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라는 성은 꽤나 흔하다.
하지만 미국에서 하퍼라는 성을 거론하면 백이면 백 같은 집안을 떠올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원의원을 연거푸 배출하고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대권주자가 일원으로 포함 된 집안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명문가.
게다가 이 집안은 정치적으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하퍼 코퍼레이션은 과거 남북전쟁 당시부터 토지, 광물, 자원 거래로 성장해온 기업으로 지금에서는 미국 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거물로 자라나 있다. 지금에서는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충하고 의료, 교육, 문화에도 손을 뻗어 글로벌 멀티 그룹으로 자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에 영국 왕가가 있다면, 미국에는 하퍼가문이 있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치는 것이 바로 하퍼 가문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하퍼는 그 중에서 하퍼 코퍼레이션 총괄 이사로, 실질적인 가문 사업을 주도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면서도 설마 했다.
제임스라는 이름이 희귀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하지만 통화를 하고, 병원 옥상으로 헬기가 내려앉은 이후 경호원을 대동한 백인 남성이 들어왔을 때,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서정.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눌한 한국말로 그가 물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백인 남성에 간호사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옆으로 다가가 그를 안내했다.
“당신이 전화한 사람입니까?”
“네. 이쪽으로. 지금은 안정세에 들어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를.”
“오……지져스. 감사합니다.”
손을 꾹 잡고는 글썽이는 눈매로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거대 그룹의 총수가 이런 감성적인 태도라니. 뭔가 어색하다. 하지만 그의 눈매, 심장 뛰는 소리. 모든 상징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고서정을 사랑하고 있었다.
“오……허니.”
그렇게 병실로 안내를 했다.
수척한 인상의 고서정이 잠들어 있었다. 그가 황급히 다가가서는 가슴에 귀를 기울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닥터, 허니는 어떤 상태인 겁니까?”
“근경련으로 인한 간헐적 발작이 온 상태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진정되었네요. 저쪽 분이 응급치료를 잘 하셔서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위급 시에 혀가 말려들거나, 폐 수축으로 호흡이 불가능해 지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오! 당신이 그녀를 구했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한 일은 별 거 없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신성력으로 근 경련을 막아낸 것을 빠른 응급 처치의 결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편이 나야 좋았다.
“일단 안정을 취하고 나면 조만간 깨어나실 겁니다. 그보다 보호자 분께서는 이분의 병명을 알고 있었던 건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녀도 좋을 상태가 아님도 알 텐데요? 아무리 희귀한 경우라 해도 이미 병이 진행 된지 꽤 됐었다고 하던데요. 지금 같은 상황이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셨나요?”
“……”
제임스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병을 알고,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처럼 혼자 돌아다니고 있던 건 본인의 요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제임스도 괴로운 일일 것임이 분명하다.
“이분도 오시느라 피곤했을 텐데, 자세한 건 나중에 말 하도록 하죠.”
의사의 말을 내가 가로 막았다.
그가 ‘음.’ 짧게 신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났다. 아마 잠시 흥분한 탓이겠지. 탁 하고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잠들어 있는 고서정과 제임스. 그리고 나만이 남았다. 미소 등은 이미 집으로 돌려보낸 후였다.
“그럼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시 만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제임스만 방에 두고 물러나려는 찰나,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습니까?”
“연인관계인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고향에서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을 한 뒤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연락 할 엄두가 안 났다고 해야 할까요……”
“가문에서 반대라도 한 겁니까?”
“……! 알고 있었습니까?”
“이런 쪽 눈치는 조금 빨라서요.”
제임스가 놀란 얼굴을 진정시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타임즈 등에 간혹 얼굴을 올리던 인물이니 내가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겠지.
“반대라. 맞습니다. 인종 때문에, 집안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가진 병력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갔던 겁니다.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지만, 자신을 감시하려 한다면 영영 안 보겠다는 엄포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 혼자 다닌다 싶었는데.”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우연 이라고 해야겠죠. 딸아이와 도서관 인근에 있다가……”
그에게 지난 시간동안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는 말에는 조금은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역시 남자는 남자. 그 사이에 내가 껴 있었다는 것이 못내 걸리는 눈치였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터라……”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마음은.”
