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알았지만, 쿤이 누워있던 곳은 드래곤이 있던 암굴에서 위로 올라온 지역. 즉, 본래 있던 지하 동굴의 한 곳이었다. 설명으로는 하카림이 아직 타락하기 전, 인간의 형태로 올라와 지내던 방이라고 한다.
하카림은 본래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예술적인 드래곤이었다.
그의 창고에 있던 금과 보석, 다양한 조각품들은 그런 성격의 연장선에서 수집한 것들이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야 납득이 안 가는 양이지만 드래곤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특이하다 할 정도로 성격이 유별났었다.
쿤은 프리실라에게 정화를 하는 대가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지하공간의 사유화였다. 지하에 놓인 금은보화와 온갖 물건들을 남에게 줄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싸움이 진행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큰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게 없으면 항상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공왕? 지금이야 일단 손을 잡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쪽 세력이 쿤을 얼마나 용인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의 후광으로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있기야 하지만, 못 본 사람이 훨씬 많다. 사람은 본디,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부정하려는 습성이 있다. 의회와의 싸움이 정리되면 공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 쓴 칼을 버리려는 움직임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아도란. 아도란도. 꾸미고 싶어.”
프리실라를 통해서 지하 동굴에 설치된 각종 마법과 함정.
그리고 숨겨진 지역의 정보를 전해받기로 했다. 그리고 드래곤이 깔고 앉은 그리자를 정화하면서 그 영역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지하 요새 개념. 가장 커다란 공동에 ‘서 준경’을 기리는 신상과 제단을 세우고 외부로 통하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만들 생각이었다. 본디, 공간이동을 막고 있던 힘은 하카림이 죽으면서 해제되었기 때문에 프리실라의 도움으로 충분히 설치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인간, 그대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드래곤, 하카림과의 의견 조율이다.
엄연히 지하 동굴은 그의 영역. 그리자를 봉인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다지만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맙다면,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됩니다.”
—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은 것인가?
당돌한 쿤의 말에 드래곤의 말투에 호기심이 어렸다.
쿤이 콧김을 내뿜었다. 두렵지 않느냐? 물론, 두렵다. 무려 드래곤이다. 암굴 안으로 엿보이는 모습만 봐도 일국 정도는 콧바람으로 뭉개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게다가 하카림의 타락한 영혼에게서 받았던 공포감. 진실 된 드래곤이 앞에 선다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몰려올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 정도에서 두려워하다가는 그때의 그 무력감을 또 다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는 정말로 싫었다. 차라리 공포감에 오줌을 지리는 편이 낫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각오가 서자, 공포감은 의외로 쉽게 가라앉았다.
손과 발은 조금 떨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다.
“두려워해도 같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같다면 후자의 것이 낫겠죠. 그리고 살아생전에 드래곤에게 또 언제 요구를 해 보겠습니까?”
— 하하. 옳구나. 그대는 현명한 인간이야. 좋다. 이제부터 이곳은 그대의 것이다.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다오.
협상 타결.
쿤은 지하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대가로, 드래곤이 봉인중인 그리자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을 했다. 다만, 그 크기라는 것이 아도란이 지키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암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는 그 크기를 전부 설명하지 못했다.
지하로 수십 미터.
공화국 수도 전역을 뒤덮을 정도의 크기가 그 아래로 자리하고 있었다. 쿤이 해야 하는 건 평생에 걸친 정화였다. 그런 게 전부 셋이니, 만약 당대로 지정된 영웅담이라면 시리즈로 나와야 결말이 날 거 같았다.
“그래서 그 힘이라는 건 신의 능력이라는 건가?”
그렇게 상황을 일단락 짓고, 도서관으로 올라 갈 날짜를 셈하고 있을 때, 프리실라가 쿤을 찾아왔다. 그는 라라를 간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아,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밖에는 깨어 있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젖은 수건으로 라라의 땀을 닦아내며 쿤이 답했다.
“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서 준경 신의 힘은 이단에 상극으로 작용을 하는 거 같습니다.”
“상극이라. 정화를 시킨 힘도 그것에 기인하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죠. 밀어 낸다……아니, 아예 부정한다고 보는 것을 옳을 거 같아요.”
