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의 군세에 비교하면 4백의 정병은 매우 초라한 규모였다.
하지만 선두에 쿤이 서 있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휘광을 몸에 감은 채 천신마냥 빛을 뿌리며 전진하는 그는, 숫자 그 이상의 위압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접근하는 거리만큼 병력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 뭐하는 거냐! 물러나지 마라!
긴 호른을 통해, 전장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
쿤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온가의 티셀이 붉어진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지만 그의 흥분한 모습은 충분히 파악 가능했다.
‘전체 병권은 그가 쥐고 있는 건가?’
2만이라 해도, 세세히 나누면 수십 개의 가문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다.
세력의 고하가 있다 한들 쉽게 병권을 남에게 내어주는 건 있기 어려운 일.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건데, 2만은 티셀의 목소리를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만큼 뛰어나거나, 무언가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쿤이 시선을 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당장 병력을 물러라. 그렇지 않다면, 공화국에 반하는 적대 행위로 인정하고 그대들을 반란도로 규정하겠다.”
“바, 반란도?”
“갑자기 반란이니, 무슨 소리야!?”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티셀이 말을 몰아 호위병력 몇 명과 함께 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고, 숲에서 나온 엘프 등은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 통령 대리의 권한으로 네놈들에게 분명히 경고를 했을 텐데? 군을 돌리지 않는다면 반역도로 생각하겠다고.”
“흥!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다. 그리고 네놈이 통령의 대리라니, 나는 도통 믿을 수가 없군. 세상천지, 어느 통령 대리가 전장에 직접 나온다는 말인가!?”
‘하긴 그것도 그러네?’ 등의 목소리가 군에서 흘러나왔다.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의미. 쿤이 코웃음을 쳤다. 서신을 무시 할 때부터 의도는 대충 간파하고 있었다.
“허면, 이것도 부정할 생각인가?”
쿤이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성전의 축복을 사용했다.
빛기둥이 떨어지면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그 점이 도움이 된다.
“비, 빛이다! 세상에, 신의 사도라고!!”
“서준경 교의 사도라면 통령 대리가 맞잖아!”
“저 빛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 분명하다고!”
병사들에게는 얼굴도 잘 안 보이는 통령 대리보다, 신의 사도 쪽이 더욱 쉽게 와 닿는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신의 휘광. 그 화려한 연출에 의심이 쏙 들어갔다.
“크윽……! 속지 마라! 저건 단지 속임수일 뿐이다! 사수, 장전!!!”
“정말로 반역도로 몰리겠다는 건가!?”
“흥—! 어디서 왔는지 모를 놈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전군 사격 개시!!”
쏴아아아아!!
티셀의 명령을 이어받아, 젠킨스가 호른을 불었다.
통령 대리인가……라며 걱정하던 이들도 일단 명령이 떨어지자 기계적으로 반응을 했다.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대뜸 쏘아버린 것이다. 하늘 위로 새카만 화살 장막이 펼쳐지고, 궤도의 정점에 오른 뒤 쿤 일행을 향해 급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군!”
쿤이 코웃음을 치고는 품안에서 검은 색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허공으로 던졌다. 구슬은 일정 높이에 올라가서는 화력하게 폭발했다. 빛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서는 주변을 검게 만들었다.
투두둑……!
화살은 장막에 닿는 순간 힘을 잃어버리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구슬은 ‘어둠의 장막’이라는 마법 도구다. 하카림의 창고에 있던 물건 중 하나로 동작이 정지해 있던 걸 드워프들이 되살렸다. 주변 빛을 빨아들여서 어둠의 장막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장막은 일정 수준의 에너지를 흡수한다. 공성용 발리스타가 아닌 하에야 화살 정도는 무난히 막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충전까지 하루가 필요하지만.’
한 번이면 충분하다.
충격을 먹은 사수들은 장막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멍한 얼굴을 했다. 화살 공격을 명령했던 티셀조차 잠시 동안 주춤했으니, 당연한 결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검을 내리고 물러나라!! 이 이상 적대행위를 이어가는 건 반란이다!!”
쿤이 말을 몰아 주변을 빙 돌면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뻗어나갔다. 빛으로 한 번 흔들렸던 병사들의 마음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가 십인 장에게, 십인 장이 백인 장에게. 위로 올라가며 상황을 계속 물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기마대는 뭐하고 있는 거냐!? 공격해!!”
