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거리를 둔 채 데미안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초감각과 하푼식 감각수련법은 먼 거리에도 그를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딱히 숨길 것 없이 가는 통에 흔적을 추적하기도 쉬웠다.
“나중에 알면 화내겠는데요?”
“화만 날까? 아주 뒤집어지게 만들어 줘야지.”
“와, 잔인해라.”
자잘한 농담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통로는 가끔 둘 혹은 셋으로 갈라졌으나 그리 복잡한 형태는 아니었다. 가다가 막히고, 가다가 막히고. 결국 한 쪽 통로만 남는 형태였다.
앞서가던 데미안 일행은 더 이상 쿤의 흔적이 없자 쫓기를 포기했는지 알아서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뒤따르는 쿤과 라라는 번거롭게 길을 오갈 필요 없이 뚫린 통로만 쫓아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공간은 정말로 특이하군. 최초 하카림의 기억을 만든 존재가 이런 곳을 구현시켜 둔 건가?’
기이할 정도의 열기와 숨기진 통로.
확실히 사람이 인력을 들여서 만든 것이라 보기 힘들었다. 아마도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 어쩌면 신일 수도 있다. 잊힌 채 방치 돼 있던 서 준경 신의 제단도 있다. 지금 이 공간도 그러한 것의 일부가 아니란 법은 없다.
어떤 신이 깨어나, 자신의 일부가 담긴 물건으로 사람을 부른다.
‘잠깐. 그런 거면 이 불꽃은 그 부름을 방해한다는 거잖아.’
찻잎을 본 것도, 석판이 힘을 잃은 것도.
누군가를 부르는 힘의 존재와, 이를 방해하는 존재. 둘로 나누어서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고로, 무언가 이 공간을 만들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의미.
‘설마, 신끼리 싸워서 이 바닥에 묻힌 건……’
기잉—!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강력한 힘의 파동이 쿤의 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즉시 걸음을 멈추고 라라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숙였다.
콰후후후!!!
이내, 어마어마한 열기와 함께 불의 파도가 통로의 저편으로 쏟아져 나왔다.
쿤이 몸을 기댄 돌 위로 불꽃이 쏟아졌다. 각인으로 저항력을 높였음에도 열기가 몸으로 침투할 정도였다. 손과 얼굴 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에요!?”
“숙이고 있어!”
쿤이 재빨리 무한의 주머니를 열어서 흑기사를 한 구 꺼냈다.
그리고 망령제어로 제어하며 앞으로 내밀었다. 불꽃이 그 앞으로 엉겨 붙더니 옆으로 흩어졌다. 파도가 연달이 놓인 돌에 부서져 포말을 남긴 채 흩어지는 것처럼.
쿵—!
그리고 뒤이어 둔중한 충격이 동굴을 타고 흘렀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통로 사이로 빠져나와 일행을 스쳐갔다. 바닥이 덜덜 떨리고, 돌조각이 모래마냥 비산했다.
“꺄악!!”
“꽉 잡아라!”
쿤이 라라의 허리춤을 휘감고는 몸을 숙였다.
몰아치는 바람은 한 번이 아니었다. 초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불꽃을 막았던 흑기사를 앞으로 던져 둔 채 바닥에 최대한 밀착했다. 열풍이 윙— 하는 소리를 내며 돌더니, 또 다시 통로로 몰아쳤다.
“크아아아아아!!!!”
먼 거리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이 앞서 간 장소다. 그의 비명이거나, 일행 중 하나. 거리가 있는 쿤과 라라조차 지금 벌어지는 현상에 휘말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앞서 간 그들이 어떤 꼴일지는 상상 안 해도 뻔하다.
‘무슨 일이지? 데미안이 앞쪽에서 함정이라도 발동시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여파가 너무 크다.
불의 파도가 통로를 휩쓸고, 후속타가 동굴 전체를 흔든다? 어떤 멍청이가 함정을 그렇게 설치하겠는가. 여차하면 통째로 무너져 버릴 수 있는데.
“쿤, 오빠!!”
“나도 봤다.”
그 순간, 쿤이 라라의 손짓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을 정리하는 찰나, 적의어린 기척이 등 뒤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라라의 눈동자에 비친 적색 괴 형상을 머릿속에 담으며 그대로 아쿤을 잡아서 날렸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형상이 뒤로 넘어갔다.