“부정이라. 일반적으로 한 가지 힘에 대해서 그 정도가지 상극의 성질을 지니기는 힘든데.”
프리실라가 턱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라는 것은 ‘여기까지가 내 영역!’ 이라고 외치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다. 마법도, 주술도, 흑마법도. 심지어 잊힌 고대 종족의 진언조차 어느 정도는 영역을 겹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하게 반대 입장에 서서 부정한다는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산물로는 이해 할 수 없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네가 모시는 신은 그리자의 힘을 낳은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군.”
“……무슨 소리죠?”
쿤이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순수한 힘을 타고 난 존재의 경우 자신과 반대되는 힘을 안에서 만들어내지. 일종의 균형이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는 것처럼, 양 극단을 만들어 균형을 잡는 것이지.”
“허면, 서 준경 신의 힘이 이단과 한곳에서 나왔다는 건가요?”
“가정이지만 가능하다. 다른 모든 힘들로 정화가 불가능한데, 네가 모시는 분의 힘만이 가능하다면 이치에도 맞지 않나?”
이단과 ‘서 준경’의 힘이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죽어라 싸운 입장에서는 부정하고 싶지만, 프리실라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 마치 등을 댄 존재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발견한 제단도 어쩌면 부서진 이단의 파편마냥 그곳에 떨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다만, 그렇다면 힘의 규모가 납득이 안 간다.
한 쪽은 드래곤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규모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쿤이 가진 건 고작 하나의 씨앗에 불과했으니까. 지금껏 키워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고는 있다만 과거 같았으면 한 번에 쓸려갈 정도의 힘에 불과했다.
“뭐, 그 힘에 대해서는 천천히 연구해 보자고. 어차피 이 일대는 너를 위해 개조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최후의 문도 이쪽으로 오는 건가요?”
“그건 좀 힘들어. 남은 일원은 저마다 맡은 일이 있거든. 게다가 지금은 숲의 여왕의 처지도 녹록치 않아서 인원을 빼기가 힘들어. 아마 나도 조만간 그곳으로 가 봐야 할지도 몰라.”
“그럼, 이쪽의 마법은 누가 관리를 합니까?”
“아도란을 두고 갈 거야.”
잘 대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신뢰와 친절은 동일선상의 단어가 아니다.
쿤이 조금 미심쩍게 바라보자, 프리실라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러면서, 손바닥보다 작은 석판 하나를 건넸다.
“마법진은 이미 설치해 뒀어. 석판으로 오가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쪽에 일손이 필요할 거 같아서 내가 따로 사람을 불렀어.”
“이곳으로요?”
“본래부터 인연이 있던 이들이라 그런지 군말 없이 협조를 해 준다고 하더군.”
“인간들 사이에 소식이 퍼졌을 리는 없고, 인연이라 하면 드워픈가요?”
“호오. 역시 명석하네?”
창고에 있던 장비들에 유독 드워프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예술을 사랑하던 드래곤과 드워프라. 솔직히 와 닿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의심해서 뭐하겠는가. 그리고 드워프라면 손재주가 좋기로 유명한 종족. 전해지는 이야기의 절반이라도 사실이라면 지하 동굴을 꾸미기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신상 조각도 해준답니까?”
“아하하. 그건 오면 알아서 잘 해결해 보라고. 그쪽에는 원 없이 만들고 조각 할 수 있다고 말 해 뒀으니까.”
“보수는 어찌 줍니까? 공짜로 일 할 일은 없고.”
“드워프들은 돌을 좋아해. 특히, 희귀한 것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살기 때문에 공용 화폐나 이런 건 의미가 없어. 지역에 보이던 열화된 광석들을 주면 아주 좋아할걸? 워낙 오래전부터 고온 고압에 노출된 것들이라 보기 드문 특성을 지니고 있거든.”
“바닥에 널려있던 그거요?”
“뭐, 가치라는 건 상대적인 거니까.”
이런 사기꾼을 봤나.
