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관리에 대한 권한은 결국 땅으로 이어진다 이건가.”
한동안 도서관을 털면서 얻은 근본적인 지식이다.
쿤이 있는 공화국은 본디 왕정에서 체제가 바뀐 지 아직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지방 관료들은 본래 귀족들이 그대로 이어받은 게 보통이다. 체제 변혁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대로 양도한 형태. 그리고 현재, 신분차이로 인한 권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들이 지방의 권력을 유지하는 힘은 바로 땅이다.
“결국 소작농을 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군. 땅을 대여하고 세금을 매기는 것 역시 지방 관리의 힘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어. 왕정은 무너졌지만 지방은 여전히 왕정의 형태와 다를 바 없군. 그러니 나라꼴이 안 좋을 수밖에.”
공화정의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한다면 능력자의 선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화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체제를 급속도로 바꾸었다. 그 탓에 폐해는 그대로 끌어안고 형태만 겨우 바꾼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현재의 내전이 없었다 해도 결국 언젠가는 큰 사단이 났을 형태다.
“한 번에 바꾸는 건 무리겠군. 필요한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당근과, 후에 뒤통수를 내리칠 채찍인가.”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의회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지방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수다. 아니면 적어도 지금처럼 중립을 지키고 있게 하든가. 그리고 그렇게 내전을 종식시키고 난 뒤에는 권력을 다시 중앙으로 끌어 올 필요가 있다. 공화정 상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지만 전국토로 병폐가 뻗어나가 있는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앞서서는 지방 권력을 인정해 주는 척 하다가,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권한을 강화시켜 이를 한 번에 휘어잡는 것이 상책이다. 적법한 절차를 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꿰어내고, 그 재물을 다시 분배하는 것으로 지방의 병폐는 일시적으로 해소 할 수 있다. 다만, 이럴 경우 전국적인 반란이 걱정되는 바.
“그건 종교로 막아야지.”
쿤의 지위는 그럴 때 도움이 된다.
과거 중세부터 정교분리가 괜히 진행되었던 것이 아니다. 종교는 민간을 장악하는 힘이 있다. 두 가지를 한 번에 가진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 생각대로 일이 굴러간다면 쿤은 그 힘을 지니게 된다.
“잘 굴러갔을 때 말이지.”
탁. 노트를 덮었다.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그럭저럭 실마리가 보이는 거 같았다. 남은 건 이를 쿤에게 전하는 방법과 대처하는데 필요한 능력과 도구 들. 신전까지 세우고 종교를 전파하고 있는데, 신이 된 마당에 아무것도 안 해 줄 수는 없다.
우우웅.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갈까 하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미소다. 오늘 시험이 있다고 했는지 잘 봤는지 모르겠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열람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지금?”
학교 앞에서 고서정을 만나서 지금 같이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근처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 살짝 느낌이 미묘했다. 친해지는 건 좋지만, 미소가 너무 빠질까 걱정되었다. 엄마가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무너진 가정에 대해서 상실감을 가진 아이에게 이렇게 친밀한 여인이 나타나는 건 자칫 이상한 환상을 심어 줄 수 있다. 이러다 어느 날 불쑥 자신이 살던 세계로 그녀가 돌아가 버리면 미소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두어도 될까.
고민을 가슴에 품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빠~아빠! 여기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정식 집에 도착했다.
꽤나 고급스러운 가게 같았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앞서 나와 반겨 주었다. 대충 응대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당연하다는 듯 세주 등도 와 있었다. 유일하게 빠진 건 서율이가 유일했다. 이것들이 한 번 어울리니까 아주 살판났구나.
“또 뵙는군요.”
“후후, 죄송해요. 오붓하게 보내야 하는데 자꾸 방해를 하는 거 같네요.”
“괜찮습니다. 애들도 다 좋아 하는 거 같고.”
“에이, 아빠 설마 질투해요?”
“조용히 하렴.”
샐쭉 웃는 미소의 이마를 콩 찍어 주고는 고서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반달처럼 휜 눈으로 웃고 있었다. 딱히 얼굴을 가린 것 없이. 도서관 인근이야 사람이 없어서 괜찮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식당. 그래도 괜찮을까 싶었다.
“아는 분이 하는 가게에요. 얼굴 알려진 분들도 자주 찾아오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 근처에 이런 가게가 있었군요.”
“알음알음 찾아오는 곳이니 모를 수 있죠. 나중에 가족끼리 한 번 찾아와 보세요. 제가 잘 말 해 두고 갈게요.”
“하하. 이거 신세 좀 지겠습니다.”
사람 대하는 태도는 참 좋다.
나도 걱정은 일단 기억에서 지우고 맞은편에서 웃고 말았다.
