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이드는 흔히 그림자 몬스터라 불리는 종이다.
과거 악마와의 싸움이 끝나고 난 뒤 그 중 일부가 남아 어두운 숲이나 동굴 등에 서식하게 되었다. 은밀하고, 일반 무기로는 타격을 줄 수 없어 모험가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쉐이드가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검게 물든 하늘은 마치 장막이라도 펼쳐 놓은 듯 어두웠다. 화살이나 검으로는 쉐이드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잘 단련된 병사들이라 하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이건 우리가 맡겠다!]
라임이 나섰다.
크게 휜 곡도를 뽑아 들더니 대각선으로 그었다. 불꽃이 한 차례 튀더니 녹색 빛이 그 위로 맴돌았다. 꽤나 독특한 느낌. 신성력이나 마력과도 느낌이 달랐다. 숲의 보호를 받는다는 그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왕님을 위하여!]
— 여왕님을 위하여!
그의 말을 따라 엘프들이 재창하며 달려들었다.
녹색 빛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날렵했다. 마치 춤을 추듯 나무 사이를 거닐어 쉐이드의 그림자를 베어냈다. 비정형의 쉐이드라도 녹색 빛에 밀리자 힘을 잃고 무너졌다.
스물의 엘프는 삽시간에 쉐이드를 제거했다.
이 정도라면 앞선 싸움에서도 굳이 도움을 안 주었어도 도망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전투력. 쉐이드를 보며 놀랐던 것이 무안할 정도로 일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여왕이 경고했다.
쉐이드는 보통 하나 둘 정도로 움직이지 무리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런 쉐이드가 수십 구 이상 모였다는 건 이를 통제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과 같다.
쿤이 모르는 점을 그녀가 알려왔다.
“……!”
그리고 이내, 강력한 힘의 유동이 감각에 잡혔다.
초감각을 빗겨서 들어오는 쉐이드와 달리 이 존재는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일종의 시위와도 같았다. 쿤이 손을 들어서 사수들을 준비시킨 뒤, 아쿤을 단단히 쥐었다.
키르르르……
사람 서넛을 합친 크기의 그림자가 숲 너머에서 밀려왔다.
무거운 압박감이 쿤을 짓눌렀다. 그의 병사들 역시. 기가 약한 이들은 휘청거리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축복을 중복해서 깔아 두었음에도 이를 쉽게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축복을 걸지 않았다면 전부 쓰러졌겠군.’
특별한 존재는 숫자에 상관없이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있다.
쉐이드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어둡고 음습하며, 인간의 약한 부분을 찌르는 기운이 있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은 이를 견디지 못한다. 축복을 중복해서 깔며 이를 방어하고 있지만, 그런 쉐이드의 대장이라는 존재는 이조차 압박하고 있었다.
‘이놈이 이단을 조정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 뚜렷한 이단의 느낌은 없다.
게다가 비형질의 쉐이드가 이단에 영향을 받을지도 미지수다. 쉐이드에게도 욕망이 있는 걸까? 이 또한 확실하게 말하기 힘든 부분이었으니까.
……인간.
그대, 대장 쉐이드의 그림자 사이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요락의 진언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공용어였다. 바람을 마찰시켜서 말을 만드는 것이다. 몬스터가 대화를 거는 건가?
쿤이 경계를 하며 이에 응했다.
“말 하라, 그림자의 마물이여.”
“……우리 동포들을 더 이상 헤치지 말아 다오.”
“음?”
협박이나 강압. 악마다운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들려온 말은 그것과는 상이했다. 쿤이 미간을 좁히며 품 안에서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너희가 우리를 공격 한 것 아닌가? 어째서 이제와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우리는 너희가 적이라 생각했다. 그 어둡고 두려운 힘에 휩싸인 괴물이라고……”
“우리가 괴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엘프들은 그리자에 노출된 몬스터를 피해서 도망까지 쳤거늘!”
“그 전부가 우리는 아니다. 게다가 그 무서운 힘을 다스리는 자는 엘프가 아니던가?”
“엘프가?”
쿤이 깜짝 놀라 여왕을 돌아봤다.
죽네 마네 싸우다가 갑자기 대화를 이어가는 게 이상하지만 상대의 말은 지금 전부 진실로 들리고 있다. 지금 이 말을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엘프라니. 쉐이드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건 아니겠죠?
“확실합니까? 당신을 믿고 숲에 들어왔는데, 말이 달라지면 곤란합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아이들에게도 물어볼게요.”
