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69화 (169/240)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어째서 경계가 그리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기묘한 흐름. 마치 적외선 센서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 통로 사이를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초감각이 없었다면 나 역시 모르고 지나칠 뻔 했을 정도로 은밀했다.

이는 좁은 통로로 적을 몰아넣고, 안에서 감지를 하여 입구를 닫는 형태였다.

만약 이 상황에 내 위치가 발각되고 유일한 입구였던 엘리베이터 입구가 닫힌다면 나는 도망 칠 곳 없이 갇히게 된다. 물론, 공간이동이야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충분히 위험한 형태라 생각 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군.”

눈에 보이지 않는 선 앞에 서서 기감을 집중시켰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누군가 앞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기척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보다 월등하기 희미한 느낌.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그 선들을 하나씩 피해갔다.

앞서 간 제임스 등은 이곳을 그냥 통과했다.

특정한 패스포트가 있다든지, 아니면 그 동안은 잠시 꺼 둔 것이 분명하다. 일일이 이런 식으로 통과하다가는 죄다 허리가 부러 질 게 뻔하니까.

“끄응.”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몸을 꼬아가며 선을 통과했다.

보통 촘촘하게 설치 해 둔 게 아니라 유연한 나도 애를 먹어야 했다. 예전 몸 같았으면 아마 첫 단계에서 자빠졌겠지. 남자는 허리. 그 명언을 다시 느끼며 마지막 선까지 통과를 했다.

……이곳인가.

8자리 잠금장치가 달린 철제문이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열어 놓고 이곳만 잠금장치가 있다. 여유를 부려도 여기는 못 들어간다. 이런 생각이 팍 하고 느껴졌다. 그만큼 이 안이 중요하다는 의미. 제임스도 이쪽으로 향했으니, 어떻게든 열어 봐야 한다.

자를까?

의식의 검이라면 가능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방법 장치가 가동 할 수도 있고, 출입이 들켜 위험 할 수도 있다. 지금은 들키지 않는 선에서 이를 돌파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밀번호라……

잠시 생각하다 품에서 진실의 돋보기를 꺼냈다.

그리고 방법장치를 엿봤다. 비밀번호가 예쁘게 찍혀 있었다. 물건의 진실 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이 아이템은 의외의 곳에서 힘을 발휘했다. 하긴, 특수한 힘으로 보호되지 못하는 것들은 이 신비를 이겨 낼 수 없다.

지잉. 장갑 낀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 문을 열었다.

넓은 공터가 있고, 그 사이사이 실험관들이 놓여 있었다. 옆으로 부착된 것은 실험관과 연결 된 기판들. 공상과학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배양실의 느낌이 강했다.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집단이라면 이것이 어색하지는 않지만, 첫 눈에 받은 느낌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거 같다.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이단의 혐오와도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굳이 가까운 것을 꼽자면 일전에 상대했던 괴인 같다. 이단으로 인해서 개조 되었던 병사.

그렇다면 역시 이곳은……

“잘 왔습니다. 아랫것들이 불편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되는군요.”

그 순간, 생각을 잘라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석 배양기 옆에 몸을 숨긴 뒤 주변을 살폈다. 공터 끝자락 거대한 유리관 앞으로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제임스였다.

“날 이런 곳까지 불러냈다면 확실한 이야기여야 할 겁니다. 아니라면 나라는 사람의 무서움을 알게 될 테니까요.”

“오오. 미스터 하퍼. 저는 굴지의 하퍼가를 화나게 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제가 한 제안은 모두 한 점의 거짓도 없는 것들입니다.”

“흠. 그럼, 그 결과물을 직접 보고 싶군요. 만약, 전부 사실이라면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생각이 있습니다.”

“하하. 저희가 미스터 하퍼에게 원하는 건 돈이 아닙니다.”

멀지만 희미하게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다.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외모로 눈빛이 매서운 것이 상당히 무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군소리는 됐습니다. 결과물을 보여주시고, 그 뒤에 거래를 하도록 합시다.”

“생각보다 성미가 급하시군요. 뭐, 좋습니다. 진, 첫 번째 배양관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벽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측면의 배양관 중 하나의 물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녹색 물이 사라지고 그 안에 담겨져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배양액 안에 가려져 있던 건 서른 즘 돼 보이는 여성이었다.

