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나마 세계에 남게 해 달라던 고신의 부탁.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내 부름은 허락이 되어 신성력과 공명하여 스러져간 옛 신의 일부를 불러왔다. 이는 찬란한 빛과 함께 내려 샘 안에서 되살아나니, 그야말로 자신의 썩은 살에서 다시 태어나는 광경이라 볼 수 있었다.
부리는 황금색이고, 날개가 두 쌍이었다.
눈알은 자줏빛과 푸른색이 섞여 시계방향으로 휘돌았고, 깃털은 백색으로 어둠이 깃들이 못했다.
물 위에 발을 디딘 플루톤이 길게 울었다.
그 울음은 증명이 되어 숲으로 퍼졌다. 숲에 몸 뉘인 고신의 존재가 시간에 먹혀 사멸하게 되고, 그 위를 여왕에게 넘기고 난 지 수천년. 다른 존재의 힘을 빌어 샘에서 재생을 성공하니 본래 가진 힘의 일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고맙다.
쿤은 별 말 하지 않았다.
그가 예뻐서 살려준 건 아니다. 그냥 죽어가는 순간 그의 부탁이 너무 애절하였기에 이름을 붙여 주었을 뿐.
— 숲은 그대를 믿고 그대의 신을 섬기겠다. 우리의 영광은 오롯이 그대의 것이니, 빛과 어둠. 그 어디에 속한다 하여도 영겁의 이름으로 그대의 뒤를 쫓기를 맹세한다.
선언이 힘이 되어 퍼졌다.
싹이 트고 죽어있던 꽃들이 살아났다. 만개. 숲의 생명력이 주변으로 넘쳐흘렀다. 엘프들은 무릎을 꿇고, 숲지기들은 눈물을 보였다.
“그대가 정녕, 이 숲의 주인이십니까?”
“아니다, 아이야. 주인은 여전히 너란다. 나는 이름을 받아 다시 태어난 신. 그 부름을 준 자에게 복속되어, 의지를 행하려 한다. 어긋남을 불러오는 불길한 돌조각은 내가 막아 둘 테니, 이제는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그리자를 봉인하겠다? 이미 한 번 당하지 않았나?”
울림을 지우고 내려선 플루톤에게 쿤이 물었다.
“그대의 힘. 아니, 그대가 모시는 신의 힘이 내게도 이어져 있으니 나고 자란 숲에서 이를 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숲의 정기를 받아온 샘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할 수 있겠지.”
플루톤이 날갯짓을 했다.
바람이 불고 샘의 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리고는 푸른빛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이는 숲 전체를 감쌌다. ‘흠.’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숲을 감싸고 난 뒤 그리자에서 풍겨오던 이단의 혐오감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좋아. 이 숲에 대해서는 네게 맡기도록 하지.”
[플루톤이 권속이 되었습니다.]
알람 소리가 일말의 의심도 날려주었다.
상대는 고신. 그것도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신이다. 옛 것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런 존재를 권속으로 둔다는 건 그냥 저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하는 플루톤도 받아들이는 쿤도 막힘이 없었다.
그보다 큰 존재를 둘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플루톤은 샘의 힘을 사역한 이후, 그리자가 있는 동굴 안쪽에서 잠이 들었다.
새롭게 재생을 하였기 때문에 안정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물어볼 것이 있던 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 했다.
“이곳에 머물 건가요?”
“잠시는. 숲의 동태도 살펴야 하고, 만약을 위해서 잠시 남아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네가 그리자 조각 중 둘이나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일단은 한 시름 덜었으니까 여유는 있어.”
“이번에는 조심하세요. 적으로 돌아서면 곤란하다고요.”
“그 일은 잊으라고 했지?”
드물게 프리실라가 얼굴을 붉히며 비죽였다.
쿤이 한 차례 웃고는 그녀와 악수를 하고 물러났다. 이번에는 당하고 말았지만 그녀 정도의 조력자는 또 다시 찾기 어렵다. 플루토와 숲의 여왕. 그리고 프리실라까지. 아무리 숲에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해도 당장의 방어는 될 것이다.
아, 그리고 강제로 취합시킨 쉐이드도 있다.
“세이혼, 준비는?”
“당장이라도 출발 할 수 있다. 수도로 복귀하는 건가?”
“일단은. 서부 연맹을 처리하려고 해도 지금의 병력으로는 무리지. 일단은 분열된 상태를 더욱 가속화 시킨 뒤에, 수뇌만 잘라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거 같다.”