여왕이 엘프들을 뒤로 물려, 쉐이드가 말 한 것들을 물었다.
라임이 펄쩍 뛰고, 요그문트가 강경하게 부인했다. 쉐이드의 말을 믿고 자신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불쾌하다는 얼굴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쿤에게 따지듯 외쳤다.
[인간!! 쉐이드는 악마일 뿐입니다! 그런 존재의 말을 믿고 우리를 의심하는 건가요!?]
[쉐이드는 진실을 말 하고 있어요. 적어도 지금 확인한 말에서는. 나는 되레 그쪽이 의심스럽군요. 정말로 상대의 배후에 엘프가 있다는 걸 몰랐다는 건가요?]
[우리 엘프는 여왕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배신은 하지 않습니다!]
외치는 라임의 말은 모두 진실.
하지만 이것으로 돋보기로 확인 할 수 있는 횟수는 모두 초과했다. 양쪽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정말로 적의 수뇌라는 자가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적과 내통하는 자가 무리에 있을 수도 있다.
‘난감하군.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단의 느낌은 없는데……’
엘프도, 쉐이드도 이단의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상황이 엇갈린 것뿐일까?
“인간, 그대가 어두운 힘의 존재와 싸우려는 거라면 나도 돕고 싶다.”
“……뭐?”
생각의 중간을 쉐이드가 파고들었다.
쿤이 벙찐 얼굴을 했다. 도움을 준다고? 방금 전까지 같은 동포를 학살한 무리에게? 인간과 악마의 괴리일까도 싶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악마는 악마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우리가 산 자와, 빛을 배척한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 법칙 하에서 이루어지는 일. 우리조차 두려움에 떠는 이 힘은 그 법칙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다. 악마의 본질을 거스르고, 그 존재 의의를 뭉개버리는 힘. 이를 막기 위해서라면 인간이라 하여도 손을 잡을 수 있다.”
“뭘 믿고? 설혹 그 말이 전부 진실이라 하여도 이제 막 만난 입장에서 어찌 믿는다는 거지?”
“나는 뒤에서 네가 싸우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 힘은. 어둡고, 두려운 힘과 상반된 성질을 지니고 있더군. 나는 쉐이드. 이면에 존재하며 그 길을 읽는 존재. 두려운 그 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림자의 심박수를 읽을 수도 없고, 이 말이 진실인지는 확실하게 판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쿤은 쉐이드가 거짓을 말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거짓을 말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만약 이 시도가 적에게 유도하려는 거라면 그 전에 파악 할 자신이 있었다. 이단이라면 고유의 느낌을 읽을 수 있으니까.
[인간, 설마 악마와 거래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라임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이단을 상대하는데, 돕겠다고 하는군요.]
[그걸 믿는 겁니까? 상대는 악마에요. 기만의 대가이자,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타락을 즐거워하는 존재입니다!]
[그야 알고 있지만, 적을 상대하는 것에 아군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들은 적의 수뇌 역시 아는 거 같고.]
[말 도 안 되는!! 엘프 중에는 절대 배신하는 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격한 반응.
쿤이 눈매를 좁혔다. 분명 엘프 중 이단에 타락한 자가 없다는 것은-적어도 라임 등의 생각에서, 진실이다. 하지만 이 격렬한 반응은 단순한 충성의 의지라고 보기에는 과한 부분이 있다.
[라임. 짚이는 부분이 있군요.]
[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지만, 엘프 중에서 배신하는 자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군요.]
[그건……]
이런 단순한 친구를 봤나.
그냥 슥 하고 떠 봤는데, 냉큼 걸려들었다.
[라임,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요?]
여왕이 엘프어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우리 중에 타락하는 자가 나올 리가……]
[그럼 짚이는 곳도 전혀 없다는 얘기겠죠?]
[여왕님……]
이렇게 당황 할 거면 아예 시치미를 떼던가.
짚이는 게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하고 있다. 정직해서 좋은 건지, 아니면 단순하기가 어린애 수준인건지. 쿤이 고개를 흔들고는 재차 물었다.
[확실하게 말 하세요. 진실로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곳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습니다.]
[……큭.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몬스터의 습격이 있기 일주일 전. 요정의 샘 부근에서 오리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걸 봤을 뿐입니다. 무언가를 계획하는 듯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눈여겨봤었죠.]
[오리쥬?]
[……정말인가요? 오리쥬가 저를 배신했다는 겁니까?]
여왕이 휘청거렸다.
요그문트가 황급히 다가와 부축을 했지만, 파리해진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리쥬라는 이름. 그녀에게 굉장한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대체 그가 누구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겁니까?]
