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65화 (165/240)

잠시 머뭇거리다 인사를 받았다.

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걸어오는 인사를 무시 할 수는 없으니까. 일행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인사를 건넸다. 일행 중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서정이야!’, ‘나도 보고 있다고.’ 등의 이야기를 하며 꺅꺅 거리기 바쁘다.

“이렇게 불쑥 말을 걸어서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그보다 저는 어떻게 알아보시고……”

“우연히 홍보 영상을 봤거든요. 굉장히 신선한 마스크다 싶었는데, 얼마 뒤에 대담에 나오더군요. 거침없이 말 하는 모습. 인상 깊게 봤어요.”

“욱해서 뱉은 말인데……조금 민망하군요.”

티비에 출연한 나를 봤다.

그래서 알아봤다는 것. 이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 정도의 톱스타가 이런 곳에 혼자 무슨 일일까? 매니저나 경호원도 없이.

“이곳. 느낌이 좋지요?”

그녀가 일행이 있는 테이블 옆에 앉더니 말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에 여유가 가득하다. 미소 등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방송 경력 좀 된다는 서율이도 눈이 반짝이고 있다.

……하긴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나야 경험치가 너무 많이 쌓여서 톱스타 정도에 흔들리지 않지만.

“가끔 주변으로 산책 삼아 나오곤 해요. 산길이 잘 닦여 있어서 거닐기에 좋죠.”

“여, 여기 주변에서 사시는 거예요!?”

미소가 반짝이는 얼굴로 물었다.

스타와 이웃사촌! 타이틀 획득에 기꺼운 눈치였다.

하지만 고서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지었다.

“언니가 근처에서 살아요. 가끔 내려와 며칠씩 머물다 가곤 하죠. 도심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원을 꿈꾸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음……”

“아, 제가 너무 떠들었군요. 가족끼리 놀러 나온 거 같은데.”

“아뇨, 아뇨! 괜찮아요! 아빠, 왜 눈치를 주고 그래요!”

아니, 내가 언제?

“저희는 괜찮아요! 음료수 좀 드실래요!?”

“어머, 아가씨가 심성이 매우 곱네요. 고마워요.”

“봤어? 봤어? 나보고 곱다 그랬다고!”

“나도 귀가 있거든?”

투닥거리는 미소와 세주가 귀여운지, 고서정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외모로만 보자면 죠엘이 낫지만,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고아한 품격이 있었다. 아, 그녀는 외모로 보자면 30대이지만 실제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었다. 대충 나와 비슷한 나이인 걸로 안다. 설마 누나는 아니겠지?

“처음에는 단란한 가족 같아서 지켜봤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있더군요. 그래서 말을 걸어 봤어요. 불편한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말 했다가는 뒤에 있는 애들이 가만히 둘 거 같지도 않고요.”

“후후.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스타 특유의 오만함도 안 보이고,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나 말투에서도 교양이 보인다. 확실히 찌라시로 돌아다니는 내용 중 까방권 소유 연예인 탑 3에 들어간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거 같다.

다만, 여전히 긴장은 풀지 않았다.

우연?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몇 년간 화면에서 사라졌던 톱스타가 혼자서 이런 장소에 불쑥 나타난다라. 내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언니, 언니! 화장품 어디 꺼 써요!? 와아~! 피부 대박!”

그렇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미 세주를 필두로 여성 그룹은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여성 특유의 공통점이라 해야 할까. 몇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하더니 금세 언니 동생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나이 차이가 몇인데 언니인가 싶지만, 그런 말을 지적했다가는 고운 시선이 안돌아 올 거 같았다. 나도 좀 눈치가 늘은 걸까?

“아~진짜요? 그럼 앞으로 복귀 하실 생각은 없어요?”

“글쎄. 한 번 거리를 두고 나니, 그 시절이 그다지 그립지는 않네. 많은 이들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는 스쳐가는 불꽃같은 거지. 아름답게 타오르지만 남는 건 재밖에 없어. 영광은 영광으로 남기고 뒤로 물러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

그러다 이야기가 그녀의 복귀로 이어졌다.