의식이 없는지 축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죽은 건 아닌 거 같았다. 사람을 배양실에 두다니. 실험이라도 하는 걸까?

“얀 메이. 광둥 성 부동산 재벌로 저희를 찾아 온 첫 번째 손님입니다. 차트는 그곳에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를.”

“으음.”

손님? 실험을 하기 위해 잡아온 대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제임스가 전화로 얘기하던 게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군. 그의 선택. 죠엘의 제안을 듣고도 고민했다는 건 그보다 빠르고 확실한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니까. 지금 이곳의 인물들이 ALS를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제임스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이 기묘한 느낌.

만약 이것들이 이단과 관련이 있다면 그의 선택은 그리 현명하지 않다. 이단의 부작용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한시적으로 ALS를 치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변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확인을 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필요하다면 다른 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사이, 제임스는 상대가 건넨 차트를 보며 어디론가 연락을 해서 확인을 하고 있었다. 아마 얀 메이라는 여성이 정말로 ALS확진을 받았는지를 체크하는 거겠지.

“정말이군요. 8년 전 확진. 그리고 1년 전 완치 판정.”

“후후.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지만 의아하군요. 그녀가 완치 판정을 받았다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뭡니까?”

“정기적으로 점검을 하는 겁니다. 병이 치유됐다고 그냥 손을 놓으면 되겠습니까? 필요하다면 현재 그녀의 상태 역시 상세하게 제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음……”

거짓말.

병을 위함이 아니다. 이단에 오염된 인물이라면 그 욕망에 심취해 있을 터.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에 선의가 깃들었다고 보기 힘들다. 어떤 이유든 얀 메이라는 여성을 입맛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난 당신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같은 계통의 힘이라 이해하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미 조사를 하고 왔군요.”

“나는 철저한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 연구. 의학계에 보고된 바도 전혀 없으며, 사례나 그 어떤 예비 논문조차 없더군요. 마치 하늘에서 치료약이 뚝 떨어진 듯 한 모습.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임스가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상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반응에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되레 박수를 치며 흥 겨운 목소리로 답을 했다.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그래야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죠.”

“농담 대신, 진실을 듣고 싶군요. 이 치료약. 역시 게이트 너머의 물질이 함유 된 것이겠죠?”

“……후후. 맞습니다. 현대의 그 어떤 치료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ALS를 게이트 너머의 물질 하나를 합성하는 것으로 말끔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구질구질한 협회와 식약청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더군요. 미지의 물질이기 때문에 수년간에 걸친 테스트가 있어야 한다나? 그게 맞는 말이라 보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기이이잉……!!

그 순간 아찔할 정도의 혐오감이 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명백한 이단의 힘이다. 본질적인 욕망이 튀어나오며 그것도 활성화 된 것이다. 굉장히 농밀하고 질척거리는 느낌. 그의 내재적 욕구라는 것이 가볍게 여길 만 한 건 분명 아니었다.

“……그 말은 이 약 또한 안전성을 증명 할 수 없다는 겁니까?”

“오, 그건 아닙니다. 이미 사례를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멍청하고 발 느린 이들이야 임상실험 운운하며 안전에 목을 매지만 정말로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면 모험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미스터 하퍼의 심정처럼.”

“……”

제임스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이니 악마와도 손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당장 구해 달라고 넙죽 엎드리지 않는 것은 그의 철학과 정신력에 기인하는 것. 하지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이라는 것은 걷잡을 수 없다.

만약 이단의 힘을 품은 남자와 제임스가 손을 잡는다면?

고서정의 목숨을 살려주는 걸 대가로 그 재력과 영향력을 등에 업게 된다면 판이 얼마나 크게 확장 될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말마따나, 이단의 힘이 실린 약품이 불치병 치료라는 이름을 달고 팔려나가기 시작하면 그건 누구도 막지 못하게 된다. 부작용이 있다 해도, 당장 사랑하는 이를 치료 할 수 있다면 달려 들 사람은 넘치고 넘치니까.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습니까? 결정을 내리셨나요?”

덜컹—!

남자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입을 여는 순간, 배양기 하나가 크게 덜컹거렸다.

당연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일이다.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일단 지금의 상황이라도 파토 내는 것이 우선. 나가서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일전에 싸운 괴인을 고려해 보면 적의 전력이라는 것을 쉬이 예단하기 어렵다. 만약 그런 존재가 수백이나 튀어나오면 나도 상대하기 어렵다.

