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59화 (159/240)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재판에 회부된 굴락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었다. 의회를 충돌 질해서 공왕파와 일전을 벌이거나 그대로 재판에 끌려가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하는 것이 최선. 허나, 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새어나갔다. 반박 할 수 없는 증거. 그것을 부정하다 생각하지는 않지만 외부로 보이는 시선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결과는 필패.

재판에 끌려가는 건 굴락이라는 신앙에 낙인을 찍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선택 할 수 있는 옵션은 뭐가 있을까?

첫째가 쿤 등이 예측했던 재판장 습격건. 아예 재판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공왕파의 수작으로 돌리면 돌 하나로 새 둘을 잡는 격. 시도 할 수 있는 최적의 수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상대방도 예측 할 수 있는 부분.

그렇다면 방비를 철저하게 할 것은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막아서는 적을 밀어서 넘어뜨리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판을 엎는 방법이 필요하다. 재판장을 지키는 일보다 더욱 급한 일을 만들어 병력을 분산시키는 수작 같은 것.

“자살 공작이라니……!

공왕이 더 없이 분한 얼굴로 팔걸이를 후려쳤다.

쿤은 굴락의 고위 사제와 밀담을 한 뒤, 사전 계획을 알아내고 바로 공왕을 찾아왔다. 그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적도의 계획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상태.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의심스럽군요. 갑자기 굴락의 고위 사제가 찾아와 자신들의 계획을 일러준다라.”

팍팍한 인상의 재무대신 루드락이 말꼬리를 잡았다.

쿤이 곧바로 노려보자, 입 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리고 있었다. 꽤나 재수없는 얼굴. 쿤이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겁니다. 그 전에 방비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흐음. 허나, 의심스럽다는 건 저도 동감하는 바외다. 이 또한 기만술의 일종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소이까?”

“이 정보로 기만할 전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선전은 가능하겠지. 일종의 밑밥처럼. 자살공작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면 의심되는 이들을 격리해야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 비춰질지는 예상하고 계십니까? 내전이 길어지며 수도의 민심이 흉흉한데, 그런 일까지 벌이면 자칫 반응이 안 좋게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수도 방위군의 총사령관, 작센까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쿤이 코끝을 찡긋거린 뒤, 남은 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델 백작. 꿍꿍이가 의심스러운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은 기대와는 정 반대였다.

“나도 같은 의견입니다. 적도의 무리 중 배신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지금 이런 시점에 등장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군요. 아무래도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수작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이라면 어찌 할 생각입니까? 자살 공작이라는 것이 한 둘 죽이고자 벌이는 일은 아닐 터. 수십. 수백이 죽어나갈 겁니다.”

“그렇다면 아쉬울 따름이죠.”

“……뭐?”

“냉정한 말일수도 있지만, 그런 공작에는 대응하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물론,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죠. 침착하게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몇 사람 죽는 것으로 혼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저울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굳이 이럴 때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몫 멜 필요는 없겠죠.”

쿤이 이를 악다문 채 쏘아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군.’

잠시 착각을 했었다.

친한 척 굴고, 얼굴을 많이 마주한다고 해서 지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부류가 되는 건 아니다. 오델은 본디 백작이었던 인물. 재무대신이나, 수도방위군의 총사령관도 마찬가지. 재력가와, 무가의 인물들이다.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쿤과는 달랐다.

“공왕. 공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으음. 양쪽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쿤, 그대가 맞이한 고위 사제. 지금 다시 불러 올 수 있겠나?”

“……무리입니다. 배신이 탄로 나기 전,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정보를 주기로 했으니, 그때라면 불러 올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럼 내일 확실한 정보를 받은 뒤에 결정하면 되지 않겠나? 자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하고 있으나, 섣불리 움직여서 틈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차피 정확한 위치 등을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도 계획 자체만 알 뿐 상세 내용은 모른다 했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상세하게 듣는 게 낫지 않겠나.”

한 발 물러선 절충안.

하지만 쿤은 공왕에게서 미진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정말로 신중을 기하겠다는 태도라기 보다면 쿤과 다른 셋의 사이를 아우르기 위한 회피성 발언에 가까웠다. 차라리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결정에 좋을 텐데.

