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89화 (189/240)

날 선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미 계절이 바뀌어 날씨가 선선해지고 있다. 일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더니, 요즘이 딱 그렇다. 하루하루가 촌각과 같으니 돌아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이러다가 어느 날 불쑥 미소가 찾아와 ‘아빠 나 결혼할래요.’라고 말 해도 이상하지 않다.

뿌득. 상상하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잘 잡아 바닥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잡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넓은 공터. 안산 부근에 위치한 인적 드문 장소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그 중 일부는 나도 안면이 있는 자들이다. 크랙의 일원들. 차남혁과 같이 이단의 종자로 파악되는 이들이 공터에 잔뜩 모여 있었다.

— 중요한 정보에요.

차준혁의 부름으로 그를 만났다.

그가 전한 건 일전에 있었던 계획과 마찬가지로 차남혁이 꾸미는 특별한 미팅. 카테고리 말미에 붙어있는 설명으로는 크랙의 회합과 정리라 되어 있었다고 한다. 평범한 회동처럼 보이는 내용. 하지만 차준혁은 이 카테고리가 다른 플랜들과 따로 떨어져서 특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고 전했다.

즉, 지금 이 회동이 차남혁에게 중요하다는 말.

끼익. 그 사이 공터로 차량 몇 대가 더 들어왔다.

하나같이 번쩍이는 외제차들이다. 포르쉐, 벤츠, 람보르기니 등……언뜻 보면 차량 박람회 같은 느낌이다. 크랙의 일원들이 대부분 젊으니 허세가 가득 들어있는 건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다들 모였군.”

선두에 선 차량에서 차남혁이 내렸다.

그 옆으로 몇 사람이 모여들고,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금세 정리되었다. 우두머리의 등장. 누가 이 무리의 대장인지는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었다.

“준비는? 말 한 건 전부 챙겨왔겠지?”

“으음.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잘 설득하면 그놈도 돌아서지 않겠어?”

“헛소리 집어치워. 이미 러시아 쪽과 접촉한 걸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말이야. 이렇게 뒤통수를 후련하게 쳐 주는데 그냥 있어야 되겠어?”

“……알았어. 애들한테 준비시킬게.”

팔다리가 긴 남자가 뒤로 물러나고, 앞서 대기해 있던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내, 공터 부근에 세워져 있던 트레일러에서 각종 무기를 내리기 시작했다. M16이나 K2같은 소총은 물론이거니와, 수류탄을 비롯한 폭탄류. 그리고 거치대가 마련된 중화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여기가 한국이 맞는 건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을 정도다.

이들이 이단에 영향을 받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행동을 취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용병업체를 고용해서 그들이 무기를 들었다면 이해 할 수 있는 바. 지금 장내에 모인 건 대부분이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세팅 끝났어. 근데, 이진혁. 그놈이 진짜 나타날까?”

앞서 말 하던 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진혁. 배우로 이름 날리는 유명인이며, 차남혁과 마찬가지로 크랙의 일원이었던 인물이다. 일전, 창고 습격 건에서 둘 사이에 무언가 균열이 있음을 파악 한 적이 있다. 지금 이 회동은 아마 그 균열의 종착지로 보인다.

“나타난다. 그놈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걸 알고 있으니까.”

“혼자 오지는 않겠지?”

“절대로. 어차피 그놈이나 나나 이곳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경쟁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 싸움에서 살아남는 자야 말로 강자인 거지.”

입술을 핥으며 차남혁이 웃었다.

그의 진면목을 본 거 같다. 차갑고 뱀 같은 얼굴이다. 평소 잘난 외모에 부드러운 미소로 감추고 있던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만큼 지금 주변에 모인 이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 손아래 두고 있다는 말과 같다.

“잘 들어 둬. 이진혁을 정리하고 창고의 물건을 모두 처분한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미국으로 뜰 거야. 알파에서 시설을 준비해 두었다고 하니까, 본격적인 일은 그쪽에서 진행한다.”

“국내는 버리는 거냐?”

“일단은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아마 그 ‘이름 없는 자’를 꺼려해서 그런 거 같다.”

내 이름도 나오고 있다.

지시라. 차남혁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면서 움직인다는 건가? 그렇다면 미국에서? 알파라는 조직에 차남혁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얘기일까? 속속들이 들어오는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까 주의해서 들었다.

“사업을 접고 미국으로 들어가면 대책이 생기는 거냐? 우리가 얻은 힘도 분명 대단하지만 그자가 보인 건……솔직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걱정 할 필요 없어.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분만 깨어나면 어차피 일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분?

