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을 향해서 달려오는 몬스터의 이름은 그리울.
지능이 높고 손재주가 좋아서 무리지어 인간을 습격하곤 하는 몬스터다. 반면에, 상대가 숫자가 많고, 잘 정비되어 있다면 절대로 덤벼들지 않는다. 그것이 오랜 시간 뿌리박힌 그들의 본성.
하지만 지금은 그 조금 상황이 달랐다.
붉게 물든 눈에 입가로 흘러나오는 침. 딱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숫자는 아군이 배 정도 많음에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하푼은 앞으로! 후위는 사격을 개시하라!!”
쿤이 검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본래라면 기마를 운용하여 적을 유린하겠지만, 엘프 무리를 지켜야 하는 마당에 그건 무리였다. 그들이 프리실라와 친구고, 그리자를 지키던 이들이라면 분명한 동맹. 이곳에서 좋은 관계를 구축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뒤쳐지지 마라!!”
세이혼이 일갈을 하며 선두에 서서 달려 나갔다.
그 뒤로 하푼의 무리가 삼각 뿔 형태의 진형을 이루며 따라갔다. 지난 시간 세이혼의 격렬한 수련을 버텨낸 이들이다. 상대가 광포한 몬스터라고 해서 겁먹지는 않았다.
[성전의 축복]
[신성 대지의 축복]
쿤이 광역으로 축복을 사용했다.
대지를 관통하는 빛의 장판이 깔리고, 달려가는 무리의 몸 위로 하얀 빛이 내렸다. 모든 능력이 급격히 상승하고, 감각이 예리하게 변했다.
“저것이 신성력?”
놀란 여왕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 들어왔지만, 지금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쿤이 안장을 밟아서 위로 몸을 날린 뒤 무한의 주머니를 열어서 무사한 백기사들을 꺼내 들었다. 2만의 군세를 관통하고 몸 성히 복귀한 숫자는 약 스물. 흰 빛을 사방으로 뿌리며 전장에 합류했다.
— 키에에에에엑!!!
— 캬르르르르!!
세이혼이 선두에서 적과 충돌했다.
그의 장검이 협곡의 바람처럼 예리하게 움직였다. 궤적에 걸리는 것들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졌다. 핏물이 치솟고, 잘린 몬스터의 육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이대로 관통한다!!”
“오오오오!!”
탄력 받은 하푼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족히 이백은 돼 보이는 몬스터의 무리를 중앙에서 관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흉맹하던 몬스터의 모습이 안 돼 보일 정도로 파괴력이 대단했다. 검에 닿는 족족 목이 떨어지고 축복으로 강화된 전마의 발길질에 몸이 부서지는 것도 여럿이었다.
“……도와드릴 필요도 없군요.”
여왕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만이 아닌 다른 엘프와 숲지기들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울 이백이면 쉽지 않은 상대다. 그걸 단숨에 도륙하는 쿤 일행의 실력이 대단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 크아아앙!!!
도륙당하는 그리울 무리 가운데서 조금 두드러진 놈이 등장했다.
덩치도 크고 기세도 만만치 않다. ‘대장이군.’ 쿤이 곧바로 파악했다. 다시 말 위로 앉은 뒤 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남은 인원은 엘프를 보호하며 접근하는 무리를 상대해라!”
동시에 말의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푼의 돌진력은 대단하지만 일차 차징이 끝나고 난 뒤 선회하는 동안의 틈이 생긴다. 그 시간 동안의 적이 반격하지 못하게 하려면 머리를 자르는 것이 최선.
‘이번 기회에 한 번 실험을 해 보자.’
팔에 찬 아랑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랑겔의 힘은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착용자에게 전해주는 것. 다만 그 제어가 어렵고 아랑겔의 자아가 워낙 제멋대로인지라 폭주하기가 쉽다. 그 동안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가했지만 완벽한 제어는 아직까지도 불가.
‘다만, 짧은 순간이라면……’
윙. 바람이 몰려오는 소리와 함께 쿤의 주변으로 에너지가 유동하기 시작했다.
폭 넓게 말하면 에너지. 살아있는 자에 국한하면 생명력. 순간적으로 주변 생명력이 빨려와 가슴 뻐근할 정도의 힘을 부여해 주었다.
[캬하하하하하!! 싸움이다! 싸움이야!!]
동시에 막아 둔 아랑겔의 자아 역시 풀려났다.
시끄러운 목소리. 쿤이 가볍게 무시하며 가슴으로 몰려온 힘을 검으로 밀어 넣었다. 의식의 검은, 시전자의 의식을 현실로 구현하는 능력. 이는 혼의 제어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의지로 에너지를 제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의지로 에너지를 구현하지 않고 모아 둔 에너지를 의지로 조율하면 어떻게 될까? 심화된 네크로맨시와 초감각. 그리고 아랑겔을 통한 수련으로 쿤은 한 가지 방법을 깨달았다.