“잘 생각해라! 너희가 충성을 해야 하는 건 이 국가인가, 아니면 눈앞에 있는 작자들인가!? 지금의 선택이 너희의 앞날을 정하게 될 것이다!!”
“공격하라고!!!”
티셀의 악 바친 명령에 따라 기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쳇. 거의 다 됐는데.’ 쿤이 아쉬움에 혀를 찼다. 조금 더 난장을 피우고 싶지만 이 이상은 어려웠다.
“세이혼, 측면으로 돌아서 적을 교란해라.”
“명을 받들지.”
두두두두—!
세이혼이 하푼의 병력을 이끌고 무리에서 이탈했다.
추리고 추린 전마가 땅을 밟으며 달렸다. 사전에 준비해 둔 약물과 쿤이 사용한 성전의 축복. 이미 평소의 배는 될 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돌격은 수배의 숫자를 지닌, 서부 연맹의 기마대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따라와라! 저 머저리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네—!”
쿤이 남은 병력을 이끌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보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쿤은 정면 돌격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퍼엉—!! 펑!!
특별하게 제조해 온 물약이다.
바닥이 진흙투성이로 바뀌며 그 위에 선 병사들을 끌어들였다. ‘우, 우와!! 이게 뭐야!?’, ‘살려줘!!’ 중장비를 착용한 선두의 병력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끌려갔다. 주변 병사들이 손을 잡고 끌어 올리려 해 보지만 무게가 상당한지라 쉽지 않았다.
“쏴라—!!”
쿤이 안장을 허벅지로 고정 한 채 몸을 돌리며 활을 사용했다.
드워프제 크로스 보우. 2연발이 가능하고, 아래쪽 탈착 식 화살 보관통이 붙어있다. 말 옆구리에 화살 거치함까지 달아 최대 백 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크아악!! 바, 방패를 들어!!”
“컥! 뭐야, 이건!? 방패가 뚫린다고!?”
“젠장! 둘씩 붙어!! 혼자서는 막을 수 없다!”
화살 촉은 정련한 적철로 이루어져 있다.
예리함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어, 크로스 보우로 쏘아버리면 철제 타워실드 이하 수준에서는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2만의 정병 중 철제 타워실드를 들고 있는 건 요원들을 보호하는 호위병들 뿐. 목재 실드를 겹쳐서 막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겁먹지 마라! 적은 고작 수백이야! 숫자로 밀어붙여라!!”
“숫자라 이거군!!”
쿤이 무한의 주머니를 열면서 안에 든 것을 밖으로 쏟아냈다.
순백의 갑옷을 착용한 기사들. 과거, 네크로맨서를 통해 얻었던 흑기사를 개조한 물건이다. 골렘 제조로 외부를 만들고 내부에는 마정석을 박아 두었다. 그리고 이 마정석은 망령제어로 쿤과 연결이 되어 있다.
“우, 우아아악!!! 저, 적이 더 나타났다!”
“세상에……이건 신의 전사잖아!”
“이런 적과는 싸울 수가 없다고! 나는 축복을 받지 못할 거야! 용서를 빌어야 해!”
순백의 빛을 토해내는 백기사의 등장에 무릎을 꿇고 전의를 잃는 적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쿤이 발하는 성전의 축복을 받은 백기사는 그야말로 신의 전사. 화려하게 타오르는 검을 들고 주변을 종횡했다. 그들의 검은 막을 수 없고, 화살을 쏘고 머리를 날려도 죽지를 않았다. 불사의 전사.
2만의 병력 가운데가 그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이익!!! 뭐하는 거냐!? 당장 일어나서 저놈들을 공격해!”
“하, 하지만 저런 존재와 어떻게 싸우라는 겁니까?”
“일어나! 머뭇거리는 놈들은 내가 직접 목을 베어버리겠다!!”
티셀이 명령을 내리고, 그의 의지를 받은 독전관들이 주저앉은 병사 몇을 베어버렸다. 전장에서 사기를 올리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건 공포다. 자신도 목이 베일지 모른다는 공포는 굳어있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해 주었다.
“으아아아아!!!”
“제, 젠장! 이래죽나 저래죽나!!”