차남혁의 말투에서 생각지 못한 공경의 느낌이 흘러나오고 있다.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모시는 분위기다. 차남혁. 오만한 사이코패스 새끼가 진심으로 충성을 받칠 만 한 사람이 있다는 건가?

“온다.”

그때, 차남혁의 목소리와 함께 장내로 차량 몇 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진혁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빛냈다. 둘은 서열 정리를 위해. 혹은, 아예 숙적의 처리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이는 중이다. 즉, 이 말은 곧 싸움이 벌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이 여럿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놈이 그놈. 서로 죽여서 숫자 좀 줄여주면 내 입장에서는 고맙다. 내가 인본주의자라서 살인은 안 돼요! 라면서 튀어나갈 것도 아니니, 지금 이 장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거 같다.

“이야~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차에서 내린 이진혁이 입가를 말아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옆으로는 척 봐도 러시아 사람으로 생각되는 인물 서넛이 서 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이 사람 두엇 정도는 손으로 잡아서 비틀어 뜯어버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왔군. 내 제의는 확인해 봤겠지?”

“호오. 그걸 제의라고 하나? 내가 점유한 시장을 모두 포기하고 네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애초에 내 도움이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권속을 늘리는 맛에 엇나가기 시작한 건 너 아니던가?”

권속? 사업이라는 말에 그리자를 통한 시장 점유를 떠올렸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존재했다. 내가 신성력으로 권속을 둘 수 있는 것처럼, 차남혁과 이진혁 역시 누군가를 권속으로 둘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건……조금 의외다. 이단이 수평적으로 퍼지지 않고, 수직적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건가?

“킥. 집어치워. 어차피 네놈은 일인자가 아니면 흥미가 없지 않나? 날 견제하기 시작한 그 때 부터 우리는 같은 곳에 설 수 없는 입장이었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쉽군. 그래도 네놈은 쓰기 편한 졸이었는데.”

“……건방진 새끼.”

이진혁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툭툭 불거져 나오는 혈관과 붉게 변하는 눈빛. 변이의 흔적이다. 하지만 완전하게 진행되지는 않고 중간 형태에서 멈춘 채 유지되었다. 마치 변이를 그가 제어하는 것 같다. 과거, 병기처럼 제작되었던 변이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근데 말이야. 차남혁 너는 나를 너무 쉽게 봤어. 고작 이 정도 준비로 나를 막을 수 있겠나?”

“머리통에 총알 박히면 누구나 죽는다.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맞는 말이야. 내가 이 힘을 깨우치지 않았다면 말이지—!”

그 순간,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이진혁이 차남혁에게 돌진했다.

양 팔과 머리위로 파충류의 비늘 같은 게 올라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차남혁 측면에 있던 남자 둘이 K2를 들어서는 냅다 갈렸다. 불꽃이 튀고 흙먼지가 날렸다. 반응사격이지만 이미 총구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었기에 대부분이 명중을 했다.

다만……

“차남혁, 넌 이래서 안 되는 거라고.”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중된 탄환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길게 찢어진 입으로 웃은 이진혁이 손을 뻗었다. 입고 있던 고급 정장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흉물스러운 발톱이 튀어나왔다. 짐승의 것.

콰콰콰쾅!!!!

그 짐승의 팔이 도달하기 직전, 그의 발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수류탄이다. 차남혁이 허리춤에서 이를 뽑아 아래로 던진 것이다. 반경에 자신이 들어있음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붉은 화염과 흙먼지가 만들어 내는 폭풍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라앉았을 때.

“네놈을 죽이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겠다!!”

“천년도 모자라다 머저리.”

두 사람이 그 사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로 입고 있던 옷은 넝마가 되었지만 육체에 가해진 충격은 거의 없었다. 둘 모두 붉은 비늘이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환을 막고 근접거리에서 터진 수류탄의 파괴력 역시 무마시키는 방어력.

지금까지 알던 이단의 변이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콰콰콰콰콰!!!!!

드르르르륵!!!

싸움은 금세 거칠게 변해갔다.