정식으로 은퇴를 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 갈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눈빛에서 보이는 허허로운 기운도 이를 뒷받침했다. 인기에 밀려서 잊힌 게 아니라 자기가 손을 끊은 자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요. 언니 작품은 하나도 안 빼놓고 봤는데.”

“저도, 저도요! 하나도 안 빼놓고 몽땅 봤어요!”

“에이, 거짓말! 너 화접 안 봤잖아!”

“봐. 봤거든!?”

시끌시끌하다.

태도나 반응. 눈빛까지 전부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다. 정말로 우연히 만나게 된 걸까? 그렇다면 그냥 좋은 인연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 톱스타인 걸 제외하고 나도 사람 자체가 괜찮아 보이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려가서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요?”

“……음? 음?”

“아빠, 뭐해요. 언니가 내려가서 밥 먹자고 하잖아요.”

“우리 방금 먹지 않았니?”

“에이, 그건 간식이죠. 가요, 가요. 네?”

김밥에, 우동에, 냉동 피자에, 과자와 빵.

과연 그게 그냥 간식이었다는 말이냐? 그걸 먹고 점심이 또 들어가는?

무언의 항변을 해 봤지만 주변에 있는 건 전부 여자뿐이다.

이런 성불균형이라니. 내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우리는 간식타임을 끝내고,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

“정말이냐!!! 정말로 고서정을 만난 거냐!?”

늦은 저녁, 고무식을 만났다.

점심 한 끼 같이하고, 가벼운 수다. 그리고 헤어짐까지. 딱히 책잡힐 것 없는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확실 한 것이 좋으니까. 다만,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 만난 고무식의 반응이 조금 격하다. 여차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판. 이마를 튕겨서 뒤로 밀어낸 뒤 말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나올 게 뭐가 있냐?”

“우……우오! 싸인은? 아니, 사진 같은 거 안 찍었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도 불렀어야지!!”

“팬이냐?”

“광팬이지!! 내가 아역시절부터 고서정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거 아니냐!”

그래서 아직까지 결혼도 못하고 이 모양인가 싶어 조금 측은하다.

흥분해 날뛰는 그를 다독인 뒤, 용건을 꺼냈다.

“뭐? 그녀 뒷조사를 해 달라고?”

“그래. 기우일거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하고 싶어.”

“그녀를 조사하는 건 내키지 않는데……”

“너무 깊이까지 할 필요는 없어. 오늘 나와 만난게 정말 우연인지만 알아내면 되니까.”

“그래도……음? 음. 아니지, 이건 기회일수도!”

눈을 희번득 뜨는 모양새가 어찌 불안하다.

괜히 의뢰를 한 걸까?

“좋아. 의뢰는 내가 맡지. 확실하게 조사를 하겠어.”

“어이, 스토킹 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앞뒤 사정이 맞는 건지만 알아내라고.”

“후후후. 그 동안은 양심에 걸려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의뢰라 이거군.”

“……듣고 있냐?”

어째, 이상한 부분에서 불을 당긴 거 같다.

…… 실수 한 건 아니겠지?

#

그 뒤로 며칠간 도서관을 오가며 고서정을 계속해서 만났다.

그녀도 우리와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전화번호도 내어주고 간혹 도시락도 싸오며 친분을 쌓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다. 분명 매혹적인 이야기다. 미소나 세주 등도 매일같이 고서정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만날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고무식에게 걸어 둔 의뢰의 결과가 나왔다.

“루게릭 병? 그게 정말이냐?”

“……어. 내가 몇 번이나 확인 해 봤어. 그녀가 티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시점부터 되짚어서 주변 병원을 탐문. 개인 기록까지 전부 뒤지면서 찾아 낸 결과야. 루게릭 병. 확실해.”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움직이는 것도 멀쩡하고.”

“굉장히 희귀한 경우라고 하더군. 증상이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고 있다고 해. 하지만 그래도 병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길어야 몇 년 정도라고 하더군.”

밝게 웃던 고서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픈 사람이라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병을 의식적으로 잊은 걸까, 아니면 그마저도 털어버리고 여유를 즐기게 된 걸까.

“그리고 널 만난 건 우연이 맞아. 근처에 언니가 산다는 것도 맞고. 네가 도서관에 출입하기 전부터 근처에서 산책을 즐겼다고 하네.”

