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서 일어난 쉐이드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몸을 나누더니, 흙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를 감쌌다. 물리력이 작동하며, 몸을 으스러뜨렸다.
쿵 하고 부서지는 소리로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전열을 정비해라!!”
백인장들이 선두에 나서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방패를 들고, 챙겨 온 물약을 들이켰다. 바닥에는 이미 축복이 깔려 있었다. 힘이 넘치고 용기가 샘솟았다.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단단한 검을 손에 쥐었다.
쾅. 흙에서 나온 몬스터들과 충돌했다.
상당한 위력에 병사들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공격은 단순하다. 막고 밀고 찌른다. 수백, 수천번의 훈련으로 몸에 익힌 동작이 나왔다. 일선과 이선이 합작하여 달려드는 몬스터를 처리해갔다.
후위에서는 궁수들이 크로스 보우로 화살을 날렸다.
전열이 뭉쳐 선두로 사용 할 수 없고, 후미에 처진 적들을 공략했다. 엘프와 숲지기도 도왔다. 그들의 마법이 넝쿨을 불러와 몬스터의 다리를 휘감았다.
‘잘 싸운다!’
쿤이 속으로 외쳤다.
갑작스러운 전투이지만, 아군의 대응은 매우 유기적이었다. 역시 경험 만큼 좋은 자산은 없는 법이다. 고된 훈련에 몇 번의 전투가 더해지자, 군의 대처에 더없이 능숙해졌다.
[하하하. 어리석을 뿐이다, 인간. 나는 숲의 왕. 이곳에서 내게 대적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노래와 같다.]
[시끄러워. 주둥이로 싸우는 거냐?]
[……건방진. 네 처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처음으로 오리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쿤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하는 투나, 돌아가는 분위기로 상대가 대충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있다. 엘프의 굴레 어쩌고 하는 걸로 봐서는 여왕에게 충성하는 엘프 본연의 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긴 모양이다. 자신이 통제하고, 우위에 서는 걸 즐기는 타입. 아예 그런 분위기를 안 주게끔 몰아치면 지금과 같이 성격이 나오는 법이다.
[엄마 젖이 모자라 징징 거리는 애새끼한테 당할 정도는 아니라서.]
쿤이 은색 넝쿨을 밟은 뒤 뛰었다.
양 허리에 달고 있던 단검 두 자리가 화려하게 돌려 오리쥬의 목덜미를 노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측면에서 움직인 넝쿨에 튕겨나갔다. 반응이 숙련된 검사 이상이다. 허나,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
아쿤에 의식의 힘을 실어 그대로 찍어 눌렀다.
키이이이잉—!
오리쥬의 앞으로 은색 막이 휘감기더니 의식의 검과 충돌했다.
힘과 힘이 엉켜 붙어서는 마구 헛돌았다. 은색 막은 집중 된 의식을 흐트러뜨리고 충격으로 쿤의 몸을 흔들었다. 한 번 대적해 본 것으로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였다. ‘약기는……’ 쿤이 입술을 잘근 씹고는 왼손을 내밀었다.
화르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프리실라가 남겨 두었던 마법 장갑의 힘이다. 식물은 기본적으로 불에 약하다. 이를 이용하여 틈을 만들어 공격을 이어가려는 속셈.
하지만 피어 오른 불꽃은 은색 막으로 흡수되더니, 곧바로 사라졌다.
막은 것도 아니고, 다른 쪽으로 흘려낸 것도 아니다. 너무나 쉽게 마법이 해체되었다. 오리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년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군. 어리석다, 어리석어. 겨우 그 정도로 이 몸과 대적하려 하다니!]
[일 절만 하자고.]
마력을 흡수하고 있다.
의식의 검을 흔들어 놓은 것과 아마도 이 힘의 영향인 것 같다. 쿤이 태연을 가장 한 뒤 허리춤에서 서리 물약을 뽑아서 오리쥬에게 던졌다. 그의 넝쿨이 당연하다는 듯 중간에서 이를 쳐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넝쿨의 끝자락부터 오리쥬가 서 있는 권좌까지 한꺼번에 얼어갔다.
[남자답게 일대일로!]
바닥을 찍어 발판을 만들고, 쿤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얼어붙은 넝쿨이 한 차례 요동쳤다. 냉기를 부수고 다시 움직이려는 모습. 허나, 한 번에는 불가능했다. 균열이 퍼지고 얼음의 파편이 튀는 사이, 쿤이 오리쥬에 근접했다.
‘의식의 검을 막는다 이거지.’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막.
