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의 몸 주변으로 새카만 띠가 둘러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힘이 그 위로 모여들더니, 뚜렷한 파동을 뿜어냈다. 멍하니 있던 쿤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너……”
쇳소리 같은 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쿤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잡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머리가 하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온간 사고 관련 특기들이 힘을 잃고, 분노에 집중되었다.
핏발이 서고, 악다문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거리를 한 번에 축약하며 하카림을 노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다른 사고를 배제했다. 오직 하나만이 뇌리를 지재했다. 아득할 정도의 살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살의를 느껴 본 적이 없다.
목숨 건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친우의 배신에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흑마법이라는 거다. 죽음과 파괴에서 힘을 얻지. 이 얼마나 아름다운 힘의 고동인가.”
“닥쳐어어어!!!”
검고 탁한 기운이 몰아쳤다.
쿤이 아쿤으로 이를 찢고 들어갔다. 분노로 점철된 의념은 거칠기 짝이 없는 폭풍이 되어 힘을 분쇄했다. 갈라지고 갈라지고. 몸이 찢겨 핏물을 쏟아냄에도 쿤은 거침없이 뛰어 들어갔다.
“그래. 그게 인간의 모습이지. 더욱 분노해라. 그것이 내 자양분이 되어 줄 테니까.”
“내가 그렇게……”
[이단에 대한 징벌이 발동합니다.]
“둘 줄 아느냐!!!!”
모든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고의 시간이 몸을 찢어발기는 고통을 능력으로 치환했다. 순간적으로 모든 능력이 50을 돌파했다. 이건 인간이 낼 수 있는 한계 능력보다도 높은 수치. 몸이 새빨갛게 변해서 거인처럼 부풀어 올랐다. 찍어 누르던 힘이 단번에 분쇄되고 몸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하하. 인간 이상의 힘이구나. 하지만 어리석다.”
검은 색 파동이 쿤의 몸을 때렸다.
달려가던 그대로 허리가 꺾여서 뒤로 밀려났다. 염동력으로 몸을 부여잡고, 망령제어로 바닥을 들어 올렸다. 밀리는 힘을 타 뒤로 돈 뒤, 품 안의 약병들을 집히는 대로 던졌다. 불꽃과 악취. 순간이나마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인다—!’
일어난 지면을 차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던졌다.
호선을 그리며 나아간 단검이 하카림의 주변에서 빛무리에 막혀서 튕겨나갔다. 법복. 빌어먹을 데미안이 죽고 남긴 물건은 이번에도 방해를 하고 있었다.
신성 대지의 축복.
바닥으로 흰색 길이 생겨났다.
힘이 늘어나고, 하카림이 살짝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찌됐든 이단을 가지고 있는 건 맞다. 아쿤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린 뒤 떨어지는 힘을 보태어 그의 머리위로 찍어 내렸다.
파지직—!!
법복의 방어력이 한 순간 저항을 하고 찢겨나갔다.
이단에 대한 징벌과, 머리끝까지 오른 분노가 압도적인 거력을 발휘했다. 순수한 물리적 파괴력이 법복의 방어력을 넘어선 것이다.
“죽어버려!!!!”
남은 건 하나로 몰아치는 살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역시 통일된 의념. 붉게 물든 파동이 아쿤을 타고 흐르며 하카림의 머리를 쪼개가 위해서 떨어졌다.
마치 피의 단두대처럼.
“어리석다, 인간.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네 분노와 살의. 삶에 대한 집념은 내가 부활하는 양분이 될 테니까.”
“닥쳐, 드래곤!! 네놈 따위의 양분이 되기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다!!”
“어차피 백년도 살지 못하는 너희 따위가 내 시간의 무거움을 알까. 날 풀어준 일을 고려하여 목숨은 붙여주지. 그 상태로 지켜보거라.”
쩌엉.
검은 빛 무리가 쿤의 몸을 옭아맸다.