경우는 다르지만 나도 미소를 두고 그러했었다.
그 괴로움과 고통은 타인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허니가 그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제부터는 당신이 곁에 있어 주세요. 구급차에 실려 올 때,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 동안 떨어져 있었다 한들 마음이 변한 거 같지는 않더군요.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아파야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이제는 절대 안 떨어질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곁에 남아 있어야죠.”
죠엘에게 의뢰한 약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남 일이라고 무시하려 한 적도 있지만, 눈앞에서 이런 애틋한 모습을 보자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효력을 입증한다고 해도 문제는 있다.
미용에 사용하는 물건이나 발모제 등과는 다르게 질병에 대한 약은 절차가 훨씬 까다롭다. 임상실험도 많이 거쳐야 하고 정식으로 인정받아 약으로 출시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 동안 고서정이 견딜 수 있을까?
드르륵……!
그 순간,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그곳에 서 있는 건 회색 승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주름 진 얼굴에 깊은 연륜이 묻어나고 있었다. 못해도 여든은 훌쩍 넘어 보이는 외모. 오래된 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묘한 기품이 느껴지고 있었다.
“저는 서정 씨의 친구……라고 해야겠군요. 그리고 이쪽은 그녀의 연인인 제임스 씨입니다.”
“아. 실례했군요. 본 승은 혜허라 합니다.”
합장을 하고 고개 숙이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자세를 따라하고 말았다.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내가 사용하는 위압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마치 자연적으로 사람을 감복시키는 느낌이었다. 노승의 힘이라는 걸까. 조금은 신기했다.
“스님께서는 서정 양과 아는 사이인가요?”
“적지 않은 인연이 있지요. 그녀의 선친부터 본사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으니, 벌써 30년은 훌쩍 넘었을 겁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 왔는데, 어느새 이리 훌쩍 자라고 말았군요.”
“그녀가 불자였군요. 아……! 그럼 볼 일이 있다고 했던 것이……”
“불쌍한 것. 저 착한 아이에게 어찌 하늘은 무심하게도 흉측한 병을 내려주셨는지.”
뒷말을 홀로 중얼거리자, 그가 걸음을 옮겨 고서정 옆에 섰다.
주름 진 손으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태도로 보건데 그녀 역시 병명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 고서정은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종교에 의지했던 거 같다.
사람이 극단에 몰리면 항상 초월적인 것에 의지하는 법이다. 그녀 역시 다르지 않은 거겠지. 30년이라고 하면 이미 깊은 인연도 있고, 고국으로 돌아와 우선적으로 찾아도 이상하지 않다.
“허니가 당신에게 상담을 한 겁니까?”
제임스가 혜허의 옆으로 가서 물었다.
“상담이라기보다는 푸념을 들어준 것에 불과합니다. 저 오뚝이 같은 아이도 천형에는 좌절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모든 걸 비우고 가기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오……”
제임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혜허가 손으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커다란 덩치의 제임스와 작은 체구의 혜허인지라 뭔가 언밸런스해 보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혜허는 마치 큰 바다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러니 고서정도 그에게 가서 속에 담긴 것들을 털어놓았던 거겠지.
제임스의 흐느낌은 그 뒤로도 꽤나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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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무렵, 나와 혜허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연인인 그가 소정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다. 둘만 남겨 두고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근처 자판기에서 솔잎 향 나는 음료 두 개를 뽑아, 하나를 혜허에게 건넸다.
탄산보다야 이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가 받아 들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참 나이 어린 내게도 예를 잊지 않는 모습이 참 이색적이다.
“거사께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고생이라고 할 게 있나요. 큰 일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죠.”
“허허. 다급할 때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범 못지않은 용기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거사 덕분에 그 아이가 무사 할 수 있었으니, 저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과례입니다. 제 아이와 친하기도 하고, 직접 경험하기로도 그녀는 충분히 좋은 사람입니다. 무사히 위기를 벗어났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다만, 천형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죠.”