“이간책을 쓰겠다는 건가?”
“머리가 사라진 이상 타락한 자들의 행동은 예측하기 쉽지. 군을 주도하여 위세를 올렸다면 권력욕이 상당하다는 의미 일 텐데, 그걸 남과 나누려 할까?”
서부 연맹의 병력은 수도와 남부를 비교해도 강한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건 아니다. 세를 분열시키고 몇 명 만 처리하면 일은 싱겁게 처리 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한 자를 분리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위치에 앉혀 둘 필요성이 있었다.
‘한 번에 집결시킬 명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모이는 이들은 모이는 이들 대로,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 대로 처리 할 수 있으니 편리하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이 풀려 갈 리 있겠는가. 아무리 신의 능력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해도.
“단장님—!!”
두두두두두두!!
그때, 숲 저편에서 누군가 말을 거칠게 몰아왔다.
앞선 이들이 검을 뽑아들자, 세이혼이 손짓으로 정지시켰다. 지금 달려오는 이들은 서부 연맹을 쫓아가라 명 해 두었던 척후조였다.
세이혼과 쿤 앞에 말을 세우고는 황급히 내려서는 입을 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진정해라. 서부 연맹 놈들이 다시 기수를 돌렸나?”
“아, 아닙니다! 이건 수도에서 날아온 소식입니다. 연락용 전서구가 엇갈린 터라 돌아오는 길에 간신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지?”
쿤이 다급히 물었다.
‘설마 남부군이?’ 라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당근을 던져주어 행동을 제약시켰다고는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확신하기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그들 역시 이단에 영향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입니다.”
그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제국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쿤은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
쿤은 즉시 병력을 수습해서 출발시켰다.
하지만 그렇게는 느리다. 프리실라에게 부탁을 해서 그와 아도란은 공간 이동을 사용했다. 거리가 멀지만 두 명 정도는 가능했다. 그녀와 그녀를 따라 숲으로 왔던 마법사들이 힘을 모았다.
“이걸 가지고 가세요.”
그렇게 떠나는 쿤에게 여왕이 작은 구슬 두 개를 내밀었다.
옥빛으로 빛나는 것이 겉면이 부드럽고 청량한 느낌이 가득했다.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 제대로 하지도 못했네요.”
“샘은 그리자의 봉인 때문에 쓰고 있으니 무리 아닙니까? 앞으로 받을 수 있는 보답으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죠. 이 구슬들은 샘의 밑바닥. 가장 깊은 정수가 담긴 물건이랍니다. 샘을 직접 사용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보물을……”
감탄을 하면서도 거부는 하지 않았다.
슥 받아든 구슬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안 그래도 샘을 사용하지 못해서 조금 불편했었는데, 이렇게 보물을 챙겨 갈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세상천지 온갖 난리가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무래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쿤, 조심하게.”
준비를 마치고 빛 앞에 서자, 세이혼이 어깨를 두드렸다.
세이혼 정도의 전력을 그냥 두고 가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마법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깨위에 올린 손을 툭툭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의 우정이 보기는 좋다만,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유지하는 것도 버겁다고.”
“그럼 숲을 부탁하겠습니다.”
“나야말로 아도란을 잘 부탁해. 사고치지 않게 잘 감시해 주고.”
생각해 보면 수도를 맡겼는데, 냉큼 날아온 것부터 사고다.
물론 덕분에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지만, 그의 행동이 종잡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맡겨 두세요.’ 그래도 그걸 그대로 말 하기는 그렇다. 쿤이 적당한 말로 둘러 두고는 아도란의 소매를 잡아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빛이 왕왕 거리며 몸 주변을 돌았다.
그리고 그 빛이 한 점으로 모여 주변을 검게 물들여 갔을 때.
쿤은, 공화국 수도.
자신의 집무실에 당도해 있었다.
#
“오빠~!!”
“통령 대리!”
쿤의 등장은 바로 전달되었다.
라라와 루루. 도른과 베이스 등이 곧바로 찾아왔다. 한 박자 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관리들도 속속히 모여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회의가 열렸다.
“소식은 들었다. 제국이 움직인다고?”
“아! 네, 그렇습니다. 현재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병력이 집결되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물경 20만에 달라는 지라 주변국들의 불안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0만이라니. 어마어마하군.”
