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97화 (197/240)

병력을 이끌고 집무실 밖, 초소 인근으로 향하니, 정말로 융이 있었다.

그를 돕던 이들은 전부 어디론가 가고 없고 그 혼자만이 지친 얼굴로 다가오는 쿤을 바라봤다.

“융. 정말로 네놈이군. 무슨 속셈이지?”

“긴히 할 말이 있다. 장소를 마련해 주겠는가?”

“제정신인가? 우리 관계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드러웠지? 당장 저놈을 포위해라!”

쿤의 명령에 병사들이 넓게 펼쳐져 융을 포위했다.

나름대로 정병이다. 융이 날고 기어도 쿤과 정병들의 합공을 버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뒤에는 쉔도 기다리고 있다. 범 아가리로 융이 홀로 뛰어든 격.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융은 병사들의 움직임에도 태연했다.

아니, 그보다는 초연했다. 마치 포기한 사람처럼 눈에서 어떤 투기도 읽을 수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희미한 분노 뿐.

고개를 흔들며 쿤을 향해 말했다.

“쿤, 네가 공화국의 통령 대리직을 맡고 있는 걸로 안다. 정식으로 망명을 요청하고 싶다.”

“……망명?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말인가?”

“그렇다. 나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 수 없는 몸. 몇 가지 대가로 공화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한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란 말인가.

어떤 암계인가 싶어 쿤이 유심히 그의 눈을 살폈다. 지친 눈매 안으로 보이는 눈동자에서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심박수, 미세한 떨림. 그 어떤 곳에서도 거짓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가 뛰어난 검수라 신체 제어가 대단한 건 알지만 이렇게 모든 걸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째서?’

제국을 건너갈 당시부터 라라와 루루를 노리던 인물이 융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망명이라니. 덜컥 믿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했다.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망명하고자 하는 것은 한 점의 거짓도 없다. 그리고 그를 위해 네게 줄 선물도 준비해 두었다.”

“선물? 어떤 선물이지?”

“이곳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망명을 받아 줄 생각이 있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

“……흠. 도른, 가서 특급 죄수용 수갑을 가지고 와라.”

쿤이 잠시 생각하다 명령을 내렸다.

특급 죄수용 수갑은 드워프들이 정련한 쇠사슬로 연결되어 무지막지한 강도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게다가 힘의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융이 대단해도 충분히 만일을 대비 할 수 있었다.

대치가 잠시 동안 이어지고, 도른이 육중한 무게의 수갑을 가지고 왔다.

병사 넷이 나눠 들고 끙끙 거리며 융에게 이를 채웠다. 그는 양 손과 양 발에 족쇄가 걸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에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건 아니었다. 신변이 완벽하게 강제된 이후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떤가. 이렇다면 대화를 할 수 있겠지?”

“……들어는 보지.”

무슨 얘기인지.

쿤이 턱짓으로 명령을 내리고는 등을 돌렸다.

#

집무실 안쪽 작은 내실에 자리를 잡았다.

아도란, 베인스이 융의 뒤를 점하고 쿤이 전면에 위치했다. 문가에는 쉔이 팔짱을 낀 채 대기했다. 그는 공왕의 사후 내실 근위대의 책임자로 직위를 바꾸었다. 은퇴한다는 것을 쿤이 겨우 말려서 그 위치로 잡아 둔 것이다.

손님을 위한 그 흔한 차 한 잔조차 없이 쿤이 물었다.

“이제 말 해 봐라. 무슨 속셈이지?”

“속셈은 없다. 내 목적은 미리 말 한 것처럼 망명. 목숨을 보전하는 대가로 선물을 가져왔을 뿐이다.”

“선물이라. 듣기 좋은 얘기로군. 하지만 의문스러워. 어째서 갑자기 망명을 하려 한 거지?”

“그건……”

융이 고개를 숙였다.

음울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기억을 뒤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달싹거리는 입술. 잠시 망설이더니, 탁한 목소리로 답을 이어갔다.

“내가 두 황녀분을 노린 것은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협박?”

“가족이 제국에 잡혀 있었다. 너도 제국내의 권력 갈등은 알고 있을 텐데? 반 황제파의 기세가 올라가면서, 그 중 일부가 내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을 가했다.”

“믿기 어렵군. 네 위치라는 것이 제국에서 그리 낮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쉽사리 납치가 성공했다고? 또, 그걸 제국에서는 모른다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이 배신을 했으니까.”

황제가 일으킨 20만의 군세.

