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에서 모든 이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땅에 내려왔다.
싸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파여진 땅과 탄화된 흙 등. 아마 누군가 이 자리를 발견한다면 간첩이 왔다고 신고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평소 보기 힘든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흔적을 천천히 밟으며 주변을 돌았다.
싸움의 복기. 이진혁과 차남혁. 그리고 주변 이들이 포함된 싸움의 흐름을 읽어나갔다. 통안의 능력은 이미 지나간 싸움을 현장에서 느끼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힘의 규모와 맞서는 자의 역량. 그 파괴력 등을 몸으로 측정 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
단순하게 파악하기로는 그렇다.
물리적인 공격. 총과 수류탄 등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망령제어를 포함한 보조 능력으로 견제가 가능하다. 문제가 되는 건 적의 내구력과 마법. 하지만 내가 확인한 부분에 한해서라면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다.
1분 30초. 아니, 1분 20초 정도.
그 안에 장내에 모여 있던 이들을 모두 주살하고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했지.”
만약을 고려하기는 했으나, 그 내면에는 인지하지 못하는 위기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즉, 눈으로 보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 적에게 있다는 것. 마법. 아니면, 이단으로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능력.
지금껏 신성력을 빌어 내가 능력을 갈고 닦은 것처럼, 적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차남혁이 갑자기 오염 받은 대지의 축복! 이라면서 바닥에 검은 장판을 깔아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 결국 예상하지 못하는 적의 능력을 예상하여 기습을 포기했던 것이다.
“만만치가 않군. 우리편을 모았다고 해도, 상대가 이 정도라면……”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서 흘려보냈다.
새카맣게 탄화되어 있었다. 각 신의 신도라는 자들이 특별한 힘을 사역한다고 해도, 이런 물리력에 부딪히면 재가 될 뿐이다. 예전에 죠엘에게 말 해 둔 몇 가지 방언을 조금 더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스럭……!
적? 순간적인 기척과 함께 맹렬한 기세가 장내로 내려왔다.
기척을 감지하는 것과 적이 나타나는 것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초월적인 빠르기. 즉시 몸을 뒤로 튕기고 아쿤을 불러와 앞으로 던졌다.
짧은 불꽃과 함께 아쿤이 튕겨 나왔다.
척. 바닥에 내려선 뒤, 곧바로 망령제어를 사용해 주변 잡기들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폭격. 검은 비가 내리고 폭음이 뒤따라 왔다.
……아직 아니다.
적의 기세는 여전하다.
의식을 집중하고 검을 소환했다. 아쿤은 이미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있었다. 뚜렷한 검이 그려지고 팽팽하게 당겨진 힘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제어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오오. 그건 맞으면 위험하다고, 인간. 조금 진정했으면 좋겠는데.”
그때,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의 망설임. 적이라면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상대의 등장은 기습이라기보다는 그저 등장. 적이라 상정한것이 조금 성급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장소, 이런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는 잠시의 텀을 두었다. 그리고 입을 떼었다.
“정체를 밝혀라.”
“통성명이라 이거군. 그래, 인간들은 어떻게 하더라……아. 이러면 되나?”
후욱. 바람이 불어왔다.
흙먼지가 좌우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에 적발을 길게 기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풍스러운 벨벳 예식 복에, 시대와 안 맞는 자줏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허리를 굽힌 채 나를 보며 웃었다.
“처음 보는군. 내 이름은 아르톤. 탐욕의 악마왕이네.”
이름에 걸맞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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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인가.
잠시 생각했다. 악마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짖을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렇게 일축 할 수가 없었다. 악마라면 이미 경험을 해 봤고, 더한 것들도 수두룩하게 만나봤다. 비록 그것이 현대가 아닌, 아노스의 세계라 해도.
“자자. 인사도 했는데, 그쪽도 소개를 해야 하지 않겠나?”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어. 가면은 괜히 쓴 게 아니라고.”
“오 이런. 신비주의라. 허울에 빠져있던 우리 누님이 보았다면 좋아 할 항목이군. 뭐, 좋아. 네 정체가 중요 한 건 아니니까.”
자신을 악마왕이라 소개한 아르톤이 입을 길게 벌리며 웃었다.
도드라질 정도로 뾰족한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악마왕이라니. 코스츔과 가짜 이빨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상대의 기세는 그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물었다.
