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
“아빠, 시원해요?”
“역시 우리 딸 손이 최고다.”
어깨로 전해지는 미소의 손길이 시원하다.
힘이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조물조물 거리는 손길 자체가 좋으니까. 이대로 한 잠 푹 자고 일어나면 꿀맛 일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겠지.
“오늘도 늦게 들어와요?”
“미안, 딸. 아빠가 요즘 너무 늦게 들어오지?”
“에이 괜찮아요. 일 때문에 그러는 걸요. 그리고 오늘은 소유가 와서 같이 놀아주기로 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
“그래. 내가 나중에 근사하게 한 턱 낸다고 해 주고.”
제임스를 따라 연구실을 습격하고 난지 이틀이 지났다.
당시 배양실에 있던 사람 중 이단에 의한 오염도가 낮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건물 아래에 묻어 버렸다. 건물 붕괴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초감각으로 전해지는 건물의 중심축을 의식의 검으로 베어내면 되니까. 약간의 힘과 요령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단에 오염되지 않은 일반 직원들은 미리 경고를 해서 내보내고, 밖으로 도망치고 난 뒤 마무리를 해서 붕괴를 시켰다. 망령제어를 과도하게 쓴 덕분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그냥 두고 싶지가 않았다. 내 분풀이 겸 상대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확실하게 아작을 냈다.
물론, 필요한 정보는 남아있던 연구직 직원을 협박해서 챙겨두었다.
딱히 필요할까 싶지만, 상대가 변이체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아 둔다면 이를 파훼하는 수법을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아빠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쪽. 하고 볼에 뽀뽀를 한 미소가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역시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거 한방이면 체력 충전 완료다.
팔을 걷어 부치고는 죠엘과 약속한 장소로 이동을 했다.
연구실에서의 싸움이 끝난 뒤 제임스는 ALS치료를 죠엘 쪽으로 선회를 했다.
당연한 결과다. 그런 걸 보고도 손을 뻗을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와 한 가지 협약을 맺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일종의 침공이라 이겁니까? 하. 이거 직접 봤으니 부인도 못하겠고, 미치겠네.”
“이해한다. 하지만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인간의 욕구를 증폭시켜 수족처럼 다루지. 이미 상당수의 인간들이 그들 손에 들어가 있을 거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내게 바라는 점이 있다는 거겠죠?”
“그래. 나는 네가 가진 힘이 필요하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분의 힘 하나로는 부족해.”
“……이름 없는 자. 그의 곁에는 당신과 같은 추종자들이 여럿 있는 겁니까?”
“글쎄. 네가 정말로 우리 쪽에 설 수 있다면 알게 되겠지.”
일종의 전략적 동맹.
나는 ‘이름 없는 자’의 추종자로 신의 힘을 사용해, 치료약 개발을 돕기로 하고 그는 외적으로 나를 돕기로 약속을 했다. 국제적 네트워크의 사용과 인맥의 활용. 게다가 타이쿤과 제휴를 맺어, 내 사업의 교두보가 되어 줄 수 있다.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거래.
이름 없는 자의 활동 외적으로 다른 힘이 필요하다 여길 때 잘 나타나 주었다. 그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이를 치료하는 대가로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속물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는 상대의 세력이 녹록치 않다.
지금은 얻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얻어내야 한다.
“……됐군.”
몇날 며칠이곤 밤을 꼬박 새어 만들어낸 이 조합법처럼.
“허허. 거사께서 드디어 성공을 했군요.”
“이게 저 혼자만의 성과이겠습니까? 스님께서 잘 도와주신 덕분이죠. 수고 많았습니다.”
최초, 샘플로 고안했던 것보다 월등한 재생력의 조합물을 만들었다.
연구실 테스트 결과 파괴되는 운동세포를 복원하고도 남을 정도의 효력이라고 한다. 문제점은 ALS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못해서 평생 동안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죽지 않는 것이 어디겠는가.
“죠엘, 제임스한테 전화를 넣어 줘.”
“어떻게 하려고? 정식으로 허가 받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 할 텐데.”
“서정 씨한테는 바로 투약을 할 거야.”
“……허가도 없는 약을?”
“수순을 바꿀 거야. 그녀에게 먹이는 건 혜허가 가지고 온 약물. 그 물을 먹고 서정 씨가 치유되면, 우리가 이를 바탕으로 신약을 만들어 내는 거야. 그리고 이 지원은 제임스가 맡게 되는 거지.”
“아!”
모든 절차가 다 끝난 약으로 고서정을 구하려 한다면 늦는다.