[오리쥬는……여왕께서 낳은 첫 번째 자식의 직계입니다.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누구보다 여왕의 가까이서 보필하는 존재죠. 지금은 몬스터의 습격으로 명을 달리했다 생각하고 있지만, 라임의 말이 사실이라면……]
힘없는 여왕을 대신해서 요그문트가 답을 해 주었다.
[여왕님! 하지만 그가. 오리쥬가 배신을 했을 리 없습니다! 제가 들은 건 그냥……혼잣말이었을 수도……]
[그만하세요, 라임. 당신이 말을 꺼낸 건 결국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닌가요.]
[그건……]
[아아. 그러고 보면 이상했어요. 아무리 그리자의 힘에 몬스터들이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우리의 방어선이 그리 쉽게 뚫릴리가 없었는데 말이죠. 만약 그가. 오리쥬가 타락하여 길을 열었다면 무너진 게 이해가 되는군요.]
라임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여왕의 말대로 끝까지 부인하던 그가 오리쥬를 짚어냈다는 건, 누군가의 대화 이상의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의혹을 가슴속에 품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멍청하군. 그런 게 있었다면 미리 말을 하고 막았어야 하는데.’
여왕에 대한 충성보다, 엘프의 자긍심이 높았던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생각밖에 안 된다. 혹시, 만약. 이런 가정으로 한 집단을 지키는 것은 결국 이런 결과를 불러오는 법이다.
“여왕님. 어찌 할 생각입니까? 무리를 이끌고 있는 건 당신. 선택을 내려 주세요.”
쿤이 생각을 자르고 물었다.
아무리 여약한 여아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도 여왕은 몇 년이나 살아왔는지 모를 존재. 숲의 심장이며 엘프와 숲지기를 이끌고 있다. 쉐이드의 도움을 받아 이단과 싸우려면 그녀의 허락이 필요하다.
여왕이 요그문트의 팔을 풀고 두 발로 서서는 쿤을 바라봤다.
“그대는 저 쉐이드가 정말로 우리를 도울 거라 보는 겁니까?”
“일단 말에 거짓은 없더군요. 악마라는 게 걸리기야 하지만, 일단은 급한 불 부터 꺼야지 않겠습니까?”
“악마는 고래부터 사악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저 존재는 필시 해악을 몰고 오겠죠.”
“그때는 그 때 나름대로 대비를 하면 됩니다. 큰 적이 있다면, 작은 적과 손을 잡을 수도 있는 법이죠.”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쿤의 입에서 말이 술술 나왔다.
쉐이드. 사실 떨어뜨려 놓고 가도 무방하다. 도움이 되는 만큼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양면인 동전이라면 굳이 안 던지고 그냥 주머니에 넣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 하지만 쿤은 쉐이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이득일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
‘아니, 감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행운? 초감각? 아니면 신성력으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감각?
무엇이라 정의하기는 어려웠으나, 쉐이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이번 일의 향방을 좌우 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왕이 장고끝에 고개를 들고 쉐이드에게 다가갔다.
“악마, 쉐이드여.”
“말하라, 숲의 여왕.”
“그대는 본디, 우리와 적대하던 자. 정말로 그리자에 오염된 존재들을 쫓는 데 힘을 보태 줄 것인가?”
“선과 악. 빛과 어둠. 우리 존재가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의 대립은 무시 할 수 없다. 허나, 그조차 부인하고 흔드는 자가 있다면 잠시나마 손을 잡는 것도 가능하겠지. 너와 엘프. 숲지기 등이 좋은 건 아니나, 그래도 숲 자체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으니.”
쉐이드의 울림이 길게 이어졌다.
여왕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짧은 다리를 놀려 라임과 요그문트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했다. 결과는 승낙. 당면한 악마 보다는 숲에 숨어있는 이단의 존재가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에 동의를 한 것이다.
“자, 그럼 정리 된 거겠지?”
쿤이 묻고, 여왕과 쉐이드가 좌우로 갈라졌다.
인간과 신의 사도. 숲의 여왕과 엘프, 숲지기. 그리고 악마 중 하나인 쉐이드까지. 다 종족 연합군이 완성되었다. 바라는 것은 조금씩 다르나, 그 과정에 있는 하나의 목표는 동일했다. 그리자. 쿤의 말을 빌리자면 이단에 타락한 존재의 말살.
성전.
동화 속 빛나는 용사와 악마의 싸움과는 모습이 다르지만……
그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야생의 쉐이드가 동료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