“악마왕……게이트 너머에서 온 건가?”
“게이트? 아, 벨로스의 문? 인간은 그걸 게이트라 부르는 건가?”
“우리말을 쓰고 있는데, 단어는 다른 걸 차용하는 건가? 악마라면서 잘도 쓰고 있군.”
“이건 뭐 이곳 사람에게서 배운 거니까. 악마는 편하다고, 따로 공부 할 필요가 없어서. 하하.”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모습은 또래의 청년과 같다.
하지만 방심은 안 된다. 상대는 악마. 정체에 대한 의혹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무시 못 할 힘을 지닌 존재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넘어왔지? 아직 그곳의 생명체가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보고는 없는데.”
“하하. 뭔가 잘못 이해를 하고 있군. 우리 악마는 말이야. 기본이 정신체라고. 육체라는 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지.”
아르톤의 등 뒤로 배경이 흐리게 지나갔다.
육체의 규현화. 의식의 검과 같은 능력인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구축 할 수 있다면 나보다 한 단계 위의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아, 자꾸 말이 길어지네. 너 말이야. 아까 그놈들을 쫓고 있던 거 맞지?”
“……그건 왜 묻지?”
“어이,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그렇게 숨어서 노려보고 있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어. 태고의 악마를 추종하는 자들과 적대를 하고 있다면, 나는 결코 적이 아니니까.”
“태고의 악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음. 이건 우리 쪽 단어고, 익숙한 걸로 하자면 그리자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 균열의 권좌. 끝을 달리는 존재. 뭐,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라고. 우리 쪽도 시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 왔으니까.”
이단이다. 지금 이 악마가 이단을 특정지어서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이단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 존재가 없었다. 고룡, 하카림도. 숲의 여왕도. 헌데, 이렇게 우연히 만난 존재가 그걸 알고 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나도 태고의 악마를 쫓다가 그쪽을 발견하게 된 거니까.”
“자세히 설명을 해 봐. 어째서 악마가 그리자 안의 존재를 쫓고 있는 거지?”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지.”
“……뭐?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악마가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고?”
고양이가 물고기와 우정을 쌓는 게 더 그럴싸하다.
터무니없이 바라보자, 그가 손을 흔들며 대꾸했다.
“이건 말이야, 악마의 생리를 알아야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우리 악마는 본디부터 인간에게서 파생한 존재야. 인간이 없다면 악마도 존재 할 수 없다고. 내가 있는. 그러니까 네가 말 한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지금 인간이 고갈되었어. 악마들도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는 세계가 되었다고. 다행히 이 세계와 연결되어 숨통을 틔었지만, 하는 꼴 봐서는 이것도 오래 갈 거 같지는 않더군.”
“그래서 인간을 지키고, 너희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따라왔다?”
“정답. 이야, 말이 통하는 인간을 만나니까 이렇게 좋은걸.”
그가 입을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악마라는 점을 제외하고 보자면 웃음 많고, 흥겨운 청년에 불과했다.
“그럼 왜 아까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던 거지? 그 인간들이 네가 쫓는 존재의 수족임을 알고 있을 텐데?”
“흐흐. 그야, 그쪽과 같은 이유지. 무언가 강대한 힘이 숨어 있음을 파악하고 기다렸던 거지?”
“뭐……비슷하기는 하다.”
역시, 차남혁에게는 뭔가 숨겨 둔 힘이 있었다는 걸까.
“내가 게이트를 넘어와서 느낀 첫 번째는 이 세계가 너무 무방비라는 거야. 몇 명 특이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 뿐. 전혀 대비가 안 되어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세계와 같은 꼴이 날 뿐이라고.”
“그래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건가?”
“우리는 정신체이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을 잘 읽지. 너는 그들에게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어. 악마와 인간이라는 관계가 걸리기는 하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지 않겠어? 이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흠……”
말에는 막힘이 없다.
확실히 일리가 있기는 하다. 쿤과 힘을 합치던 쉐이드의 경우도 악마. 이단과 악마는 서로 협조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들이 힘을 모아 싸웠던 것처럼, 나도 이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내가 활동한 것이 하루 이틀인가?
이름 없는 자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인 적도 있다. 그때 접촉을 해왔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건 너무 우연이다.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게이트를 넘어온 뒤로는 계속 그리자의 존재만 쫓아다닌 건가?”