일단은 혜허가 가지고 온 약이라는 것으로 기적적인 효과를 보게 한 뒤, 그 성분에서 신약에 필요한 데이터를 얻었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같은 물질을 쓸 거니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신약 개발에 대한 바탕도 생기겠네.”
“그러니까, 일단 결과 데이터는 보류를 해 둬. 한 일주일 뒤부터 연구에 들어가는 걸로 해 두면 될 테니까.”
“오케이. 그럼 바로 제임스 씨한테 연락을 해 둘게.”
그럼 제임스를 보러 갈 때인가?
이틀 만에. 이번에는 가면 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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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좁군요. 설마, 그날 이야기 했던 죠엘이 제가 아는 사람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죠?”
“붙어있는 건물을 쓰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게이트 관련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저는 보조팀의 일원이니까 오가면서 몇 번 봤죠.”
“아……그렇군요.”
일단 나를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다.
목소리를 변조했다고는 하지만 체형 자체는 숨길 수 없는 거였는데 내 복장이라는 것이 어지간히 요상한 거였어야지. 일단은 그것에 눈이 팔려서 지금의 나와 연관 짓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역시 슈퍼맨이 안경 하나로 위장하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서정 양 상태는 어떤가요?”
“으, 으음. 아직은 그대로 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 같군요.”
오기 전에 변조한 목소리로 그와 연락을 취했다.
치료약을 개발했고, 그 순서를 바꾸기 위해 혜허의 약물로 위장한다는 내용. 죠엘을 그와 마찬가지로 외부 조력자 정도로 설명해 두었으니 설명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마 도착하기 전에 꽤나 기쁨에 날뛰었을 것이다. 지금도 입 꼬리가 살금살금 올라가는 걸 억지로 참는 게 역력하다.
“좋은 일이라. 죠엘 양이 돌파구라도 찾은 겁니까?”
“어느 정도는 진척이 있다고 하더군요. 작은 단서 하나만 있다면 바로 약을 개발 할 수 있다고……”
“어머, 일어나시면 안 돼요!”
그때, 병실 안쪽에서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제임스는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놀란 간호사 옆으로 침대 손잡이를 잡고 선 고서정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힘겨워 하는 눈치지만 두 발로 제대로 서 있었다.
“허, 허니!?”
“아아……제임스. 제임스!”
제임스가 달려가고 그 품에 고서정이 안겼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테이블 위에 보자기로 싸여있는 물병 하나가 보였다. 혜허가 가지고 온 물약. 즉, 내가 만든 ALS치료제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혜허 스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다시피 서정 양이 갑자기 일어난 터라.”
스님이 거짓말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조금 의문이 되어 말을 끄니까, 그가 옆에서 눈을 찡긋했다. 이 양반 의외로 재미있는 면이 있군. 고승이 되면 굳이 틀에 얽매이지 않는 걸까?
“오. 뭔가 차도가 있는 겁니까?”
“자, 잠시 만요.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간호사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을 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입원 중이던 ALS환자가 갑자기 일어난다. 이것이 병에 대한 회복이라 한다면 일대 사건이다. 이미 악화일로로 진행 중이던 ALS가 갑자기 회복된 사례는 없으니까.
이윽고 흰 가운의 의사가 대거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리저리 고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 그리고 바삐 어디론가 연락을 넣더니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현재 그녀의 상태는 ALS로 파괴된 운동세포를 내 약이 회복시키는 중. 즉, 파괴와 재생이 공존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밖에서 볼 때는 상태가 안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꽤나 긴 시간의 검사 끝에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이 상태가 유지 될 수 있다면 정상적인 삶도 가능하다는 말.
“뭔가 특별한 일을 한 기억은 없습니까? 따로 드신 약이라도?”
“아뇨 딱히. 아! 혜허 스님이 가져다주신 차는 조금 마셨어요. 제가 워낙 좋아하던 거라 특별히 부탁을 했거든요.”
“차? 혹시 차에서? 김간호사! 서정 양이 마셨다는 차 말일세. 지금 가져오게.”
“그게……”
“왜? 설마 버렸나?”
“아뇨. 그 차는 제임스 씨가 회수해 갔어요.”
“뭐?”
미안하지만 약을 찾아내는 건 우리의 역할이라서.
놀란 의사 분에게는 속으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건넨다. ALS치료약을 발명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을 테니까. 뭐, 우리가 할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야기는 헤피 엔딩으로 흐르고 있었다.
침대 맡에서 고서정의 손을 잡고 앉은 제임스. 행복과 감격.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그녀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그럼 나 이제 살 수 있는 건가요?”
“그래. 허니는 살 수 있어! 나와 같이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 근사하게 차려진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도 할 수 있다고.”
“이게 꿈은 아닌 거겠죠?”