조금 지나자 종업원이 찾아와 주문을 받는데, 그녀 말대로 어떤 티도 내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딱 주문받고 조용히 물러났다. 주변이 정갈한 한옥집 형태라 그런지 느낌이 좋았다. 역시 나는 양식보다는 이런 쪽 식당이 마음에 든다.
밑반찬으로 내온 음식을 집어 먹으며 물었다.
“그보다 미소를 학교 앞에서 만났다고 했죠? 일이 있어서 나간 겁니까?”
“아……네. 근처에 볼일이 조금 있어서요. 마침 미소가 시험이 있었다고 말 한 게 떠올라서 연락을 해 봤죠.”
“어? 언니, 설마 다시 작품 들어가요?”
“진짜요? 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나온 거 뿐이야.”
설레발치는 미소와 세주에게 그녀가 손을 흔들며 변명을 했다.
그와 동시에 살짝 느껴지는 씁쓸함. 작품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감정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그보다 미소야 시험은 어떻게 됐니? 잘 본 거 같아?”
“악! 묻지 마세요. 이번에는 정말로 망한 거 같아요.”
“와, 장학생의 어리광 나왔다! 소유야 같이 공격해!”
“글쎄다. 이번에는 나도 장학금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런 배신자들!”
금세 주제를 돌려서는 이야기기 하기 바쁘다.
솔직히 대화에 끼기도 힘들거니와 저 엄청난 수다 속에서 헤엄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정갈하게 나온 반찬을 음미하면서 수많은 말들을 그냥 흘리기만 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뽀얀 백반에 잘 구워진 생선. 고소한 재첩 국에 알맞게 양념 된 게장과 젓갈 등.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보니, 대접받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요리를 올리고 나도 집에서 한 번 해 볼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언니, 언니는 결혼 안 해요?”
그렇게 한참을 음식에 탐닉하고 있을 무렵, 세주가 불쑥 물었다.
연예인. 그것도 나이가 상당한 연예인에게 묻기에는 조금 무례한 질문이었다. 옆에서 소유가 옆구리를 찔렀다.
“왜, 왜?”
“야 넌 눈치가 그렇게 없니?”
“내가 뭐. 그냥 결혼 안 하고 있으면 아저씨 어떻냐고 물어 볼라고 그랬지.”
나? 가만히 있는 나는 갑자기 왜 걸고넘어지는 거냐?
“아저씨 정도면 좋잖아. 사람 좋지, 돈도 잘 벌지, 얼굴도 나이에 비해서 어려 보이지. 언니랑 잘 어울리지 않아?”
“아이구. 그렇다고 해도 그걸 면전에서 물어보니, 이 빙구야?”
“누가 빙구야!”
“너, 너! 니가 딱 빙구다.”
드물게 소유가 다박다박 쏘아대니, 세주가 입을 비죽 내밀고는 토라졌다.
스무 살이 넘었다고 다 큰 게 아니다. 저것들을 누가 성인이라고 하겠는가. 아직 애다. 고개를 흔들고는 맞은편에 앉은 고서정에게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살포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세주 마음은 알겠는데, 이 언니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단다.”
“……어? 진짜요? 대박!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
“영화계를 떠나고 나서 만난 사람이니까. 어디 가서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와와. 당연하죠. 근데, 누구에요? 만난다는 사람.”
“글쎄. 과연 누구일까?”
손가락을 베어 물면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을 했다.
나도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영화계를 떠나고 난 뒤라면 병에 대해서 알고 난 후다. 그렇다면 의사? 아니면 간병하는 지인 중 한 사람과 사랑이 싹튼 걸까?
“에이 좋다 말았네. 아저씨 상심하지 마요.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고 하잖아요.”
“……그러냐.”
세주가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이 계집아이는 밝아서 좋긴 한데, 가끔은 너무 엉뚱할 때가 있다. 이런 것도 개성이라는 걸까? 한숨이 폭 하고 베어 나왔다.
툭……!
“어? 언니, 숟가락 떨어졌어요.”
그때, 테이블 위로 고서정이 잡고 있던 숟가락이 떨어졌다.
미소가 작게 웃으며 집어서 건네주었다.
“아, 고마워.”
고서정이 냉큼 이를 받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숟가락이 다시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조금 전부다 더 큰 거 같았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팔 전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언니 왜 그래요!?”
“괘, 괜찮아! 별거 아니야. 그냥 잠시 기다리면……”
고서정이 침착하게 아이들을 다독이려고 했지만 팔의 흔들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점차 심해졌다. 팔을 넘어 어깨까지 흔들림이 전해지더니 표정이 점차 일그러져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아, 아빠!! 언니가 이상해요!!”
“미소야 비켜 봐.”
