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74화 (174/240)

펼쳐진 지도 위로 나무를 깎아 만든 말들이 늘어서 있다.

지형은 수도가 포함된 공화국 일대의 모습을 나타냈다. 동그랗게 표시된 것은 수도. 그 좌측, 서부 지역으로 뭉쳐있는 말들은 적의 군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2만이라니. 이것들이 미친 건가?”

쿤이 중얼거리며 서쪽에 놓인 말들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 도른이 가지고 온 소식이 이 일의 발단이었다. 내용인즉슨, 서부 유력가들의 연합이 병력을 집결. 수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전에도 치안 문제로 병력이 동원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2만이라는 병력은 여차하면 수도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서신을 보내 봤지만, 아직 답이 없습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도 당장 수도 방위군을 집결시켜야 합니다.”

“작센, 치안 유지를 위한 인원을 제외하고 병력을 모으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겠나?”

“최대 5천까지 가능합니다.”

작센이 각 잡힌 모습으로 대꾸했다.

그는 통령 대리로 쿤이 임명되고 난 뒤에도 자리를 보존한 몇 안 되는 고위직 인물이었다. 재무대신이나 오델과 다르게 굴락과 협약하지도 않았으며, 일단 기본적으로 책무에 어긋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효했다.

“인근 도시에서 병력을 불러오면 숫자는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지방군 말인가.”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국경에 주둔하고 있고, 방위병력을 제외하고는 각 지역에 상주하는 병력이 집결되는 형태로 군이 유지되고 있었다. 과거 왕정시대부터 이어지는 형태로, 평시에 군 유지비가 적고 농사에 활용되는 등 이득이 많지만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힘이 상당히 약했다. 그 탓에 과거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소수의 군벌을 제외하고는 속절없이 쓸렸던 것이다.

“추수절도 끝났으니, 무리는 없을 겁니다. 각지의 유력가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시점이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제압을 해야 합니다.”

“잠시 기다리게. 겨우 내전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군을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민심이 동요 할 위험이 있어.”

“하지만 2만입니다. 그 병력이 수도로 진군한다면 막는다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진군이라. 세이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하푼의 대장으로 자리한 세이혼이 질문에 고개를 숙였다.

작센을 비롯한 장내에 위치한 책임자들이 그의 입에 집중했다.

잠시 생각하던 세이혼이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2만이라는 보고. 어디서 들어온 겁니까?”

“서부 지역 최대 규모의 성, 잉그람에 잠입중인 첩자가 보내온 정보입니다. 잉그람 주변으로 모여든 군세가 2만에 육박한다고 하더군요.”

“잉그람이라……”

세이혼이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뒤, 지도 위를 눈으로 살폈다.

“세이혼 경, 무언가 잘못 된 점이 있습니까? 2만의 병력입니다. 집결하고 동진한다면 우리를 노리는 것밖에는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도를 보세요. 만약 서부의 연맹이 병력을 집결시켜 수도를 노리고자 한다면 어디에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습니까?”

“……테오도른이겠군요.”

“네. 지대가 넓고, 식량 비축이 가장 많은 곳이죠. 게다가 수도와의 거리도 가장 가깝고, 진군을 위한 길 역시 제일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굳이 먼 거리의 잉그람에서 집결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이혼이 말을 움직여 테오도른에 위치시켰다.

확실히 잉그람에서 출발하는 모양새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명령체계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터너 지역의 지방 총독이 잉그람에 거주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병력을 모은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거면 진군 방향이 남쪽으로 이어져야 정상입니다. 지금 방향으로 움직이면 군이 어디에 닿는지 알고 있습니까?”

“요정의 숲……”

잉그람의 동쪽. 그리고 수도의 서쪽으로는 ‘요정의 숲’이 굉장히 넓게 위치해 있었다. 만약 이를 피해서 움직일 거였다면 확실히 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옳았다.

“숲은 관통해서 움직이려는 건……?”

“무리입니다. 2만이나 되는 무리가 숲에 들어선다면 그 자체로 피해를 입고 들어가는 격입니다. 생각이 있다면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죠.”

“숲의 마물을 말 하고 있군요.”

“거리와 보급 상 더 좋은 곳이 있음에도 굳이 잉그람을 택했고, 돌아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요정의 숲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무리 봐도 수도로 진군하는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덜그락.

세이혼이 서부에 집결되어 있던 말들을 옆으로 눕혀 버렸다.

