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말로 찾아 오셨군요!”
하루를 쉬고, 다시 도서관으로 찾아 간 쿤은 율트락과 재회 할 수 있었다.
석판. 온전한 형태로 찾아온 물건에 그는 감격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속을 감추고 사람을 이용하는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지만, 이 표정은 진실이었다. 쿤이 나쁘지 않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후우. 고생이 많았습니다. 근데, 같이 가셨던 분은……?”
“안 올라왔습니까? 들어간 이후로는 서로 갈라져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렇습니까?”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봤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쿤이 더 없이 단정한 얼굴로 눈빛을 받았다. 한참이나 보던 그도 더 이상 무언가를 읽을 수 없었는지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선판을 조심스레 검은 상자에 담아 두고는 말을 했다.
“뭐, 어쨌든 됐습니다. 약속 한 바는 지켰으니까요. 공개적으로 재판에 대한 걸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길어야 칠일. 그 안에 회의가 소집 될 것입니다.”
“흠. 약속을 지켜주니 고맙군요.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가능한 질문이라면 얼마든지요.”
지금 와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일이지만 호기심이라는 건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다. 애정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상자를 바라보는 율트락을 보며 쿤이 물었다.
“그 석판. 어째서 그렇게 찾고 싶어 한 겁니까?”
“후후. 아마도 그대는 저 아래에서 믿기 힘든 무언가와 조우를 했겠지요?”
“……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하카람의 기억. 오래 전 인간이 쌓을 수 없는 기술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만약, 이것을 쌓아 올린 존재가 저 아래에 숨 쉬고 있다면 이미 초월적인 어딘가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얘기겠죠.”
“그래서 그 증거를 원한 겁니까? 당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율트락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상자를 한 번 쓸고는 답을 했다.
“우리는 기록하는 자. 공백이 남은 이 나라의 역사에 항상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석판의 조각. 그것에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의 한 일면이 숨어 있었죠.”
“그렇다면 저 아래에서 있었던 일이 어떤 건지는 궁금하지 않은 겁니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경험한 일. 현대의 사람이 가진 생각이 포함된 경험이죠. 저는. 그리고 하카림의 기억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기록에만 의지합니다. 그것이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방법이죠.”
“그래서 직접 무언가를 보고 온 나보다, 석판을 믿겠다 이겁니까?”
“잘못 되었다 보십니까?”
석판에 적혀있는 게 자아분열한 드래곤의 횡설수설임을 아는 상황에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 생각한다면 굳이 또 반박하는 것도 우스운 일. 쿤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평안하시기를.”
굉장히 묘하고 독특한 인물이지만, 여기까지.
그들만의 사고와 환경을 존중하며 쿤이 물러났다.
언젠가 먼 훗날 자신의 이야기도 이곳에 적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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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트락과의 만남을 끝낸 쿤은 바로 공왕에게로 향했다.
이미 도서관 앞쪽에 그가 보낸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호위. 하지만 옅은 긴장감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벌써 견제가 들어오는 건가.’
공왕의 측근에서 힘을 쓰는 건 크게 세 사람을 추릴 수 있다.
한 명은 수도방위군의 총 사령관인 작센. 다른 한 명은 수도내의 모든 상업적 기관을 잡고 있는 재무대신 루드락이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오델 백작. 공화국이 건립되고 난 뒤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지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의회파가 굴락을 통해서 지방의 영향력을 확보했다면 공왕파에서는 그가 그 역할을 대신했었다.
쿤이 석판을 찾아 재판의 권한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공왕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다면 다음 행보는 재판의 회부와 의회파에 대한 견제. 굴락을 비롯한 무리를 한 번 밀어내고, 무언가 사특한 힘이라 대대적 선전을 하고 있으니 저울추가 기울고 있음은 그들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싸움이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다.
본디 의회파가 가지는 가장 큰 명분은 왕정 복귀를 노리는 공왕에 대한 탄핵. 하지만 그 명분은 대치가 길어지면서 힘을 잃었고, 쌍방의 선전과열로 진흙탕이 된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결국 본래부터 권력을 가지고 있던 공왕 쪽이 힘을 받는 건 당연한 일.
게임이 끝났을 때, 가장 큰 권력자의 그늘은 어느 쪽인가.
벌써부터 그 영역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귀찮군.’
쿤은 용병으로 돌아다니며 이런 류의 정치적 싸움을 여럿 목격했다.
그 결과는 하나같이 좋지 못하다. 신의로 도운 이들이 내팽개침 당해서 칼받이가 된 것도 수두룩. 결국 마지막 순간에 도와주는 건 자신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일행에게만 말 하고 비밀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끈쩍하게 들러붙는 음울한 기운이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 왔군! 왔어!”