의식의 검이 가닥을 하나씩 끊어냈지만, 스물스물 올라오는 검은 빛 무리는 끝도 없었다. 잘라내는 속도보다 빠르게 쿤의 몸을 에워쌌다. 아쿤을 잡은 손이 검게 물들고 팔, 어깨. 목 언저리까지 전부 휘감겼다.
인간을 초월한 힘도, 수없이 쌓아 올린 특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종의 한계. 인간이 드래곤과 비교하여 올릴 수 있는 높이의 차이였다. 무력감이 구역질 날것처럼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라라를 구할 수도.
복수를 위해 검을 들지도. 무엇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여기서 주저앉아야 하는가. 잊힌 드래곤이라는 한 생명의 재탄생을 위한 재물로.
‘그럴 수는 없어!!’
의식을 집중했다.
집중하고, 집중했다. 한 점으로 모았다. 어차피 하카림의 힘을 모두 베어내는 건 무리. 몸을 지키며 적을 말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적을 주살하겠다.
될 대로 되라.
어차피 좆같아진 상황.
너 죽고, 나 죽자는 심보다.
의식이 콩 한 톨의 크기로 집중되었다.
아쿤을 들 수고, 주먹을 뻗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집중한 의식을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쏘아내는 일. 어떤 도구 없이 성공해 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지금은 변명 할 게 아니라 성공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저 빌어먹을 드래곤의 얼굴에 똥칠을 하기 위해서.
라라가 흘린 피를 위해서도……
“하카림……”
“포기 한 건가, 인간?”
목 아래까지 올라온 검은 기운에 쿤이 힘겹게 말을 했다.
하카림이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은 더없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마법에 대해서 아는 건 아니지만, 이것이 완성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예측이 됐다.
‘그렇게 두지는 않는다.’
콩알만큼 모인 의식의 힘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나 느리고 지루한 작업이다. 떨어진 실타래를 하나씩 손으로 끌어 당겨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것 같다.
아무런 도구 없이 의식을 집중시켜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
단순히 도구의 차이일 뿐이지 않나?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지만, 차이는 너무 명확했다. 쿤의 몸이 벌벌 떨리고 코에서는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굴위로는 혈관이 도드라져 당장이라도 죽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인간,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의미 없다. 인간이 내게 대적 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냥 그대로 위대한 존재의 부활을 지켜봐라.”
“조……”
“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하카림이 눈을 좁히고 귀를 기울였다.
상대는 천년이 넘게 갇혀있던 존재. 그 결실로 자신이 부활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모습을 누군가 지켜봤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다. 굳이 쿤을 남겨놓고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 죽어가는 그의 모습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까.”
그것이 틈.
쿤의 만들어낸 의식의 구체가 허공을 가르고 튀어나갔다. 이를 감지한 하카림이 검은 기운을 만들어 막아내려 했지만, 극도로 집중된 의식의 힘은 단순히 만들어 내는 힘의 파동을 가볍게 무시했다. 검은 장막이 뻥뻥 뚫리고, 궤적이 하카림의 이마에 닿았다.
채엥—!!!
부서지는 금색 관.
희미한 파동이 주변으로 겹쳐지며 퍼져나갔다.
힘의 해제. 쿤을 감싸고 있던 검은 줄기들 역시 한 순간에 사라졌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비틀비틀.
흔들리는 몸으로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하카림이 외쳤다. 깨어진 금색 관을 손으로 이어 붙이려 하지만 그게 될 리 없다. 쿤이 의식에 담아 둔 것은 아주 단순한 내용. 파괴. 하카림이 집중시키는 의식이 그것보다 높지 않다면 이를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크, 크아아아아아!!!!”
하카림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폭포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는 몸을 전부 집어 삼키고, 구멍이란 구멍으로 모두 스며들어갔다. 척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 ‘흑마법.’ 그 단어 자체에서 쿤은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금색 관을 깨어내는 것으로 마법이 중간에 막혔다. 지금 모습은 그 반작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카림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이 역시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카림의 서를 타고 데미안이 찾아왔다는 것.