“아니야. 절대로 꿈이 아니야. 허니는 이제 나와 같이 늙어 갈 수 있어. 서로 흰 머리도 세어주고, 그럴 거야.”
“듣기만 해도 좋네요. 이대로 같이 늙어 갈 수 있다니……”
고서정이 티 없이 웃었다.
몇 번을 보았던 그녀의 웃음이지만 오늘의 것은 남달랐다.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이 사라져서일까, 눈부실 지경이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게 되는 건 정말로 괴로운 일이니까. 싸우고 토라지기도 하고. 가끔은 서로가 밉다는 말도 해 가면서. 그렇게 남은 시간을 서로와 함께 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허허. 잘 되었군요. 잘 되었어.”
“그러게요.”
혜허 옆에서 나도 허허롭게 웃고 말았다.
경험치나 정수와 상관없이. 가슴 한 가운데가 벅차오르는 그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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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대로 전부 했습니다. 약은 죠엘 양에게 건네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있죠.”
“잘했다. 적어도 데이터 분석이 모두 끝나고 몰아붙일 근거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침묵하는 것이 나아. 설사 하나를 우리가 잡아넣는다 해도, 결국 꼬리자르기로 빠져나갈 공산이 크니까.”
“그 정도로 세력이 크다는 말입니까?”
“당신이라면 알 텐데? 이 정도 규모의 일을 벌이려면 뒷배가 얼마나 커야 할 지.”
제임스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가면을 쓴 채, ‘이름 없는 자’의 추종자로 만나는 것. 헤피 엔딩은 헤피 엔딩이고 받아 낼 건 받아 낼 필요가 있었다.
“차남혁이라는 사람이 프로젝트 총괄위치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그를 타깃으로 잡으면 되는 건가요?”
“압박을 가해줘. 그가 자금을 끌어왔다면 여러 곳에 손을 대었을 거야. 이를 잘라내면 프로젝트 자체도 휘청거리게 될 터. 그렇다면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약점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
“차라리 수사를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수사기관에도 이들의 수하가 없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워. 아니, 분명히 있겠지.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아마 네가 신뢰하는 이들 중에서도 분명 있을 거다.”
불신의 표정.
품 안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성물이라면 성물. 등급은 가장 낮은 단계지만 이단이 접근하면 알려 줄 수 있는 알람 정도는 되어 줄 것이다.
“가지고 있다가 반응이 오면 그자를 유심히 관찰해. 적의 수하니까.”
“크음. 봤던 게 있으니 믿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와 닿지는 않는군요.”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어. 네가 두 눈으로 적의 공세를 확인할 때는 이미 늦은 거야. 물밑에서 움직이고, 그림자 안의 적을 작살로 찍어 눌러야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날, 네가 내게 한 말. 잊지 않을 거라 믿는다.”
“……두말하지는 않습니다.”
내 모습을 직접 목도했으니, 거짓말을 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의 의지 밖으로 강제적인 침입이 들어 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방금 나눠준 성물 조각은 그것을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상대의 공격을 대비하고 만일의 경우 내 편을 지켜 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이유로 부른 겁니까? 지난 과정을 듣기 위해 부른 거 같지는 않은데요.”
“네가 준비해 줘야 할 물건들이 있다.”
“음. 어지간한 거라면 다 준비 할 수 있습니다. 핵 같은 게 아니라면 말이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내가 요구하는 건 이 수준.”
미리 타이핑 해 두었던 쪽지를 건네주었다.
내가 접하기 힘든 신소재와 대중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합성 물질들. 우주 항공이나 특수 환경에만 사용하는 물질들이 대거 적혀 있었다.
“T-6001? 이건 아직 정식 보고서도 나오지 않은 물건이데, 이걸 어떻게?”
“내가 누군지를 잊은 건가? 필요하다면 창고를 직접 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가? 구해 올 수 있겠지?”
“으음. 이사회의 눈을 피해 빼내려면 조금 고생이야 하겠지만……가능은 합니다.”
“좋아. 위치를 알려 줄 테니 그쪽으로 공수를 해 둬.”
“잠깐만요.”
할 말을 마치고 떠나려는 나를 그가 불러 세웠다.
“뭐지?”
“이런 물건들을 요구하는 이유. 혹시 알 수 있습니까?”
잘 조합하면 무기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다.
아무리 내게 협조한다고 약속을 했다지만 걱정이 되기는 할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 좋다.
“무기를 만들 거다.”
“……”
걱정하는 이유 그대로니까.
※작가의 말
웨폰!!
빔 샤벨이나 하나...
* 15일 새벽에 점검이 있다 해서 자정 연재는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