그렇게 병사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 앞에 당도하니, 흰 수염의 거한이 앞서 반겼다. 그가 바로 오델 백작. 루루의 말에 의하면 지하로 석판을 찾으러 떠난 뒤부터 종종 찾아오며 안면을 텄다고 한다. 일단 태도 자체는 호의적. 하지만 세이혼은 그 꿍꿍이를 경고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델 백작.”
“하하.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소이다. 우리가 어디 남이오?”
“……하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그에게 쿤이 마지못해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래, 일은 잘 끝났소?”
“그럭저럭 잘 마무리 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들어가서 말씀 드리도록 하죠.”
“오, 그렇지. 이 늙은이가 가끔 깜빡깜빡하네.”
뭔가 따로 들을게 있나 싶어 말을 건네 봤던 거겠지.
쿤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이런 이들과도 상대를 해야 한다. 도통 맞지 않는 옷인지라 영 불편했다.
“어서 오게. 갔던 일은 성공한 건가?”
그렇게 집무실로 들어가자, 쿤 일행을 비롯한 몇 사람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쿤도 눈에 익었다. 하카림의 기억으로 가기 전 모였던 회동에서 익혀 둔 얼굴들이다. 수도방위군의 총사령관 작센과, 재무대신 루드락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다 다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빠르기도 하군.’
쿤이 일행과 눈인사를 한 뒤 가운데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고서장, 율트락에게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칠일 정도. 그 시간 안에 전문을 띄우겠다고 하더군요.”
“음! 잘 됐군, 잘 됐어. 역시 젊은 친구라 그런지 일처리가 빠르군!”
“오델 백작. 공왕께서 계신데, 그대가 그리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하. 칭찬도 못 하는가?”
“쯧. 때와 장소를 좀 가리시죠.”
날 선 인상의 루드락과 오델이 충돌했다.
그들보다 한 걸음 뒤에 떨어져 있는 공왕은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출발 전에 보았던 모습보다도 더 의욕이 없는 얼굴이다.
‘이단으로 증폭된 욕망이 부서진 여파인가. 회복은 안 되는 걸까?’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증폭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통째로 정화하였으니 쉽사리 정상으로 못 돌아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조금 과하다. 설사 권력을 나중에 양도한다 하더라도, 당장은 그가 기운을 좀 차려 줄 필요가 있었다.
윙……!
가볍게 망령제어를 운용했다.
공왕의 혼이 느껴졌다. 힘없이 늘어진 닭 같다. 머리통을 휘어잡은 채 흔들었다. 봄바람에 잠들었다가 물벼락에 깨어나는 것처럼 펄떡 날뛰었다.
‘이건 꽤 신기하군. 정화된 상처가 혼으로 나타나다니.’
욕구라는 것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혼으로 통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망령제어의 경지가 깊어지며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본래의 부드러운 성정까지 깨뜨리며 바닥을 친 공왕의 마음의 경우는 더욱 선명하게 그 상처가 보였다.
‘음. 무언가 더 있다면 이 상처 입은 혼을 회복시킬 수 있겠지만……’
아쉽지만 지금의 경지로는 혼을 흔들고 깨우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상처 입은 혼 자체를 회복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으음. 루드락, 오델. 그만들 하게나.”
하지만 그 정도로도 늘어져 있던 공왕을 깨우는 것은 가능했다.
칙칙한 안색을 밀어내고 공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 싸움을 하던 루드락과 오델이 공왕의 목소리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어찌 되었건 이 자리에서 최고 권력자는 공왕이었다.
“실례를 했군. 그래, 갔던 일은 잘 해결 됐다는 건가?”
“네. 조만간 재판이 열리게 되면 굴락에 대한 처우를 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렇군. 잘 됐어. 일단 재판이 열리게 되면, 굴락의 주 구성원들은 수도로 모일 수밖에 없을 터. 결과와 상관없이 그들의 힘은 약해질 거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공개 재판으로 그 죄목을 설명하고, 변론하는 기회를 가지네. 그리고 나서 무작위로 추첨된 배심원들이 이를 판결하게 되지.”
“무작위? 일반 시민 중에 뽑히는 겁니까?”
“재판장이 무작위로 선출하네. 그곳은 나나 의회에도 손이 닿지 않는 청정 지역이지. 자네가 굴락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배심원의 표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거네.”
중립세력이 주체하는 재판.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다. 의회쪽에서 손을 쓰지 않을까 싶지만, 그 정도는 이쪽에서도 알아서 방어를 하고 있을 터. 결국 굴락이 가진 위험성만 제대로 설득시키면 된다.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니, 재판에 세우기만 하면 끝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건 굴락 쪽에서도 알겠지.’