‘……의미 없겠지.’

공왕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전에 잠시 일깨우기는 했으나, 그 때 뿐. 여전히 마음이 한 풀 꺾여 의욕이 없는 모습이다. 주변에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투며 갈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 정말로 무언가를 추진 할 수 있는 힘은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설득해 봤으나 의견은 바뀌지 않았다.

쿤은 힘없이 집무실을 벗어나야 했다.

#

“오빠, 어떻게 됐어요?”

복도에서 만난 라라가 물어왔다.

쿤이 답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공왕의 대처만 믿고 있다가는 몇이나 죽어 나갈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하게요?”

“우리끼리 무슨 수라도 내 봐야지.”

적이라면 수십이 죽든, 수백이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도의 사람은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용병 일을 하면서 숫하게 겪어 봤다. 의미 없는 명분 전쟁에 휘말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겁탈당한 채 죽은 어미 젓을 빠는 아이와, 아비의 팔 한 짝을 들고 우는 소녀.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이다. 게다가 전쟁을 주도하는 이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이득인가 아닌가.

‘나도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살면서 그런 걸 숫하게 외면했다.

아니, 어쩌면 가해자 쪽에 서서 한 팔 거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도 똑같은 행동을 하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수단도, 능력도 사람도 있다. 변하기 시작한 거라면 이런 곳에서 한 걸음 내딛어도 좋다.

쿤이 걸음을 세우고 라라를 돌아봤다.

“라라, 경비대로 가서 날랜 말 몇 마리와 경험 있는 노병 열 명 정도를 빌려와.”

“빌려줄까요?”

“네 얼굴이라면 다들 알고 있어. 아무런 말 하지 말고 그냥 요구를 해. 그렇다면 충분히 먹혀 들 거야.”

“알겠어요. 근데, 말과 병사는 뭐에 쓰게요?”

“사람들 사이에 굴락의 무리가 섞여 있다면 이를 찾는 게 우선이야. 하지만 상대를 선별 할 수 없다면, 전체적으로 흔들어 보는 수밖에.”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쿤의 손짓에 라라가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공왕의 딸. 별도의 명령이 없어도 경비 몇 명 정도는 손쉽게 내어 줄 것이다. 문제는 수도의 인구를 사람 몇 명 정도로 처리하기 힘들다는 사실.

“아도란, 주변에 있지. 나와 봐.”

“아도란, 여기.”

쿤의 부름에 아도란이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기척조차 전혀 없이.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지만, 지금은 그 특별한 능력이 필요했다.

“일전에 사용했던 그 마법 있지. 눈.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거.”

“응. 응. 아도란 기억하고 있어.”

“잘 됐네. 그걸로 수도내의 사람들을 전부 살펴야겠어. 해 줄 수 있겠지?”

“전부? 하늘. 둥둥.”

“이 정도면 될 거야.”

쿤이 무한의 주머니에서 커다란 금색 판자를 꺼내 들었다.

일전에 챙겨 갈 물건이라 집어넣었던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도란이 잠시 보다, 녹색 빛을 불러와서는 그 위로 무언가를 새겼다. 눈. 딱 그렇게 보이는 그림이 금색 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떠올라라.’

쿤의 손짓에 따라 금색 판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왕의 집무실 외벽을 넘어서 수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워낙 영역이 넓어 눈을 통해 전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개미 만 했다.

“쿤. 쿤. 여기, 무리.”

아도란이 빙글빙글 돌아 앞으로 오더니, 쿤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가 하려는 일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아. 어차피 눈은 보조적 역할만 할 생각이거든. 가서 프리실라나 이쪽으로 좀 불러 줘. 급한 일이 있다고.”

“응. 응. 프리실라.”

그림자 속으로 아도란이 사라졌다.

혼자서는 무리다. 프리실라의 마법이 있어야, 수도에 숨은 굴락을 찾는데 수단을 더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전체를 살필 수 있는 눈과, 적당한 속임수. 그리고 이단에 반발하는 신성력이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대규모로 죽는 건 피할 수 있다.’

아직 상대의 수단은 모른다.

하지만 자살 공작이라 해 놓고, 몇 사람 찌르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최선.