“하지만 수도가 아니라면 2만이라는 병력이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까?”

“잠깐. 병력이 집결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라 했지?”

“보고서가 도착한 시간을 고려해 보면 2주 전이라 생각됩니다.”

쿤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하다, 도른을 향해 말했다.

“2주 전, 잉그람 일대에 대한 보고서를 전부 가지고 와.”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아주 사소한 거라도 빼지 말고 싹 다 가지고 와.”

조금 의뭉스러운 명령이라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번복할 분위기는 아니다.

도른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 밖으로 움직였다.

‘2만이 그냥 움직일 리는 없어.’

쿤의 눈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

잠시 시간이 지나고 도른이 보고서 더미를 들고 들어왔다.

쿤이 이를 바닥에 쏟아 둔 채 엄청난 속도로 읽어갔다. 높은 지능과 정리의 달인. 그리고 사고에 관련된 특기들이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손에 보고서 하나를 쥐고 슥 본 뒤 뒤로 던지기를 반복했다.

“역시……”

그렇게 도른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전부 독파하고 난 뒤 쿤이 중얼거렸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이걸 확인해 보게. 2주 전부터. 아니, 아마도 그 전부터 시작되었겠지. 몬스터가 인근 농가를 습격하였다. 창고가 부서졌다. 울타리가 손상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숫자의 습격 보고가 올라오고 있어.”

“……음. 확실히 그렇군요. 그 이전의 보고서라면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빈도가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도른이 머리를 툭툭 치며 답을 했다.

“잠시 만요, 통령 대리. 그렇다면 2만의 병력이 몬스터 소탕을 위해 움직였다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모한 추측 같습니다. 2만의 병력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물자가 소모됩니다. 소규모 자경단으로 처리할 일을 군에 맡길 정도로 상대가 어리석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뇨, 작센 대장. 몬스터 무리의 규모는 둘째 치고 다른 의도가 섞였다면 충분히 가능 할 것도 같습니다.”

“무슨 의미지?”

“수도 인근의 통합과, 북부의 쇄락으로 서부 지역의 민심도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빨리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삶이 정상화되기를 바라고 있겠죠. 하지만 기껏 야심을 드러냈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머리를 숙이는 건 서부 유력가들에게는 못마땅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도른이 서부 일대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민심을 돌릴 수 있는 건 어떤 게 있을까요? 돈? 수도에 비하면 조촐합니다. 식량? 이도 통령 대리의 힘으로 처리 된 지 오래죠. 다른 물자도 낫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수도에 비해 서부 일대가 가진 장점이 없죠. 하지만 단 하나는 보다 강하게 어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군사력.”

“네. 서부는 인접 국경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둔병력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모아 무력시위를 하며 시민들을 괴롭히는 몬스터를 소탕한다. 민심을 진정시키며, 수도에 압력을 가할 수 있고, 서부 유력가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돌 하나로 세 마리의 새를 잡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가 정리를 끝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2만이라는 병력. 확실히 들어가는 물자와 소비 에너지가 엄청나다. 하지만 그가 거론한 이유 때문이라면 이를 충분히 감수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이라도 이에 우리가 반응하여 군을 움직인다면, 아마 적대적 진압이라 선동을 하여 서부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겠죠.”

“그래서 응답이 없던 거군.”

“정황상 확실합니다.”

“……흠.”

상황은 앞뒤가 맞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병력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만약이라 이거군.”

“네. 셋의 이득을 보았다 해도, 군의 움직임이 없다면 정말로 무모하게 숲을 돌파하여 수도로 진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수도의 방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자칫 위험 할 수도 있습니다.”

유도하는 공격이라는 걸 알지만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수.

확실히 대단한 계책이었다.

“통령 대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 안, 모두의 시선이 쿤에게 쏠렸다.

상당한 압력이 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선택 하나로 수천, 수만이 움직이고 어쩌면 전쟁까지 발발 할 수 있는 상황. 일개 용병으로 살아왔던 그에게는 비슷한 경험조차 존재하는 않는 일이었다.

쿤이 눈을 감았다.

‘요정의 숲이라……’

분명 프리실라가 가 있는 곳도 요정의 숲이라고 알고 있다.

숲의 여왕이 그리자에 대항하여 애를 쓰고 있는 곳.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받았던 연락에 의하면 싸움이 점차 가열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몬스터 습격은 그리자에 의한 여파일지도 모른다.