2만의 군세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중간으로 파고 들어갔던 백기사들이 금세 포위가 되어 하나 둘 몸이 단절되기 시작했다. 죽기 직전 쿤이 망령제어로 재깍 회수를 하기는 했지만 다시 움직이기에는 손해가 꽤 많았다.
‘역시 물량 빨은 못 이기는군.’
사기의 이득으로 잠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역시 숫자 차이가 컸다.
쿤이 고삐를 돌려 상대의 외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어차피 수백으로 2만을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상대하는 존재가 신의 힘을 지니고 있고, 자신들이 반란을 저지르고 있다는 공포. 이 두 가지만 심어 둘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숲에서 나온 엘프 등은 예상했던 일이 아니다.
일단 적의 적은 아군. 접촉을 해서 상황을 묻고 가능하면 협조를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를 따라와라! 이곳을 벗어나게 도와주겠다!”
“Ποιος είσαι?”
쿤이 엘프에 인접하여 외치자, 생소한 언어로 답이 돌아왔다.
엘프의 언어. 보통이라면 당황하겠지만, 그에게는 요락의 진언이 있었다. 생소한 언어가 즉시 이해가 되어 뇌리로 번역이 되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싸움 한 복판에서 묻는 것 치고는 굉장히 태연하다.
쿤이 고삐를 당겨 병력을 세운 뒤 답을 했다.
[일단은 아군이라고 해 두죠. 싸움을 피하고 싶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인간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죽을 생각입니까?]
이 엘프 새끼……가 아니라, 엘프 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쿤이 엘프와 측면 병력을 곁눈질로 계속 살피며 인상을 구겼다. 한 차례 군세를 갈라놓은 덕분에 거리에는 이득을 취했으나 백기사가 무너지며 다시금 세를 정비하고 있다. 아마 조만간 다시 공격을 해 올 터. 그렇다면 쿤도 자칫 위험해 질 수가 있었다.
[우리는 숲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받지 않겠습니다.]
[숲이고 나발이고 더 싸우면 그쪽이 집니다.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부리고 따라 오시죠.]
[우리는……]
[그만, 라임. 지금에서는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습니다.]
다시 한 번 엘프가 부정하는 순간, 금발의 다른 엘프가 끼어들었다.
키가 굉장히 크고 피부가 징그러울 정도로 하얗다. 마치 시체를 깨운 듯 한 외모. 하지만 첨언한 내용은 쿤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요그문트! 인간을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라임. 우리를 돕기 위해 후방에 남아 준 이들도 인간입니다. 지금은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겠죠. 디-오, 그대도 동의합니까?]
요그문트라 불린 엘프가 묻자, 넝쿨로 몸을 감싼 숲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셋. 쿤이 볼 때 이 셋이 무리의 지도자격인 인물들이었다. 뒤에 늘어선 엘프 등은 그보다는 낮은 지위의 인물로 보였다.
— 한꺼번에 쓸어버려! 전군 돌격하라!!
그 사이, 티셀이 병력을 수습하고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군.’ 쿤이 입맛을 다시고는 고삐를 당겼다. 무리가 빙글 돈 뒤, 다시 화살을 전방으로 쏘았다. 약간 주춤. 하지만 전처럼 위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삼백이 쏘아봐야 2만의 군세에 비교하면 따끔한 수준이었다. 돌진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 캬아아아아아!!!!
— 크와아아아앙!!!
게다가 그 순간, 숲 안쪽에서 강렬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저릿할 정도로 위압적인 소리였다. 앞서 이야기를 하던 라임과 요그문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이들이 숲을 나온 이유가 어디에 기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제 뒤만 따라오세요!]
쿤이 크게 외친 뒤, 말머리를 돌렸다.
세이혼과 이미 약속을 해 둔 집결 포인트가 있다. 능선 건너편, 2만의 군세가 바로 쫓아오기에 조금 어려운 지역.
“성전의 축복!!!”
엘프 무리를 아군으로 인식 한 뒤, 다시 한 번 축복.
점수가 쑥쑥 빠져나가지만 아낄 때가 아니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빛들이 활력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 달려!!
— 잡아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으~ 본래는 연참을 해야 하는데, 제가 중이염에 걸려서 지금은 글을 통 못쓰고 있습니다.
일단 비축분으로 연재를 하고, 상태가 좋아지면 불같이 쓰겠습니당.
그 동안은 이걸로~!
* 중이염 걸렸을때 고기 먹어도 되나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