황급히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미소야 119에 신고해. 세주랑 소유는 카운터로 가서 상황을 알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루게릭 병으로 근세포가 손상을 입어 신체 활동에 장애를 가지고 온 것이다. 호흡을 비롯한 신체의 모든 활동에는 근육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하나가 장애가 오면 결국 전체로 퍼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일단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내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옷을 풀어서 호흡을 쉽게 해 주었다. 가슴 기복이 거칠고 호흡으로 뱉어지는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 폐 운동에 문제가 온 것 같았다.
……일단.
주변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질병치유를 사용했다.
본디 걱정되어 물리던 방법이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가릴 수는 없었다. 빛이 스며들어가고 그녀의 떨림이 줄어들었다.
[중급 질병 치유의 축복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이내, 실패 알림과 동시에 떨림이 다시 거세어졌다. 루게릭 병은 축복으로도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재생이라 이거지.”
죠엘에게 맡긴 치료 방법의 근원적인 생각.
즉시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끌어내린 뒤, 인벤토리에서 정수가 담긴 그리자를 꺼냈다. 그리고 이를 손으로 잘게 부순 뒤 물에 풀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성력이 담긴 물약이 된 것이다. 체력 회복 물약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안 가지고 왔다.
고서정 뒷목을 허벅지로 받치고 입가로 물을 밀어 넣었다.
근 경련으로 대부분이 새어나왔지만 일부는 몸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즉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망령제어를 사용해서 그녀에게 접촉을 했다. 육체는 전기적인 신호로 작동하는 일종의 기계로 볼 수 있지만 혼이라는 시스템 파워가 없으면 구동이 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완전히 육체를 제어에서 놔 버린 상황이라면 일단 그 파워부터 키는 게 우선.
“커억……! 컥!!”
거친 숨을 토하며 고서정이 눈을 떴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근육의 떨림은 가시지 않은 상황. 병의 진행이 조금 희귀한 경우라 하더니, 발작의 정도도 내가 조사한 것과는 꽤 상이했다.
꺽꺽 거리며 당황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일단 다독였다.
목 뒤를 부드럽게 잡고 반지의 힘으로 회복의 능력을 부여하며 제멋대로 날뛰는 근육을 진정시켰다.
“끄윽……끄윽!!”
숨쉬기가 아직 힘들어 보이지만 조금씩 경련이 줄어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내가 먹인 신성력 담긴 물이 회복 효과를 보인 것이다. 이단의 힘이 초인적인 재생력을 보이는 것처럼, 신성력 담긴 그리자 역시 같은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반응의 정도로 볼 때 이단의 것이 여파는 크겠지. 거친 격랑이냐, 아니면 잔잔한 파도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환자는 어디입니까!?”
그렇게 십 분 가량이 흘렀을 때.
119 구조대원들이 장내로 들어왔다.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양도했다. 루게릭 병인 것을 알릴까 했지만, 조금씩 상태가 안정화 되는 것을 보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았다.
“보호자 한 분 대동하시죠.”
“……음.”
“아빠, 같이 가세요. 저희는 따로 뒤따라갈게요.”
“그래, 그렇게 하자.”
일단은 내가 보호자로.
구급차에 함께 탄 뒤,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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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병원으로 이송하는 중, 고서정이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걸까. 그녀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는 물었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겁니까? 제가 연락을 대신 해 드릴까요?”
호흡기를 단 채로 그녀가 망설이는 눈빛을 보냈다.
상태가 이런데, 연락하기를 망설이는 걸까?
“병원에 도착하면 필요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대신 전화를 걸어 드릴 테니, 일단 연락을 하세요.”
다시 한 설득을 하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힘없는 손끝에서 핸드폰을 받아 든 뒤 손가락 1을 펴 보였다. 단축 다이얼 1번으로 걸면 되냐는 물음. 그녀가 눈빛으로 긍정의 신호를 보내 주었다.
역시 가장 급할 때 찾는 사람은 1번이지.
띠링―!
단축 다이얼이 눌리고 신호가 이어졌다.
그리고 액정에 이름이 떠올랐다. 영어로 된 이름. 끝에 하트가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녀가 말 한 연인이 분명했다.
[James Harper♡]
그런데 이 이름. 어딘가 익숙하다.
어디서 들어봤을까. 외국 배우? 프로 선수? 아니면 연예인 예명?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조사를 하다가 찾아 낸 이름.
그러니까……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 이름은……
※작가의 말
이 이름은 두둥!!
전편,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요. 음음.전개에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ㅎㅎ
그나저나 오늘 무지하게 덥네요. 땀이 주륵주륵.
다들 더위 조심하세요.
* 서재가 안들어가져서 이제야 겨우 올리네요.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