하지만 굳이 돈 주지 않고 드워프를 부릴 수 있다면 거부 할 이유는 없다. 그녀 말대로 가치는 상대적인 거니까. 있는 걸로 지불을 하고, 취향 따라 필요한 걸 좀 챙겨서 주면 고용주로서 할 일은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한다 치고……위에는 어찌합니까?”
“위? 뭐?”
“석판이야 찾았지만, 그걸 들고 가면 당장 굴락의 인원을 불러와 재판부터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의회 측 병력을 제어하기 위해 힘겨루기도 해야 하고, 내전이 확산되지 않도록 민심도 살펴야죠. 이미 공왕과 약속한 바가 있어, 위쪽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포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아래 정화 적업은 어찌 합니까?”
“몸을 두개로 가르면 안 될까?”
“갈라서 안 죽으면 갈라 보시죠.”
“피. 농담이 안 통하네?”
프리실라가 귀여운 척 툴툴거렸지만, 쿤은 상큼하게 무시했다.
아래쪽 공사와 정화만큼, 공화국 내부의 일도 중요하다. 일단 굴락을 재판에 회부하고, 의회를 견제하는 대가로 국교를 약속받았다. 제단과 신상을 각지에 건립하고 신도를 대대적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힘을 써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귀엽게 찡찡 거린다고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대규모 마법으로 의회쪽 사람들을 한 번에 날려버려 줄까?”
“가능합니까?”
“뭐, 원한다면. 수천 정도 죽고 나면 그쪽도 알아서 포기하지 않겠어?”
“필요한 조건이라도 있습니까?”
“……진심으로 묻는 거야?”
한 박자 늦게 프리실라가 물었으나, 쿤은 흔들림 없이 눈을 마주봤다.
수천. 죽는다면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처리 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눈을 맞추다, 프리실라가 물러났다.
“진심인가보네. 너, 의외로 무섭구나? 아니면 싸움의 상처가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거니?”
“어느 쪽이든 쓸 수 있다면 써야죠. 어차피 적이라 한다면 사정 봐 줄 여유는 없습니다.”
“무섭네, 무서워. 하지만 그 정도 대규모 마법은 무리야.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쪽에서 타락한 이들이 꽤 있거든. 아마 마법을 사용하면 대번에 쫓아오겠지.”
“그럼 결국 해결 방안이 없다는 건가요?”
쿤이 다시금 물었다.
지상이나 지하나 쿤이 없다면 일을 해결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지상의 일을 해결하고 내려오면 될까도 싶지만, 그러다 또 다시 하카림의 일부가 타락해 버리면 뒷감당이 곤란하다. 가능하면 한 번에 두 가지를 전부 처리하고 싶었다.
“푸후후. 어쩔 수 없네. 그럼 위쪽 일은 내가 해결해 줄게.”
“또 농담인건 아니겠죠?”
“설마. 큰 마법은 무리지만, 사람 몇 홀리는 건 일도 아니야. 숲의 여왕을 보러가기 전까지 위의 상황을 정리해 둘게. 공왕의 주도하에, 내전만 정리되면 신상을 세우고 제단을 건립하는 건 틈 내서 처리해도 가능하잖아. 안 그래?”
“그 정도라면 가능 할 거 같네요.”
어떻게? 라는 의문이 남아 있지만, 상대는 마법사다.
그것도 미친 마법사 아도란을 함부로 대할 만큼 급이 높은 존재. 드래곤을 만나고 다른 것들이 죄다 우스워 졌다지만, 그 이름값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된다고 장담했다면 되는 것이 맞다.
“으, 으음……”
그 순간, 잠들어 있던 라라가 뒤척이며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였다.
프리실리가 입술을 죽 내밀고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기상임에도 요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쿤은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지만.
“아쉬워라. 님이 깨어났으니, 삼자는 빠져 줄게.”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매정하네.”
“아직 안 갔습니까?”
천하의 프리실라도 이 말에는 살짝 발끈.
눈썹을 앙큼하게 올렸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깨어난 라라를 보는 쿤의 눈빛이 너무 다정했기 때문이다.
‘나도 젊은 남자나 하나 낚아 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금 처량했다.
※작가의 말
이걸로 이번 파트는 종료.
획득한 능력등은 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
‘연극’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