“그마저도 국경 병력은 제외하고 소집된 숫자입니다. 만약 총동원령이 내린다면 50만도 가능하겠죠.”
과연 제국.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스케일이다.
쿤이 입술을 잘근 씹고는 다시 물었다.
“이유는 알아냈나? 그 정도의 병력이 집결된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을 텐데.”
“첩자들을 통해서 정보를 뽑아내고는 있지만 아직 뚜렷한 소득이 없습니다. 20만의 병력을 운영하면서도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터라……”
“타 왕국들은? 제국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군으로 응대하려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자칫 제국에 대적하는 모습으로 보여 공격당할 것을 저어하는 것이죠.”
“거인의 움직이면 개미들은 몸을 움츠린다 이거군.”
제국을 제외하고 가장 큰 세력을 지녔다 알려진 공화국 역시 병력으로 비교하자면 세발의 피다. 게다가 지금은 서부와 남부 세력이 따로 갈라져 응집되지 않은 상황. 만약 제국의 의도가 침공이라면 공화국으로서는 방어 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제국 측에 연락은 시도해 보았는가?”
“대리께서 안 계셔서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공왕은? 위급 상황이라면 공왕에게라도 재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그게……”
덜컥 하고, 분위기가 식어내렸다.
무언가 말을 잘못 한 거 같다. 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둡고, 쓰린 표정들. 고개를 휙 돌리고는 라라와 루루를 봤다.
둘 모두 눈가에 눈물이 달려 있었다.
“설마……”
“대리께서 출병하시고 얼마 안지나 타계하셨습니다.”
“짐을 다 내려놓은 듯 편하게 갔어요. 그래도 아픔 없이……”
“아!”
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망령제어와 의식의 검. 세상을 관통하는 법칙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고 어쩌면 공왕에 대한 치료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한 걸음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시도라도 해 볼만 하다 여겼는데, 이미 늦은 것이다.
공왕에게는 빚진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살리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조금만 더 빠르게 시도를 했다면, 무모하다 생각되어도 치료를 했다면. 이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슥. 그때, 라라가 손을 잡아왔다.
“오빠, 공왕은. 아버지는 편하게 떠났어요. 그 동안 자신이 지은 과오로 공화국이 갈라졌다 많은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거든요. 그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편히 쉴 수 있다고 기쁜 웃음을 지었어요. 그리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후회는 없다 하셨죠.”
“하지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공왕폐하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왔지만, 그 날처럼 편안해 보인 건 처음이었죠. 이 늙은이가 곁에서 조금 더 제대로 보필했다면 보다 빠르게 그 얼굴을 찾아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대리께서 실수하신 점은 없습니다.”
쉔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른 옷차림을 한 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공왕의 타계이후, 공직에 대한 마음도 모두 버린 건지 기도가 과거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쿤이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통령 대리가 그 위치에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저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통령께서도 자신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돕는 그 모습에 기꺼워 하셨죠. 명을 달리하셨다 하더라도, 분명 기쁜 마음으로 가셨을 겁니다.”
“적어도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 중 대리를 원망하는 자는 누구 하나 없을 겁니다.”
“그래요, 오빠. 아빠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 했어요. 그라면 공화국의 염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부디 곁에서 잘 보좌해 달라고.”
베인스, 도른. 그리고 루루까지.
장내에 모인 이들 중 공왕의 죽음으로 쿤을 탓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의회파와 공왕파의 분열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굴락의 침범으로 민생이 어지러울 때 이를 수습한 것이 바로 쿤이었다.
이 과정을 온전하게 지켜 본 이들이라면 한입을 모아 말을 했다.
쿤이야 말로 통령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이미 죽은 통령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대리라는 직함이 떨어지게 될 지금의 순간을 바란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 알았다. 적어도 지금은 이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겠지.”
쿤이 감았던 눈을 뜨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이다. 절차가 어찌 될 지 장담은 못하지만 아직 통령 대리의 위치로 있는바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그 자신의 권한이자, 의무였다.
탕. 쿤이 팔걸이를 치며 일어났다.
“제국으로 전문을 보내라. 공화국의 통령 대리로서, 면담을 요청한다고.”
이제는 앞으로 나갈 뿐이다.
※작가의 말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다양한 추측들이 나오는군요.
이런 추측들을 보는 것이 작가의 즐거움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그 중에는 ‘아 저것도 좋겠는데!’라는 것도 있습니다.
역시 사람은 저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른다 봅니다.
더운 여름. 몸 조심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