도 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너랑 루루가 잘 견뎌 준 거지.”
“그거 알아요? 여행 초창기에는 루루랑 같이 오빠 욕 많이 한 거?”
“……정말?”
“그럼요. 위기에서 구해준 건 알고 있었지만, 불평 할 대상이 필요했잖아요. 너무 거친 거 아니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오빠 모르는 곳에서 열심히 뒷담화를 했답니다.”
“허허. 어쩐지 뒤통수가 간지럽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
“하지만 지금은 정 반대에요.”
라라가 허리를 가까이 부쳐오더니, 고개를 들었다.
쿤의 바로 아래. 입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숨이 볼에 닿고, 솜털이 간질간질했다. 어쩐지 목이 바짝 마르는 거 같아, 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공화국까지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던 게 전부 오빠 덕분인 걸 알고, 도착해서도 무사히 정착 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끼리는 무리였음을 알죠. 그날 그렇게 오빠를 만난 건 아마 굉장한 행운이었을 거예요.”
“갑자기 칭찬을 하니까 어색하네……”
“갑자기가 아니에요. 줄곧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말 할 수 있는 건 미리 말 해 두고 싶었어요.”
“라라야……”
눈가에 맴도는 건 불안감이었다.
태연하게 말 했지만, 그녀 역시 결혼을 위시로 한 계획이나 제국 행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아버지인 공왕은 죽었고, 황제는 그녀를 도구처럼 여기고 있다. 그나마 양부였던 루니 백작이 그녀를 아낀다고는 하지만 결국 황제의 부하일 뿐이다. 처지가 불안하고 앞날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보듬고 싶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이런 감정이 어색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여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맞는지도 확신이 안 든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상실을 느껴보면서 각오 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을. 이 여자를 잃기 싫다고.
“……!”
쿤이 손을 뻗어 라라의 볼을 가볍게 잡았다.
동그랗던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눈동자에 서려있던 불안이 더욱 증폭되는 거 같다. 하지만 불길한 느낌은 아니다. 약간의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의 편린이 그곳에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 할 필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왜요? 오빠는 왜 저를 그렇게 지켜주려고 해요?”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라라가 드물게 강한 어조로 물어왔다.
별빛을 빼다 박은 눈매에는 확인을 위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기라고 잔뜩 배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왜인데요? 말을 해 주세요.”
다시 라라가 물었다.
‘왜지?’
쿤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 자신은 라라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일까? 책임감 때문에? 하지만 그건 공화국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다. 이제 와서 그녀를 보호해야 할 책임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굳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하나 뿐.
“내가 널……”
입까지 올라왔다, 덜컥 하고 걸렸다.
해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상대는 황녀. 자신은 일개 용병일 뿐이다. 비록 지금 통령의 대리로 공화국을 이끌고 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연 그런 인간이 황녀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품어도 될까.
“말해요. 나를 보고.”
그때 라라가 손을 뻗어 쿤의 얼굴을 잡았다.
물러서는 쿤의 고개가 멈췄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리고 침묵이 흘렀다. 둘 모두 알고 있는 사실 하나. 그 지점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만, 하나가 부족하여 맴돌고 있었다.
“말해요. 날 좋아한다고. 그래서 날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에 두는 거 같다.”
그러다 불쑥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았다. 둘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웃었다. 크게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웃고 라라가 타박했다.
말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쿤의 손을 잡고는 눈을 보며 말을 했다. 나긋나긋한 손길에 쿤이 슬쩍 얼굴을 붉혔다. 이런 성격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족한 부분에 불쑥 들어오는 라라의 향기를 이길 수가 없었다.
“되나 싶어서.”
대신 힘겹게 말을 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라라는 단번에 이해를 했다. 그리고 별 다른 반박 없이, 손을 당기며 품에 안겼다. 들꽃 냄새가 깊게 풍겨, 쿤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나도 그랬던 거 알아요?”
“너도?”
“네. 말할까 말까 하면서……계속 고민했어요. 결국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황녀의 입장으로 괜찮을까. 오빠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음……”
그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쿤이 침음성을 삼키며 품에 안긴 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고 가녀리다. 품 안에 쏙 들어온 모양새가 본디 그렇게 난 것 같았다. 온기와 향기. 다시는 멀리 떠나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즉에 이렇게 말할걸 그랬어요.”
“음……그랬다면 내가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네.”
“에이. 은근, 이런데 약하네요.”
“강하기 힘든 건 분명하니까. 그래도 확신이 없었다면 답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건 기분 좋은 말이네요.”
고개를 들었던 라라가 다시 쿤의 품에 안겼다.
‘신기한 기분이네.’ 쿤이 중얼거렸다. 뭔가 몸이 붕 뜬 거 같고, 괜히 웃음이 실실 베어 나왔다. 몸 파는 여자 여럿을 품에 안고 자 봤어도 이런 감정은 느낀 적이 없었다. 충만하고, 무언가 이룩한 듯한 느낌.
‘이제야 한 사람 분을 하게 된 거 같네.’
어릴 적 선배 용병들이 계집을 품어야 사내가 된다 했던 건, 그냥 돈 주고 사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걸까. 생소한 감각에 별별 이야기까지 다 떠올랐다.
“그럼 이제 됐어요.”
“……음?”
“불안했거든요. 계획을 하더라도……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발표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제 오빠가 마음을 보여주었고, 확신을 주었으니 나도 할 마음이 생겼어요. 일전에 있었던 남부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결혼을 공표하세요.”
“……”
남부의 제안을 받고 결혼을 진척시켜, 적도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암살 건으로 뒷공작을 펼쳐서 일망타진을 시도한다. 그렇게 되면 결혼 발표도 무효로 돌리고 적을 모두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퍼진 소문은 쉽게 잡기 힘든 법이다. 라라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게 된다.
‘싫다.’
합리적인 사고는 둘째 치고, 쿤 자체가 그냥 받아들이기 싫었다.
마음을 확인하고 입으로 뱉은 이후부터 그런 마음이 더욱 공고해 지고 있었다. 이를 집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꺅.”
라라를 더욱 세게 당겨 품에 안고는 입을 떼었다.
“그럴 수는 없어. 계획이라고 해도 네가 다른 이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있어. 방법이.”
라라가 꼬물꼬물 고개를 들어 쿤의 얼굴을 봤다.
꾹 다문 입술과 활활 타오르는 눈빛. 그 어떤 때보다 굳은 결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쿤이 그 시선을 마주보며 말을 했다.
“너랑 내가 결혼하는 거다.”
“……네?”
한 걸음 내딛었더니, 하늘을 날려고 한다.
라라가 붉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작가의 말
끄아아아앙. 못쓰겠어! 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