“뭐, 그렇지. 한 열흘 됐나? 나도 열심히 움직였다고.”
“열흘? 그 전에는? 게이트가 열린 게 벌써 이년도 넘었는데, 그 전에는 뭘 한 거지?”
“인간인 네가 이해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의 시간 축에 무언가 변동이 생겼어. 본디 우리는 인간이 멸종되고 난 뒤 힘을 모아 차원을 봉합해서 숨만 겨우 붙여놓고 있던 상태였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미약하지만 우리의 힘이 돌아오더라고. 우리는 정신체이기 때문에 시간축이 뒤틀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 바로 그 틈에서 힘이 새어나오고 있었어.”
“시간의 축……?”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악마왕, 아르톤은 쿤이 있던 과거에서 온 게 아니다. 이미 이단에 오염된 현대와 같은 시간축의 아노스에서 건너 온 경우. 즉, 쿤으로 있을 당시의 일이 내가 게이트 접촉을 끊는 것과 동시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쉐이드를 살려서? 타락한 고신을 처리해서?
아니면, 숲을 지키고 여왕을 보호한 덕분에?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 일이 시간축을 건드리고 개입하지 못할 악마들에게 힘을 되돌려 주었다. 어쩌면 전멸했어야 정상인 인간들 중 일부가 지금의 아노스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약인가 싶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좋아. 일단 네 말을 믿는다고 치지.”
“오, 역시 말이 통하는군.”
“하지만 아직 완전한 신뢰는 무리야. 적어도, 네가 진심으로 나와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까지는.”
“하아. 그럼 뭘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데?”
노예의 낙인.
그 말이 입가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서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상대의 힘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들이밀 수도 없고, 일단은 우군이라 예상되는 상황에서 굳이 벌집을 건드릴 이유는 없다.
“정보의 교류. 네가 아는 태고의 악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이만한 명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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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악마 유르고.
이것이 내가 아르톤을 통해서 알아낸 이단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이 이름 역시 후대로 넘어가며 붙여진 것일 뿐이고, 실제 그 탄생에 대해서는 악마들 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 하였다.
그래도 알아 낸 것은 몇 가지 있었다.
유르고의 존재는 정말로 까마득한 과거부터 있었으며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허나, 그 당시에는 아직 인간이 문명조차 쌓기도 전. 욕망이라고 해 봐야 단순한 것들 투성이었고, 사람 죽어나가는 수준도 악마들의 장난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유르고가 불러오는 타락이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유르고의 힘은 인간과 악마. 오랜 시간을 살아온 정령조차 가리지 않고 타락시켰다. 타락한 존재는 본래의 욕망을 쏟아내고, 본질에서 벗어난 이형이 되어 버렸다.
과거의 일어났던 일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단절된 역사로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살아온 고룡조차 그 시절의 일을 모르고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큰 재앙이 닥쳤는지는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리고의 등장이 한 차례 있고 난 뒤, 어느 순간 불쑥 그 존재가 사라졌다. 타락했던 악마와 정령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의해서 처리되고, 남은 이들은 근원을 찾기 위해 차원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찾아 낸 것이 지금의 그리자 형태의 유르고였다.
어째서 이런 형태인지. 겉을 감싸고 있는 그리자는 대체 무엇인지. 악마들조차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지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말만 악마들 사이에 격언처럼 남았을 뿐.
— 유르고는 무한(無限)하게 탐식(耽食) 존재. 욕망을 불태우고 남은 잿더미를 보고 웃을 뿐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같다. 자신과 같이 이치에서 어긋난 존재로 떨어뜨릴 대상. 그 끝에 남는 건 거울에 비쳐지는 잿더미들의 향연뿐이다.
악을 위한 세계도.
선을 위한 세계도.
이단에 의해 타락하는 곳에는 무엇도 남지 않는다. 욕망을 쏟아내고 난 잿더미 뿐. 아르톤이 남기고 간 말은 내 귀에서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두렵지 아니한가?
부활을 위한 죽음도 아니고, 갱생을 위한 타락도 아닌. 오직 어긋나기 위한 추락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밑바닥에 모인 존재들이 서로를 보며 비웃는……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흔하게 하는 말처럼.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작가의 말
이단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오늘은 시상식이 있는 관계로 예약연재~!
갔다와서 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