[죽여!! 죽여!!! 죽여!!!!!]
알았다고, 시끄러운 놈아.
쿤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으로 모인 힘을 의지로 구현했다. 사방에서 끌어온 에너지가 그 의지를 타고 구현화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
거대한 검이었다.
— 캬, 캬르르?
— 캬아아앙?
정신없이 달려들던 그로울 조차 한 순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 내려오는 그림자. 하늘높이 솟아오른 백색의 검은 광포화한 몬스터의 본능조차 잠시 당겨 올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니까.
‘3초. 이게 한계인가.’
쿤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정도 크기의 검을 구현하면, 3초가 유지 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 이상으로 진행되며 흡수하는 에너지를 조율 할 수가 없어 폭주해 버리고 만다. 입술을 잘근 씹고는 구현해 둔 검을 그대로 내리 그었다.
콰르르르릉—!!
보스 인 듯, 두드러진 기세를 내보이던 그로울은 떨어지는 백색 검에 그대로 깔린 채 절명했다. 주변 그로울들도 마찬가지. 일자로 떨어진 백색 기둥에 수십의 그로울이 한 번에 목숨을 잃었다.
펑. 그리고 곧이어, 구현해 두었던 백색의 검이 사라졌다.
“남은 잔당을 처리해라!”
조금은 힘겹게, 쿤이 외치자 그제야 멍하니 있던 이들이 반응했다.
“우아아아!”
“적을 몰아내자!!”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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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의 피해는 전무했다.
돌파한 하푼 중 부상을 입은 이들이 조금 있었지만 신성대지의 축복 위에서 잠시 대기하자 가벼운 찰과상 정도는 바로 치료가 되었다.
몬스터들이 숲을 벗어나 공격을 감행했다면 2차, 3차도 가능하다는 말. 일단은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었다. 쿤은 병력을 수습 한 뒤, 엘프 무리와 함께 숲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더 이상의 추격은 받지 않은 채 숲이 보이는 산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쿤, 어찌 할 생각인가?”
“고민 중이야. 프리실라가 숲에 남아 있다면 그녀를 도우러 가야겠지. 도움 받은 것도 있고, 그녀가 실패한다면 이단의 여파가 더욱 심해 질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부 연맹의 병력은 어찌 할 셈인가? 이대로 돌입하면 상대 할 방법이 없을 텐데. 아니, 만약이라도 방향을 틀어 숲을 우회해 수도로 진군하면 우리가 숲에서 헤맬 때 공격이 시작 될 수도 있어.”
쿤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들을 인지한 바, 이를 기회로 삼아 군을 수도로 돌린다면 쿤은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된다. 숲 속의 이단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군에 대한 대비 역시 포기 할 수 없다.
‘숲 안에 이단에 타락한 이들을 조율하는 자가 있다면 더더욱.’
어쩌면 그게 가장 큰 문제일수도 있다.
개별적인 욕망이라면 그에 맞는 수로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 중 이단에 타락한 이들을 제어 할 수 있는 존재. 즉, 더 높은 등급의 적이 나타났다면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아군을 괴롭게 할 수 있었다.
“……흠.”
2만의 병력. 수도의 병력으로는 방어만 간신히 가능한 숫자다.
만약의 경우 숲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 후미를 공격하면 그만이겠지만, 자칫하면 서부연맹의 진군에 다른 무리가 동조 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남부 필그람 가문. 이미 한 차례 문제가 생겼던 바 그들이 남부를 통합하여 군을 움직이면 상황이 난감해진다.
‘적어도 그건 막아야겠지.’
쿤이 품속에서 통령 대리의 인장을 꺼내들었다.
“세이혼, 수도로 서신을 보내야겠어. 적어도 서부가 진군을 할 때 남부의 움직임은 막아야 하니까.”
“어떻게? 남부가 순순히 움직여 주겠나?”
“결혼동맹을 요구한다는 건 적어도 전쟁 의사는 없다는 얘기야. 게다가 서부와 달리 남부는 필그람 가문 하나로 응집되지 않았어. 이것만 잘 제어하고, 서부에 응대하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는다면 내가 돌아가기 전 까지 버티는 건 충분하겠지.”
“오히려 나약하게 보일 수도 있네. 우리가 곤궁하다 생각하면 되레 큰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는 거야.”
“먹이만 잘 던져 주변 괜찮을 거네.”