그 자체에 거짓은 없다. 즉, 하카림이라는 드래곤이 미치기 전에는 인간이 이 아래로 내려와 관리자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금색 관은 아마도 그 상징. 데미안이 이를 찾아 광소를 터뜨렸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
그렇기에 하카림은 쿤을 이용하여 데미안을 쓰러뜨리고, 그 육체를 탐한 것이다. 본래 자신을 다스리던 금색 관을 손에 넣고, 쿤과 라라를 이용하여 흑마법을 사용하기 용이한 상황이었으니까.
“……라라!”
쿤이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염동력을 발휘했다.
암굴 가운데에 떠 있던 그녀를 당겨왔다. 검은 기운이 베일처럼 몸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는데, 주체인 하카람이 제어를 놓은 뒤에도 침식되지 않고 있었다.
‘헤밀턴의 암 가드!’
쿤의 공격 자체는 워낙 강력하여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지만, 흑마법의 실패로 역류해 오는 힘 자체는 방어 할 수 있었다. 라라의 몸 주변으로 흙색 장막이 은은하게 펼쳐져 검은 기운과 대치했다.
쿤이 축복을 연거푸 라라의 몸에 쏟아냈다.
축성지를 깔고, 상처 치유를 반복했다. 검은 기운은 대상자인 라라가 힘을 찾아 갈수록 점차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쿤이 온전히 드러난 얼굴 위로 귀를 대며 숨을 살폈다. 아주 희미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라……제발!’
있던 점수는 모두 치료에 들어갔다.
남은 건 손으로 엉겨 붙은 어둠을 떼어내는 일. 의식의 힘은 완전 바닥이 나서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그냥 막무가내로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쿤……오빠.”
“라라!! 정신이 들어!?”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얼굴위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레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차가웠다.
“나……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안 나요.”
“괜찮아, 아무 말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입술을 잘근 씹으며, 쿤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약을 들어 올렸다.
치료용으로 사용되는 물약이 몇 개 있었다. 냄새로 확인을 한 뒤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로 흘려보냈다.
“콜록……! 콜록!”
쉽지 않다.
아쿤이 관통한 상처만이라면 이미 치료가 되겠지만, 하카림이 한 수작 때문에 회복이 매우 더뎠다. 검은 기운을 모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체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쿤이 잠시 생각하다 물약을 입에 머금은 뒤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동그랗게 뜨이는 라라의 눈동자.
안 봐도 알 수 있는 표정이지만, 쿤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를 살리는 것만이 중요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몇 번이나 이를 반복하며, 남은 물약을 전부 그녀에게 먹였다.
희미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 상처 주변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도 그녀가 활기를 찾으며 조금씩 밀려났다.
“크으으……아아아아아!!!!”
그 순간, 괴성과 함께 강력한 파동이 쿤의 등 뒤를 후려쳤다.
초감각으로 감지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라라를 품 안에 안은 뒤, 몸을 숙였다. 오링의 망토가 둥글게 말리더니, 쏟아지는 파동을 어느 정도 여과해 주었다.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 할 수 없다!!!”
검은 연기가 걷히고, 괴이한 형태의 하카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 팔과 한 쪽 다리가 부서지고, 그 위치로 검붉은 육체가 대신하고 있었다. 이단의 힘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형태가 기묘하다. 이질적인 기운 역시 포함되어 있고.
마치……
“헬 보이(Hell Boy)라니. 희귀한 것을 보게 되는군.”
“……!”
기척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허공의 한 부분이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두 사람을 뱉어냈다.
한 명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녀.
다른 한 명은 음침한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신원 불명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쿤은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도란!!!”
“안녕. 쿤.”
익숙한 말투로, 그가 답을 했다.
※작가의 말
아도란 등장.
서버야 아프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