이진혁과 대동한 러시아인들이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서 달려들고, 차남혁의 부하들이 자동화기를 긁었다. 탄이 튀고 불꽃이 허공에 그려졌다. 폭음과 폭발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멈춤이 없었다. 이곳이 인적이 드문 장소인 것은 맞지만 대한민국 한 복판에서 이런 싸움이라니. 상식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이진혁이 달라붙어 몸과 머리를 분리하려는 인파이터라면 차남혁은 거리를 벌리고 싸우는 아웃 파이터였다. 총과 수류탄. 각종 화기 역시 시기 적절히 이용하며 이진혁을 괴롭혔다. 하지만 둘 모두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냐!?”

“멍청하기는. 그래서 네놈은 안 된다는 거다.”

“그따위 소리를!! 다시는 입을 못 놀리게 해 주……”

푸화아아악!!

이진혁의 발밑에서 검은 쇠사슬이 솟구쳐 그의 몸을 감쌌다.

솔직히 이건 나도 놀랐다. 저걸 대체 언제 설치했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 장소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음에도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사슬은 어떤 물리적인 장치의 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

그래, 놀랍게도 차남혁이 사용한 것은 마법이었다.

“그아아아아!!! 차남혁!!”

이진혁이 사슬에 묵인 채 발버둥을 쳤다.

몸이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점차 변이체의 형태를 갖춰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몸 안으로 파고들며 그의 살갗을 찢어갔다. 핏물이 세어 나오고 짓눌린 근육이 마치 오래 된 햄처럼 툭툭 튀어 나왔다.

“이래서 네가 멍청하다는 거다. 내가 네놈을 만나는데 겨우 이 정도 준비로 만족했을 것 같으냐?”

“이건, 이건 대체 뭐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리석어.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보물 창고와 같아. 힘의 단편을 얻었다고 그것에서 만족하고 멈춘 네 놈의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던 거다.”

차남혁이 비웃으며 손을 펼쳐 보였다.

금색 테에 검은 알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단순한 장신구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건 마법 반지다.

“크, 크으으으!!! 내가 당한다고 끝이 아니다!! 내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이진혁이 버둥거리며 외쳤다.

목숨이 간당간당하니 매달리는 게 겨우 배경이다. 어쩐지 구질구질해 보였다. 적이라 하지만 그래도 싸울 꺼면 확실하게 전부 다 내던지면서 싸우든가.

“알고 있어. 그러니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북반구 머저리들도 조만간 전부 정리가 될 테니까. 그 시작이 네가 될 테니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뭐, 뭐하는 거냐!?”

차남혁이 품에서 다른 반지를 꺼낸 뒤 갈아끼웠다.

그리고는 느리게 손을 뻗어 이진혁의 머리를 쥐었다. 버둥거림이 더 커졌다. 하지만 한 번 구축된 사슬은 절대 끊어지지 않았다.

“네가 가져간 힘을 회수해야지.”

“뭐……? 크, 크아아아아아!!!!”

검은 색 연기가 이진혁의 몸에서 뭉클뭉클 솟아오르더니 차남혁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독할 정도의 혐오감이 몸을 두드렸다. 저건. 저 연기는 이단의 정수다. 내가 신성력으로 정화 된 정수를 얻는 것처럼, 저 연기는 이단의 힘이 집약된 정수라 볼 수 있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속이 뒤틀렸다.

풀썩. 그 사이 연기는 사라지고 이진혁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미라처럼 말라 있었다. 힘이 전부 사라진 부작용이다. 차남혁이 입가를 비틀어 올린 채, 쓰러진 이진혁의 시체를 발로 밟았다. 마치 썩은 고목처럼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이걸로 하나는 정리가 되었군.”

이진혁을 따라왔던 러시아인들도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

차남혁이 사용한 것과는 다르나, 각기 다른 반지로 마법을 사용했다. 수많은 자동화기들은 그저 눈속임이었을 뿐이다. 싸움의 결과가 결정 된 것은 결국 준비의 차이였다. 힘을 믿고 날뛴 이진혁과 다르게, 차남혁은 상대가 모르는 비수로 폐부를 쑤셨다.

……나 역시 오늘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결코 알 수 없었겠지.

변이를 제어하는 모습과 마법 도구.

그리고 차남혁이 모시는 존재를 비롯해서 알파라는 그룹. 생소한 정보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났다.

주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내가 뛰어나가 차남혁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의식의 검이라면 적의 방어를 꿰뚫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법 반지처럼 숨겨 둔 수법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폐부를 꿰뚫는 비수가 내게 틀어박힐 수도 있다.

부르릉……!

공터의 차량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몸을 숨기고 있어야 했다.

어쩐지 진 기분이었다.

※작가의 말

이진혁 사망.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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