“그런가. 괜한 의심을 했군.”

“……저기 말이야.”

“음?”

고무식의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직 말 못한 내용이 더 남아 있는 건가?

“네 능력. 그걸로 그녀를 치료 할 수는 없을까?”

“신성력으로 말인가?”

“응. 현대 의학으로는 손 델 수 없는 부분이지만 신성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잖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아있는 그녀에게 이런 병은 너무 가혹해. 못 보인 모습이 얼마나 많은데.”

“음……”

어쩌면 가능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숨어서 몰래 치료를 진행한다고 해도 갑자기 병이 쾌유되면 그 특이성이 조명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단순하게 그녀의 회복에 관심 갈 가능성도 있지만, 루게릭병이라는 것이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보니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망설이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무식이 바짝 다가왔다.

“어이, 망설이지 말고. 한 사람 살리는 일이잖아.”

“조금 떨어져. 아무리 급해도 생각은 충분히 하고 결정해야 해.”

“설마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몰아붙이지 마. 그녀를 돕는 것이 내게 해가 된다면 고사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설마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 한 건 아니겠지?”

“……”

고무식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광팬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정에 약한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덜컥 결정해 버릴 사안이 아니다. 잘못 된 걸음 하나로 일은 얼마든지 꼬일 수 있으니까.

“일단 내가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지. 치료 할 수 있을지의 여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부탁한다. 이대로 죽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야.”

안 그런 사람도 있을까.

말을 아끼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나 할일도 바쁜데 무슨 남 일인가 싶지만 그래도 양심에 걸리는 게 있기는 하다.

고서정 그녀도 한 사람의 딸이고, 누군가의 지인일 거 아닌가. 고무식이 말 한 것처럼 가능하다면 나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게 사실이다. 의심이 풀린 이상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루게릭 병……”

루게릭병의 가장 큰 특징은 운동세포만을 선택적으로 파괴시킨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신체 능력이 점차 하락하고 제어 불능까지 빠져, 최종적으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 마땅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험적인 몇 가지 방법만이 나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발병 원인을 찾고 있지 못해 실질적인 진척이 불가능한 병이다.

“준경 씨도 굉장히 뜬금없네요. 갑자기 약속을 잡고 루게릭 병이라?”

“미안. 방법을 찾으려면 역시 너밖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

“……피. 그 말 때문에 도와주는 건 아니에요.”

축복의 사용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고 싶다.

흔적도 많이 남거니와 그것마저 막히면 정말 방법이 없다. 차라리 아노스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 중에서 효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답일 수도 있다. 특히, 세포 재생에 효력을 발휘하던 물약의 경우 생각을 조금 바꾸면 치료약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준경 씨의 말은 세포를 파괴하는 원인을 막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생을 시키자 이거죠?”

“아직까지 원인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어. 파괴되는 세포만 지속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어도, 어떤 면으로는 치료라고 할 수 있잖아.”

“흠. 병원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정지시킨다. 꽤 재미있는 발상이네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죠엘이 긍정을 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바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존스 홉킨스 병원이라는 말이 언뜻 들린 것도 같다. 전부 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싶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죠엘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세포를 배양해서 실험 해 보려면 시간이 꽤 필요 할 거예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군.”

“흐응. 설마 그 여자한테 반한 거예요? 그래서 도와주려는 건가요?”

“이건 단순히 도의적인 일. 그리고 반한 건 내가 아니라 고무식이야. 아주 눈에 불을 키고는 돕자고 난리던데.”

“엑. 전혀 안 어울려요. 가서 허튼 꿈꾸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손사래 친 죠엘이 짓궂게 웃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안 어울리기는 한다.

“그럼 부탁하지.”

누군가를 돕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고무식에게는 냉정하게 말을 했지만, 나 역시 돕고 싶은 건 사실이다. 결과가 잘 나와 그녀를 도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루게릭으로 힘들어 하는 다른 이들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성공하면 의학 센터라도 세워야 하는 게 아닐까?

돈으로 지원하고, 병을 치유하고. 이단을 막는 것 말고도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고 싶다.

※작가의 말

보통 신약이 임상시험 거쳐서 시판되는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사례가 조금 다양해서 감을 잡기가 어렵네요.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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