융의 말이 맞는다면 두 가지 사실이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의기를 드러내는 것 말고, 산을 흔들어 쥐를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수단일수도 있으니까. 허나, 그건 아직 가정일 뿐. 쿤이 생각을 속으로 갈무리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계획은 실패했고, 두 황녀는 공화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화국 사정도 딱히 평화롭지 않아, 손을 잡고 공작을 할 만 한 사람은 넉넉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틀어진 건가?”

“제국에 잡혀있던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모두 죽어? 어째서? 적들이 너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인질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을 텐데?”

융의 실력과 지위.

그만한 사람을 다루는 거라면 인질을 아무렇게나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반란도의 일부를 잡아 그 행적을 쫓았지. 흔적이 나를 협박하던 자의 수하까지 닿았고,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반란도는 내 가족을 인질로 잡았고, 퇴로를 요구했지. 하지만 황제는 그런 말에 휘둘릴 인물이 아니야. 그 자리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죽고 말았다.”

“으음……”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황제라면 가능하다.

쿤이 침음성을 삼켰다. 가족을 위해 고국을 배신하여 이곳까지 왔던 융이라면 그 죽음이 얼마나 무겁게 다가왔는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제국에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가?”

“……이해를 못하는군. 내가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제국도 황제도 아니다. 내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을 했던 반란도 무리.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 목을 옥죄였던, 테이단 공작이다.”

“황제에 대한 원한은 없고? 죽게 된 건 결국 황제 때문인데?”

“가족이 잡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응하기는 했으나, 어찌 폐하께 앙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건 옹졸한 계책을 꾸린 테이단 공작과 반란도 무리의 잘못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킬 것도 없는 몸이다. 죽기 전에 그들의 뼈와 살을 분리해 씹어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융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복수를 천명하는 그의 기세는 상처 입은 호랑이와도 같았다. 쿤과 베인스. 심지어 쉔 조차 그 흉흉한 기세에 낯빛을 바꿨을 정도였다.

“……좋아.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 치고, 가지고 왔다는 선물은 무엇이지?”

“듣기로 네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군. 서부의 무리와 남부의 무리가 계속 골머리를 썩게 한다고. 내게 그 문제를 해결 할 방책이 있다.”

“흠. 어디 한 번 말 해 봐라.”

“그 전에 요구할 것이 있다.”

“네 말이 도움이 된다면 망명은 받아들이겠다.”

“아니,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망명을 하려는 것은 제국에 갈 수 없고, 테이단 무리에게 힘을 쓰기에는 공화국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망명과는 별개로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주었으면 한다.”

복수를 위해 망명을 하겠다.

조금 꺼림칙한 이유이기 때문에 거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가 건넨 조건이 달콤하다. 서부와 남부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공화국은 바로 안정이 될 터. 만에 하나라도 해결책이 있다면 들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쿤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20만의 병력을 모집하고 있음은 알고 있을 거다. 이는 과시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도둑을 제 발 저리게 해서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제국 내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힙을 합치면 그에 대항 할 이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테이단 공작이지. 흔히 4대 공작가라 불리는 이들의 수장이야.”

“배경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공화국 통령 대리의 입장으로 테이단에 대한 정보를 황가로 흘렸으면 한다. 이미 그쪽과 공화국 내부의 역도가 연이 닿았다는 건 알려진 바. 네가 그 줄기를 쫓아 무리의 일부를 밝혀냈다고 하면 제국 쪽에서도 중히 들을 것이다.”

“하. 역풍은 누가 맞고?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가 제대로 된 증거를 잡지 못하여, 제국의 화만 불러오면 어찌 할 건가?”

“그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거다. 필요한 건 명분. 네가 그것을 건네준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역도를 잡아 무릎 꿇리실 거다.”

맹신은 받는 쪽에서야 좋지, 보는 쪽에서는 달갑지 않다.

설사 황제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쿤의 입장에서는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라도 일이 실패하여 공작가 하나와 척을 진다고 해 보자. 그 여파를 쉬이 감당할 수 있을까?

“저와 루루의 이름을 파세요.”

그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고 라라와 루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둘이 방 밖에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융이 왔으니 그녀들도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 일. 밖에서 몰래 듣는 수준으로 그냥 두었던 것이다.

“황녀……”

“융 아저씨. 살아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융은 라라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 땅에 박았다.

가족이 잡혔다 한들, 모시던 이의 혈육을. 그것도 어린 여아 둘을 납치하고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즐거울 리 없다. 그 죄책감과 후회가 융의 몸을 쑤시고 있었다.