세이혼이 걱정하는 부분은 잘 알고 있다.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득실을 논하는 셈 싸움. 반기를 드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돌아 설 수 있다. 그렇기에 돌아서는 것보다 나은 것을 던져 준다면 남부의 움직임을 제한 할 수 있는 것이다.
“남부가 원하는 것은 결국 관세와 중앙 진출. 로이 필그람을 중앙 관료로 불러오고, 그들의 공납하는 물건에 세금을 제해 준다면 우리 손을 들어 줄 거네.”
“……제정신인가? 그렇게 하면 다른 이들의 반발이 엄청 날 거네!”
“그러니 비밀리에 해야지. 거래를 하는 건 필그람 가문 단 하나.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 시선에 들어온 정리 대상 중 하나야. 서부의 문제만 해결하고 나면, 바로 정리에 들어 갈 셈이네.”
“약속을 저버리면 신망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네.”
“약속은 지켜. 하지만 죄 있는 가문을 벌하는 건 그것과 다른 이야기지.”
“……음.”
조금 불편한 듯 세이혼이 침음성을 삼켰다.
쿤이 그 모습에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어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다. 결국 손잡고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국가는 그냥 좋은 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과도 잠시 손잡을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런 놈들은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등 뒤에서 칼을 꼽을 놈들이니까.’
필그람 가문에 대해서라면 이미 조사 해 본 적이 있다.
남부의 유력가문 중 첫 번째에 꼽히는 곳으로, 남부 곡창지대의 절반가량을 소유하고 있는 가문이다. 계약한 공화국 내부 상회의 숫자도 많고, 타국으로의 거래 역시 활발하기 때문에 유동 자산 역시 한 손에 꼽힌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부의 대부분은 착취에 가까운 행적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왕정 시절 유지되면 노예를 불법으로 사용하고, 영세 가문을 힘으로 합병. 토지와 물자를 흡수하고, 중앙 의회 세력과 결탁하여 이를 합법으로 탈바꿈 시켰다. 중앙을 향한 로비와 지방 토착 세력과의 강한 유대로 인한 부패는 이미 남부만의 문제가 아닌 게 되었다.
“……알겠네. 지금은 자네 말이 옳겠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 두게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일을 정당화 시키지 말게나. 상대가 악이니 상관없다. 이런 마음이 반복된다면 결국 그 자신도 악과 동일하게 되는 거니까.”
“음……”
“나는 그런 이들을 여럿 보아왔네. 자네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
“내 곁에 충언해 줄 사람이 있으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네. 고맙군.”
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세이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말이 맞다. 상대가 악이라 해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필요한 바. 곁에서 이런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남자들의 우정을 보는 건 꽤나 좋군요.”
그때, 쉬고 있는 엘프 무리에서 여왕이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조금은 장난꾸러기 같은. 조금은 나이 많은 중년 여인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우리 쪽은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당신이 프리실라의 친구라면 우리와도 친구. 숲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싶군요.”
“여왕님을 피신시켜야 한다는 의견은 없습니까?”
“저는 숲의 여왕. 숲이 망가지면 의미를 상실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숲을 다시 살리고, 그리자에 오염된 종자들을 내몰아야 합니다.”
반짝이는 눈매로 여왕이 성토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다. 힘 역시. 하지만 공통된 적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카림을 타락시킨 것과 비등한 그리자가 숲속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를 조종하여 수족을 부리는 존재 역시도.
지금은 여러 가지 재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다.
“숲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을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여왕의 이름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군요.”
“단, 맨입으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책임져야 할 병사들도 있는데, 무작정 도와준다고 손을 뻗을 수는 없다.
“……바라는 게 있는 건가요?”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긴, 그렇군요. 당신들에게 숲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좋아요. 당신이 숲을 되살려 준다면 요정의 샘을 이용 할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왕님!!]
요정의 샘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언어로도 이해하는 듯 라임이 발작적으로 반응을 했다. 무엇이 됐든, 요정의 샘이라는 것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 쿤이 눈을 반짝였다.
“단순한 샘은 아닌가 보군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천년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숲의 정기가 모두 모여 있는 것이 바로 샘이니까요.”
“……정말입니까?”
“저는 거짓을 말 할 수 없습니다.”
돋보기로 살펴보니 확실히 진실이다.
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천년의 삶이라니. 그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런 힘이라면 신에게 공물로 바쳤을 때 어느 정도의 축복이 내려올지 기대가 되었다. 공물로 바치는 것들이 힘이 된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천년의 삶을 보장해 주는 샘의 물이라면……
“제안을 받아들이죠.”
망설일 이유가 없다.
※작가의 말
공모전 발표가 났군요.
응원해 주신 분들과, 축하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몸이 좀 힘들지만, 보답으로 연참을 가려 합니다.
다음 편에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