피하면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고 와도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다.
취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되면, 선택 할 수 있는 수단은……
“어쩌면 최후의 발악을 할 수도 있겠네요.”
“재판장? 그들이 습격당할 수도 있겠군.”
쿤이 고개를 돌렸다.
라라와 마지막 말이 겹쳤기 때문이다. 최후의 발악. 그 상세한 내용으로 재판장 습격을 들었다. 공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내의 다른 인물들도 긍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재판을 거부 할 수 없다면, 그 주체가 되는 곳을 없애버리면 되겠군.”
“하지만 중립지역에,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테일러 공이 있는 장소입니다. 공격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득이 크지 않을 거 같은데요.”
“뒤집어씌우면 되겠지요.”
“뒤집어씌운다? 우리에게 말이오?”
유일하게 미진한 기색을 내비쳤던 작센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어차피 방법이 없다면 그게 최선이겠죠. 그쪽에 대한 로비나 회유가 아닌, 공격.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렇게 되면 재판도 무용지물. 회유를 하려 했던 공왕측이 일이 틀어져 모두를 죽였다. 이런 식으로 사실을 날조하면 덮어씌우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봅니다.”
“그걸 누구 믿겠소?”
“믿든 안 믿든 상관없겠죠. 중요한 건 책임소재를 공중에 붕 뜨게 한 것이니까요”
“흠……”
군인이라 그런지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안 굴러가는 모양이다.
쿤이 팔짱을 낀 채 세이혼 쪽을 돌아봤다.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보내고 있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똥물이라도 뿌리고 싶은 게 인간 심정이다. 순순히 끌려와서 재판에 회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지.”
그때, 듣고 있던 공왕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작센은 수도의 병력을 수습해서 의회 쪽의 도발을 대비해 주게. 사태가 변했으니 그쪽의 움직임도 다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네.”
“알겠습니다.”
“루드락. 자네는 상회들의 동향을 살펴 주게나. 큰 움직임을 위해서는 물자의 이동이 필수적이지. 사전에 알아 낼 수 있다면 대비하기가 한결 편할 거네.”
“맡겨 주시기를.”
“그리고 오델. 자네는 아직까지 눈치를 보는 이들에게 소식을 좀 돌려주게나. 상황이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선을 대라고. 그래야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 무언가 손에 쥘 수 있지 않겠나.”
“음. 넌지시 말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말들은 의회파에 대항하는 전체적인 지침.
공왕이 한 숨을 쉬고, 고개를 들어 쿤을 봤다.
“마지막으로, 쿤 자네가 재판장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하네. 만일의 공격을 대비하고, 사전에 안 좋은 일들을 차단해 주게나. 재판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 아무 일 없도록 말일세.”
“……”
그럴 시간 없다.
지하로 내려가서 드래곤이 깔고 앉은 그리자를 정화하기도 바쁜데, 어딜 간다는 말인가. 쿤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건 제가 맡도록 하죠.”
“……세이혼? 자네가 말인가?”
“하푼. 절반도 안 남았지만 그놈들이라도 추슬러 훈련시키면 대충 구색은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데리고 재판장을 맡도록 하죠.”
“그래주겠나?”
“일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어디론가 떠나기도 힘들 테니……적어도 그때 까지는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이혼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쿤이 슬쩍 웃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 법이다. 세이혼이라면 하푼의 전대 대장. 본래부터 그 자리를 맡기려고 했으니, 명분으로도 좋다.
“……그럼 부탁하도록 하지.”
일이 마무리 되었다.
쿤은 맡은 일 없이. 살짝 술렁이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아마도 공왕이 무언가 쿤에게 일을 맡기고, 그것을 견제하느냐, 돕느냐의 흐름으로 갈 거라 예상했기 때문.
하지만 그건 남 사정이고, 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한가해진 상황이 좋다.
“그럼, 전 그 동안 두 분을 보호하도록 하죠.”
라라와 루루.
쿤의 손끝에 둘이 닿아 있었다.
공왕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그래 줄 수 있겠나?”
“지금껏 그래왔으니까요.”
특히 한 사람은 더욱.
속말은 가슴으로 삼키며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게 흘러가는 흐름 속, 한 가닥의 여유를 챙겼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가 더 바쁘겠지.’
남의 눈을 벗어나 일해야 하니까.
노동의 계절이다. 쉴 시간은 없다.
※작가의 말
공왕이 벌떡. 공왕이 벌떡. 벌떡. 벌떡. 벌떡벌떡벌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