“……일어나요. 가족이 잡혀서 그랬다는 건 밖에서 들었어요.”

“들 수 없습니다. 본디, 가족을 구하고 목숨을 끊어 속죄하려고 한 바. 어찌 염치없이 두분을 마주 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고개를 드세요. 죄책감에 숙이고 있는 다고 모든 일이 끝나나요? 당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하지 않아요? 지금 필요한 건 날이 선 검이지, 녹슨 꼬챙이가 아니에요.”

“아가씨……”

근엄한 라라의 말에 융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용서? 한 발 물러나 보던 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라라는 융을 사용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을 꺼냈을 뿐, 진심으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오랫동안 보아 온 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핏줄이라 이건가.’

황제의 피가 라라에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었다.

“쿤, 오빠. 테이단 공작이라는 인물이 루루와 저를 납치하라 사주한 인물이라면 그냥 놔 둘 수는 없어요. 사절단으로 제국으로 가면, 우리 이름을 걸고 황제에게 이를 고하세요.”

“사절?”

“얼마 후 제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융은 우리 쪽 죄수로 동행해 주세요. 납치하려 한 장본인과, 황제의 손녀. 이 정도면 죄인을 고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 무언가 증거를 찾지 못한다 해도 화살을 공화국으로 돌리지는 못하겠죠.”

“황제의 손녀니까.”

“네. 납치를 당해 힘겨웠던 두 황녀라면 일을 무마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화살은 죄인인 융에게 향한다.

그 사실조차 알고 말하는 걸까? 쿤은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사람은 시간에 따라 성장하고 변한다. 라라 라고 그것이 다른 건 아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그녀의 면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조차 싫지 않다니……’

꽤나 마음을 빼앗겼구나.

쿤이 스리슬쩍 웃고 말았다.

“좋아. 네 조건을 받아 준다는 가정 하에, 들어 보도록 하지. 내게 줄 수 있는 선물. 어떤 것이 있지?”

“……암살이다.”

“응? 적을 암살해 주겠다는 거냐?”

“아니, 반대다. 네 암살 건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다는 얘기지.”

융이 고개를 들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뒤, 나는 본격적으로 공화국 내부의 인사들과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국과의 연락책이 긴밀하게 구축되어 있던 바. 요직의 이들과 연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중의 상당부는 의회와 연이 닿아 의회-지방 권족의 형태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었지.”

“의회는 이미 우리한테 박살이 났다.”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의회의 연줄을 타고 생각하자면 그 기반은 여전히 공고하다. 특히, 지방 관리들 중 의회의 추천을 받아, 유력가와 유착형태에 들어선 이들은 공화국 전역에 퍼져있다. 항복한 북부의 이들이라 하여도 고개를 숙였을 뿐, 이 사실은 변하지 않지.”

“음……”

썩은 살점을 도려냈지만 환부가 생각보다 깊이 파여 있다.

쿤이 부인하지 못했다. 최대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깊이 박힌 단검을 꺼낼 수는 없었으니까.

“네가 그들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그들도 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현재 통령의 대리로, 네 인기는 수도. 그리고 수도 인근 지역에서는 최고조에 달해 있지. 출신이 불분명하고, 기반이 없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건 바로 이 인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인기는 오직 너에게만 국한되어 있어. 만약 다른 이가 이 위치에 자리해 대리직을 수행하려 한다면 반발이 엄청날 것이다.”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쟁점은 결국 너라는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렇다면 이를 이용하여, 네 암살건을 상주 할 수 있겠지. 제국에서 온 황녀 납치범과 의회파의 잔당.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지방 권족들의 연합으로.”

머릿속에 대충의 구도가 그려진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허나, 암살건을 상주하여 적도를 모으려 해도 그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일 가능성은 없어.”

“아니, 한 가지 있다.”

“……있다고?”

“그래. 이럴 때일수록 참가 할 수밖에 없는 명분. 지방의 유력가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성대한 파티를 열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쿤이 미간을 좁히며 융을 봤다. 그가 시선을 돌리더니, 쿤이 아닌 라라와 루루쪽을 봤다. 그리고는 무겁게. 그리고 죄스럽게 말을 했다.

“공왕의 자제분이자, 제국 황가의 핏줄. 두 분의 혼례라면 가능하다.”

답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작가의 말

딴~딴따단~

예약연재. 잘 올라갔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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