어찌 보면 아랑겔과도 흡사한 능력이었다. 어쩌면 여왕조차 놀라게 만든 숲을 지배하게 만든 힘. 그 근원에 이런 능력이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샘에 깃든 어떤 초월적인 힘을 그가 지배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키릭. 발끝에 힘을 주어 몸의 자세를 바꾸고 아쿤을 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
축복으로 활성화 된 힘에, 신념의 증표로 고통에 내성을 걸었다. 얼음 파편이 살갗을 찢고 지나갔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오리쥬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은색 막이 모여들었다.
의식의 검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끼니, 확실히 어떤 흐름이 잡혔다. 초감각으로 파악하고 주변의 정보 흐름과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이쪽은 굉장히 강제적이라는 것 정도. 억지로 빨아들여서 제압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 상대의 힘이 견디기 힘들 정도라면 이를 역이로 이용하라.
세이혼이 수련을 할 때 했던 말이다.
물론, 그야 완력을 두고 한 말이겠지만 이 경우에도 적용 할 수 있다. 아쿤의 끝으로 의식을 발현하여 힘을 구현했다. 하얗게 밀려 올라오는 힘이, 즉시 은빛 막에 닿아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은 채 의식의 힘을 장막에 밀어 넣고는 몸을 밀착했다.
오리쥬의 얼굴이 약간 뒤틀렸다. ‘놀란 거냐?’ 쿤이 속으로 비웃고는 힘의 흐름을 역으로 가속시켰다. 쏟아지는 힘의 물결에 장막이 크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뭐든 과한 것은 좋지 않다. 한 순간에 쏠려버린 힘의 물결에 장막이 이겨내지 못하고 삐걱거린 것이다.
[네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알고 싶으면 수강료로 네놈 머리통이나 내 놓아라.]
균열. 과도한 힘의 집중으로 균열이 생겨났다.
쿤이 아쿤을 그 사이로 집어넣고는 비틀었다. 초감각과 하푼식 감각 수련법으로 어긋남을 읽는 감각은 세이혼에 뒤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생겨난 균열이 쩍 벌어지고는 이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휘리리리리……!!!
아쿤을 중심으로 부서진 힘의 파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대 흐름에 끼어들어 이를 방해 할 수 있다는 말은 주변의 힘을 제어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미 아랑겔로 죽어라 수련했던 몸. 이 정도는 발로도 할 수 있다.
[……너!]
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쿤을 상대의 가슴으로 찔러 넣었다.
다급히 불러온 넝쿨이 막아서 보지만 소용없다.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활짝 열린 가슴에 도달했다. 살점이 날리고 뼈가 부서지며 심장이 단번에 터졌다.
뻥 뚫린 구멍.
오리쥬가 잠시 비적이다 뒤로 넘어갔다.
쿵……!
전투가 멈추고, 소리가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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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쥬가 소환했던 몬스터들은 다시 흙이 되어 사라졌다.
병사들의 피해는 미미했다. 적의 숫자가 많기는 했으나, 주력을 쿤이 잡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찰과상 정도가 전부. 왕이라 소개하며 자신을 자랑하던 적의 모습 치고는 싱거운 결과였다.
“……”
그래, 너무 싱겁다.
쿤이 널브러진 오리쥬의 시체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너무 싱겁다. 여왕의 힘을 빼앗고, 샘을 지배하며 프리실라를 상대로 이겨낸 존재가 겨우 이 정도에 쓰러진다? 게다가 당장 들려야 할 경험치와 정수에 대한 알람조차 없지 않은가?
짝짝짝짝—!
그 순간.
박수 소리와 함께 마력으로 막혀있던 공간이 좌우로 열리며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선두에 있는 건 방금 전 쿤이 심장을 박살낸 오리쥬였다. 아니, 지금의 모습으로 판단하건데 그건 아마도 인형. 흙으로 만들어 두었던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일개 수하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단하군. 그게 의식의 검인가? 듣기는 했지만 상상 이상의 힘이로군.”
“……네가 진짜 오리쥬인건가?”
“맞아. 손님맞이를 위해 장난을 조금 쳐 봤는데. 마음에 안 들었나?”
“글쎄. 접대 받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쿤이 기습적으로 단검을 투척했다.
궤적이 곧바로 뻗어 오리쥬의 목을 노렸다.
탱……!
하지만 단검은 그의 목에 이르지 못한 채 튕겨 나왔다.
투명한 장막이 그의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 쿤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유동한 힘은 마력이었다. 오리쥬는 마법도 쓰는 건가? 그가 그렇게 의문에 고개를 기울일 때.
오리쥬와 함께 장막 밖으로 나온 인물들이 고개를 들었다.
“……!!”