적어도 그것만은 하고 싶었다.

#

라라의 부름에 끌려온 고참 경비 제이슨은 불쑥 내미는 물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공왕의 두 자제를 수도로 데리고 왔으며, 굴락에 의한 반란(외부로 알려지기로 그렇다.)을 사전에 막은 인물. 그런 사람이 이런 시간에 왜 갑자기 불러서 물통 하나를 던져 준단 말인가.

의문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알다시피 수도의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해서, 제가 모시는 분의 힘을 빌려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 이렇게 움직이게 됐습니다.”

“……네?”

“그 물통에 들어있는 건 준경 교단에서 특별하게 제작하는 물건입니다. 생기를 회복시켜서 몸져누운 사람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죠.”

“아, 그러십니까?”

척 봐도 안 믿는 눈치다.

그렇다면 시범을 보여줘야지. 물통을 개봉해서 나무 주걱으로 한 잔을 떠 그에게 건넸다. 와락 구겨지는 얼굴이 먹기 싫어하는 티를 풀풀 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쪽은 공왕의 딸. 다른 한 쪽은 소문이 무성한 부상하는 권력자다. 어쩔 수 없이 물을 꼴딱꼴딱 마셨다.

“……어!?”

그러다 눈을 번쩍 뜨며 탄성을 흘렸다.

쿤이 슬쩍 웃었다. 아마 힘이 불끈불끈 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물통에 들어있는 건 근력을 늘려주는 라라제 물약이다. 그것에 신성력이 담긴 그리자를 가루로 만들어서 뿌렸다.

“어떤가요? 조금 도움이 될 거 같나요?”

“오……오!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건 확실히 도움이 될 거 같군요. 헌데, 이걸 이렇게 공짜로 나눠줘도 괜찮겠습니까? 신전이다 뭐다 해서, 종교에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있고, 종교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니까요. 다친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감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를 따라온 다른 경비들도 마찬가지. 쿤을 마치 성인 보듯 보고 있다. 딱 적당한 분위기. 쿤이 준비해 둔 물통을 들 수 있을 만큼 나눠 주었다.

“집집마다 나눠주기는 힘들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은 그래도 수도에서 오랫동안 사신 분들이죠?”

“뭐, 그렇죠. 저만 해도 삼십년 째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럼, 그 경험을 좀 빌리겠습니다. 인적이 뜸하거나, 왕래가 적은 사람들 위주로 좀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 지인들과 함께, 수도를 가로지르며 따로 움직이도록 할 테니까요.”

딱히 그럴 거란 확신은 없지만 왕래가 많고 사람들과 접촉이 많은 이들이 자살공작을 시도 할 거 같지는 않다. 맹신이라는 것은 사람을 좀먹는 질병과 같다. 그런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찾기에는 경험 많은 경비만큼 좋은 것도 없다.

밖으로 왕래가 없다 해도, 오래된 경비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적어도 나와는 볼 터. 거부하면 거부하는 데로, 마시면 마시는 데로 사람을 특정지어 살펴두면 된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건, 수도에 사람들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하. 제가 부탁을 드려야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경비들이 따로 떨어져 나갔다.

수도는 넓고 숫자는 적다. 저들이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처리 할 수 있는 숫자는 제한적. 이제부터는 쿤이 직접 나서야 할 때였다.

“오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게요?”

“생각이 있으니까 부른 거겠지? 하다 만 연구가 산더미라고.”

라라와 프리실라가 양쪽에서 질문을 던져왔다.

루루는 팔짱을 낀 채, 아도란은 빙글빙글 돌면서 ‘같은 마음이다.’ 라는 의미를 쏘아냈다. 쿤이 한 점의 당황도 없이 이 시선을 받으며 말을 했다.

“지금부터 포교하러 갈 생각이다.”

“포교?”

쿤이 신성력으로 가득 찬 그리자를 손으로 쥐어 부서뜨렸다.

흰색 가루가 주변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를 망령제어로 잡아 하나하나 들어 올렸다. 햇빛을 받은 가루가 마치 휘광처럼 몸 주변을 맴돌았다.

“서준경 교를 정식으로 알리겠어.”

※작가의 말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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