입맛이 쓰다.
세상에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란 이들이 고통에 허덕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주의 인관가 그리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짓궂은 조물주의 장난일까. 어느 쪽이든 세상에 몸담아 미약하게 발버둥치는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게 사실이다.
“신의 힘이라면 도움이 될까 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 하더군요.”
“역시 그렇습니까? 쉽게 치료 될 병이 아니지요. 저도 역시……!”
자연스럽게 말을 하다 흠칫하고 물러났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신의 힘?
“너무 놀랄 필요 없습니다. 그대가 다른 신을 믿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입니까?”
“모든 색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색. 그대는 다른 신의 아이들과도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군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지금 내 힘의 근원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색으로? 다른 신의 아이들이라 했으니, 내가 처음도 아니라는 말? 당황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불자의 몸으로 다른 신의 부탁을 들어줌이 꺼려지지만 어찌나 간곡히 부탁하던지. 어쩔 수 없이 몸의 한 켠을 내어 주고 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답니다.”
“……신을 몸에 담았다?”
“그리 표현하는 것이 가장 옳겠죠. 자신을 아녹스. 하늘의 눈을 가진 신이라 소개했습니다.”
신의 이름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죠엘, 고무식과 같이 아노스의 신이 현대의 인물에게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겨우 당황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군요. 정말로 제 힘이 보이는 겁니까?”
“사람은 모두 각자의 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 거사와 저 같이 다른 세계의 신을 품고 있는 자들은 두드러진 색을 지니게 되죠.”
“다른 신의 종자들도 본 적이 있습니까?”
“얼마 전에 고무식이라는 남자가 절로 찾아 온 적이 있었죠. 그도 당신과 같이 다른 신을 몸에 품고 있더군요. 자유롭고, 바람을 닮은 색이었습니다.”
고무식 이 새끼.
그런 일이 있었다면 후딱 말을 해야 할 거 아닌가. 고서정의 뒤를 캐다가 만난 거 같은데, 입 싹 닫고 있다니. 나중에 찾아가면 한 바탕 해야 할 거 같다.
“당신이 품고 있는 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모른다? 신기하군요. 몸에 깃들기 전에 한 마디 정도는 나누지 않습니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으니까. 사고 순간의 빛을 신이라 여겨도 누군가와 대화한 기억은 없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이걸 왜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고 있는 거지?
“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를. 어디 가서 얘기 할 마음은 없습니다. 고무식 그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이단이라는 존재가 있어, 이에 대항한다고 하셨죠?”
“……아주 다 떠들고 다니는군요.”
“제가 품은 신의 능력입니다.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죠.”
“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쉬이 흔들리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고무식의 능력에도 쉽게 당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미리 간파했고, 그 힘을 사전에 차단했다. 지금 혜허가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그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마치 득도한 고승이 보여주는 초월적인 지배력과 흡사했다.
“이제 곧 하늘의 부름을 받아 떠날 제 입장에서는 세상일이라는 건 고단의 연속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 또한 천리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이죠. 다만, 이 아이는……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 할 수가 없더군요. 불자된 도리까지 저버리며 다른 신의 힘을 빌려보려고 했을 정도로.”
“……음.”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묻고 싶습니다. 거사께서는 이 아이를 도와 줄 방법이 있습니까?”
아녹스라는 신을 모시는 스님.
이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은 인연일까, 악연일까. 내가 하는 선택에 따라 그 길이 나누어 질 거란 생각이 든다.
“저는……”
장고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가의 말
* 제임스 하퍼는 작중 가공의 인물입니다.
* 또 다른 신도의 등장. 불자이니 듀얼 신도? 음...
* 본래라면 오늘 두편으로 가야 하지만...날씨가 너무 더워서 글을 못쓰고 있습니다ㅡㅜ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더워요 ㅡㅜ 집에 에어컨도 없공...사는 곳 특성상 다른 곳에서 쓰기도 힘들고. 흐아. 녹고 있습니다. 녹아요.
* 여러분도 더위 조심하세요. 진짜 핫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