쿤의 눈이 더 없이 팽창했다.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갔다. 이건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아무리 적이 세다고 해도 이런 일은 안 생기겠지.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마법사니까. 신비의 대명사인 마법사라면 아무리 곤란에 처해도 자기 몸 하나는 건사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텅 빈 눈동자로 서 있는 건 분명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 루아칸! 베놈!!”
남은 이들은 프리실라와 마찬가지로 최후의 문 소속 마법사들이었다.
시간을 봉인하여 그리자를 막고자 했던 이들이 되레 적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다. 하나 둘도 아닌, 마법사 셋이. 오리쥬라는 존재가 그렇게나 강한 건가? 쿤은 긴장감이 몰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군. 겨우 이 정도인가. 내가 그 동안 충성을 다 했던 여왕이라는 존재는.”
오리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찌릿한 기세가 밀려나와 쿤과 다른 이들을 밀어냈다. 이단 마력도 신성력도 엘프의 힘도 아니었다. 힘 자체가 가진 밀도. 그리자에 뭉쳐있던 이단의 힘이 오리쥬라는 인물에게 농축되며 주변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곳에 있으니, 바로 왕이더라.
쿤은 서 있는 오리쥬의 모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치겠군……’
이 위압감은 하카림의 타락의 일부에서 받던 것보다 월등했다.
힘의 농밀함은 말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작은 그리자에 타락한 존재들조차 자신을 초월한 힘을 사역하곤 했었다. 그런데,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의 그리자를 모두 수용했다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그 힘은 이미 비교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리쥬!!! 어째서 여왕님을 배신한 거냐!?]
라임이 이 지독한 압박감을 뚫고 앞으로 나섰다.
충성이라는 이름에서 가능한 거라면 대단하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오리쥬가 힐끔 시선을 주더니 말을 했다.
[배신?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어째서 이게 배신이라 생각하는 거지?]
[우리는 여왕님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힘에 타락하여 그 본분을 잊은 네가 배신자 아니던가!?]
[누가 우리의 본질을 정한 거지? 어째서 엘프는 모두 여왕에게 충성하고 살아야 하는 거지?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나?]
오리쥬가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시체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막이 사라지고 샘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정의 샘. 하지만 그 이름과 다르게 물은 탁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놈……샘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라임. 너는 귀를 좀 더 열고 사는 게 좋을 거 같다. 분명히 말을 했을 텐데? 샘은 이제 더 이상 여왕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힘으로 타락을 하여, 내 손아귀에 들어왔으니까. 과거의 굴레를 벗고 엘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
[어리석어. 그러니, 맹목적인 굴레에 묶여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엘프는 오래 전 샘을 남긴 고신의 맹약에 의해 탄생한 생명체. 숲이라는 건 결국 샘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에 불과하고, 여왕은 그 파수꾼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강한 힘으로 이를 지켜나갈 방법이 있는데 어째서 오래 된 것에 묶여야 하는 거지?]
[네놈은……네놈은 충성심이라는 것도 없는 거냐!?]
오리쥬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여왕을 가리켰다. 무형의 힘이 뻗어나가 그녀를 움켜쥐었다. 공간을 넘어선 물리적 제압. 이는 쿤이 사용하는 망령제어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이고 강제적이다.
[당장 그 손 놔!!]
[놓지 못한다면?]
[내 맹세코 네놈의 머리를……]
퍼석!!
라임의 머리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목 위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잠시 휘청거리다 아래로 쓰러졌다. 소리도 반응도 없었다.
수백의 사람이 주변에 있었지만 입조차 뻥긋거리는 이가 없었다.
[라임!!! 라임!!!]
오직 여왕만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을 뿐이다.
오리쥬가 냉막한 시선으로 시체를 잠시 바라봤다. 같은 종족이며 한때는 동료였던 자.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있었을 텐데도 그는 한 점의 후회나 가책이 없어 보였다. 시끄러운 벌레 한 마리를 털어 낸 얼굴.
까득……!
쿤이 이를 갈았다.
이단에 의한 욕망의 변화는 알고 있다. 그 격한 반응 역시. 드래곤조차 당한 것을 엘프가 이겨내지 못했다 해도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던 동료다. 어찌 이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가.
“네 죄는……”
“음?”
“신께서 심판하실 거다.”
[죄의 낙인]
흰 빛이 쿤의 손끝을 타고 모였다.
오리쥬의 머리 주위로 띠가 생겨났다.
그리고 허공에 만들어지는 죄의 저울.
“묻겠다, 엘프. 네 죄를 시인하는가?”
쿤이 신을 대신하여, 징치를 위해 고개를 들었다.
※작가의 말
이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