변이된 몬스터의 일부가 숲 밖으로 나가서 마을을 습격했다면 딱 맞는 말이니까. 그렇다면 지금 요정의 숲은 굉장히 험악한 상황임을 추측 해 볼 수 있다. 2만의 군세가 숲으로 들어간다고 무사히 살아 나온다고 장담 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2만의 군세가 그대로 이단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인간만큼 욕망에 충실한 존재는 없다. 숲의 여왕과 프리실라 등이 간신히 막고 있던 균형이 그들에 의해서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쿤이 눈을 떴다.

“수도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서부 지역에 내 서신을 뿌려라.”

“서신이요?”

“요정의 숲에 몬스터가 출몰하니 그 토벌을 수도에서 직접 진행하겠다. 서부의 병력은 당장 해산하여 돌아가라. 그렇지 않는다면 반란으로 여기고 진압에 들어가겠다.”

“아! 토벌 명분을 저희가 가져가겠다는 거군요? 하지만 저들이 받아들일까요? 아무리 병력을 소집한다고 해도 우리 쪽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성전이다.”

“네?”

“민중의 의지를 무시하고, 안정을 무시하는 바. 나, 쿤은 통령의 대리이자 서 준경 교의 사도로서 이를 좌시 할 수 없다. 그리하니 이것에 반하는 자는 교단의 적으로 간주한다.”

도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건 과한 수다. 성전이라는 것은 자칫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수단. 하지만 그건 쿤도 잘 알고 있다. 이건 상대가 둔 수에 대한 맞수. 일종의 대항마다. 전쟁에 대한 위협으로 나온다면 같은 걸로 대응하는 것.

“세이혼, 하푼의 병력을 대기시켜. 서신이 전해지고 서부 병력의 반응이 없다면 우리가 직접 움직인다.”

“수도의 병력은 두고 말입니까?”

“성전의 시작을 원한다면 그 효시는 신의 힘으로 보여주는 것이 낫겠지.”

1만의 병력보다 하나의 소문이 더 무서울 수 있다.

신의 힘. 숫자와 상관없이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다.

“움직여라. 시간은 적이 숲에 당도하기 전.”

이단의 아가리에 머리통을 들이밀기 전까지다.

#

우뚝 선 신상.

저울을 손에 들고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다. 균형을 의미하는 서 준경 교의 심벌이다. 각 제단이 있는 곳에 세워지고, 신전 공사 중인 지역에 모형으로 제공된 모습. 그 원형이 되는 것은 수도의 지하. 하카림의 동굴 속, 드워프들이 만든 신전 안에 비치되어 있다.

“서 준경 신이시여. 제게 용기와 믿음을.”

쿤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다.

공물을 바치는 것 말고도 신에 대한 경배를 위해 몇 가지 만들어 둔 예식이 존재한다. 지금 이 모습이 그 중 하나.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한 뒤, 자신을 신에 비추어 저울이 기울어지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저는 아직 미약합니다.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과연 제가 이런 위치에 있어도 좋을까. 당신의 사도로서 그 권위를 함부로 사용해도 될까. 끝없는 의문의 소용돌이에 하루도 쉬이 잠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쿤이 토로했다. 부담감. 없을 리 없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해도, 공화국 전역을 다스리는 위치다. 수많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하나의 선택으로 많은 결과가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입장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리에 휘둘리거나, 포기하고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다.

“제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제 저울이 기울어 지지 않았는지. 헛된 욕망에 마음이 타락하지 않았는지 항상 살피고 보살펴 주시기를. 미약한 종은 그대가 남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변하지 않는 얼굴의 가면을 쓸 수 있습니다.”

쿤이 머리를 깊이 숙이고 마음을 쏟아냈다.

흰 빛이 그의 몸 위로 내리고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치 춤추듯. 지하, 닫힌 신전의 공간 안임에도 마치 들판에 앉은 듯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쿤이 희미하게 웃었다.

신은 멀리서 바라보지만, 온전한 마음에는 항상 응답을 해 왔다. 지금도 그러했다. 수많은 특기와 스킬. 힘을 위한 보살핌보다 이런 한 줄기 바람이 더욱 와 닿는다. 정말로 누군가에 의해서 지킴을 받고 있다는 느낌.

고개를 들고,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렸다.

끼익—!

신전의 문을 열고나서니 세이혼이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됐다.”

“음.”

쿤의 얼굴은 천년 바위와 같이 굳건했다.

※작가의 말

잘 보이나용?

잘 보이게 해 주세요!

비나이다~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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