“무슨 일이냐?”

“압력 밸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쯧. 가서 다시 점검 해 봐.”

덜컹! 덜컹!!! 쾅! 쾅!!

조금 더 거칠게 흔들었다.

사람이 없는 걸로.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제임스와 거래를 하던 남자가 인상을 구겼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기분이겠지.

“흐음. 생각보다 시설이 안전하지 않은가 봅니다?”

제임스가 곧바로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별 거 아닙니다. 사용하고 남은 배양실이 오작동을 일으키나 본데, 금방 처리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해 보죠. 굳이 이런 곳에서 대화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아니, 안 좋다.

밀폐된 곳에서 뭘 하려고. 이단의 시커먼 속내가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스으윽.

“헉!! 뭐, 뭐야!?”

배양실 안쪽에 누워있던 얀 메이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유리관을 짚었다. 마치 좀비마냥. 눈도 드지 않은 몸으로 흐느적거리며 벽에 부대끼는 모습은 잘 봐 줘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게 지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요?”

“……이건.”

제임스가 쏘아붙이자, 남자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당황스러울 거다.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일어났으니까. 이 정도면 일단 계약은 쫑이다. 다음 약속을 잡을 수야 있겠지만, 그 전에 내가 죠엘로 가로채면 그만이다.

“그놈이다.”

헌데, 그 순간 입을 연 남자의 말은 내 예상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들어서는 크게 외쳤다.

“적이 침입했다!! 4단계 방어 시스템을 작동해라!!”

위이이잉!!!!

뒤이어 터지듯 울리기 시작한 비상벨.

방 안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고 사방 조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경고등. 그것도 매우 조직적이고, 훈련 된 반응이었다.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 격벽들이 내려서고 수많은 무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상 현상만을 보고 내가 왔다는 것을 파악했단 말인가?

“네놈이 언제고 찾아 올 거라 생각했다. 이름 없는 자!!”

“허……”

게다가 이름 없는 자라고?

무작위로 적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콕 집어 내가 공격 할 거라 예단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설마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혹시 고무식? 한 번 충돌했다고 냉큼 정보를 알렸나? 아니다. 아니야. 그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이미 치료약 개발을 알렸는데 굳이 피해오던 이단과 조우 할 리 없어.

그렇다면 죠엘이나 혜허. 아니면 서율이.

어느 쪽을 살펴봐도 유출되었다 보기는 힘들다. 만약을 대비해서 내 주변 이들은 전부 성물을 건넨 바. 이단에 의한 침식이나 접근이 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침착하자, 서준경. 제임스를 뒤쫓아 온 것은 사실 즉흥적인 계획이다. 따로 누군가에게 말 한 바 없다. 사전에 알고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즉, 이건 단순한 준비태세.

타깃을 나로 한정한 조건 반응이다.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모습을 드러내며 이단과 적대하는 행위를 했으니, 그것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쩌면 창고의 습격과 괴인의 처리 등으로 경계 등급이 올라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망령제어를 몇 번이고 사용했으니, 그 정보가 퍼져서 이에 반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위잉!! 위잉!! 위이이잉!!!

그렇다면 당황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탈출 할 수 있는 수단. 주변의 기운을 감지해 봐도 나를 제약하는 건 딱히 없다. 즉,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공간이동으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는 부분은?

가면, 장갑, 쫄쫄이.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이런 유치한 코스튬을 준비 한 것 아니겠는가. 적어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내 존재를 유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후우……”

그렇다면 상황은 심플하다.

적과 싸운다. 그리고 탈출한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물러나기에는 이런 환영인사가 과분하다.

한 가지를 더 더하자. 제임스가 이들과의 거래를 끊으려면 직접 상대의 위험성을 목도하는 것이 최선. 그렇다면 변이체는 어떨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 해도, 눈앞에서 괴물이 탄생하는 걸 보면 마음을 고쳐먹을 것이 분명하다.

“찾아라!! 반드시 찾아내서 내 앞으로 끌고 와!!”

충격요법이라 이거지.

“여기 있다!!! 잡아라……커억!!”

오늘은 특별히 무료로 해 주겠다.

※작가의 말

비가 오고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네요.

고로 오늘은 자정에 한 편 더.

그런데, 서버 상태가 요상해서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일단 추가 점검이나 이상현상 없으면 올리도록 할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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