쿤이 아쿤을 다시 불러 온 뒤, 허리춤에서 여분의 단검을 뽑아 양 손으로 사정없이 던졌다. 순식간에 여섯 개의 단검이 형상에 꽂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동굴 안을 크게 울렸다.
“……골렘?”
쓰러진 적은 붉게 물든 흙 인형이었다.
익숙하다. 아도란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타입의 골렘이었으니까. 하지만 색과 느낌이 달랐다. 일반적인 골렘이 내부의 아케인 스톤이나 그리자를 힘의 원천으로 삼는 것에 비해서 지금 눈앞의 존재는 그 자체가 살아있는 거 같았으니까.
끼리릭……
그 예로 전신에 단검을 틀어박은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표피에 상처를 조금 낸 것 정도로는 이 단단한 괴물을 죽일 수 없었다.
“오빠, 옆으로!”
그 순간, 라라가 앙칼지게 외치더니 품에서 푸른 색 시약을 꺼내서 던졌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이 깨어지고 액체가 골렘의 전면을 덮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예전에도 한 번 사용 한 적 있는 물약이다. [서리 시약]이라 불리는 건데, 들어가는 약초가 매우 희귀한 거라 라라도 몇 병 겨우 만들었다고 말을 했었다.
역시 비싼 게 좋은 건가.
얼어붙은 골렘은 그대로 동작이 정지했다. 쿤이 아쿤으로 이마에 댄 뒤 의념을 모아 중심을 쪼갰다. 한 순간에 몸이 부서지고 초감각을 자극하던 생명의 기척이 지워졌다.
“휴. 잘 했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죠?”
“조금 그을리기는 했지만, 걱정 할 수준은 아니야.”
옆으로 와서 걱정하는 라라를 달랜 뒤, 쿤이 무너진 골렘의 흔적을 살폈다.
냉기로 굳어버린 뒤 의념의 검으로 베지 않았다면 지금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안을 빼곡히 보고 부서진 파편들을 다 살폈음에도 핵이라 말 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았다.
‘이 돌 자체가 살아 있었다고?’
쿤이 미간을 좁혔다.
마법적 지식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건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고대의 종족 중에 돌의 형태를 띤 것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이 존재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존재라 해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근원이 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인간도, 엘프도, 요정도.
심지어 고문에서 보이는 드래곤도 그들만의 독특한 심장이 있었다고 한다. 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서 움직일 수는 없다.
“오빠……!”
쿤이 라라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쿠후우……
하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다면.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있다면 부정 할 수 없다.
엄청난 숫자의 골렘들이 통로 뒤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쿤과 라라가 걸어왔던 지역.
“도망치자!”
안쪽으로.
라라의 손을 잡은 쿤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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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 갔으리라 생각하는 통로에 도착한 쿤은 새카맣게 타 버린 두 구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사람 형태 그대로 탄화되어 반쯤 가루가 되어 무너진 상태였다. 데미안일까, 아니면 수행하던 남자일까. 궁금했지만 살필 시간은 없었다.
통로 저편에서 골렘이 무지막지한 숫자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쿤은 강하다.
일대 일로야 골렘 정도는 쉽게 처리 할 수 있다. 무한의 주머니에 남은 흑기사를 꺼내서 싸우면 아무 스무 마리 정도까지는 처리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통로를 메우는 골렘의 숫자는 그 정도로 해결 될 게 아니다.
대체 이런 골렘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의아할 정도로 많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안쪽으로 도망가다가는 또 어떤 상대가 나올지 모른다.
쿤이 통로를 딱 돌아서 골렘을 떨쳐내고 난 뒤에 상자를 열어 반지를 꺼내들었다. 출발 전에 준비를 하기 위해 살피다 발견한 장비가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공간 이동의 반지.
하루에 한 번 지정된 장소로 사람을 이동시켜 주는 물건이다.
진실의 돋보기로 확인한 결과 착용자와 육체에 닿은 부분에 한해서 같이 이동 할 수 있다. 즉, 두셋 정도까지는 함께 이동시킬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이 반지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싶어 안심하고 라라를 대동했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라라를 당겨서 안았다.
그리고 반지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빛이 알 위로 어리더니, 몸을 휘감아 돌았다. 지하 동굴의 이상 현상은 병력이라도 이끌고 알아봐야 할 거 같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어……?”
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한순간 빛이 먹히더니 그대로 흩어졌다.
공간이동? 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당황을 해서 쿤이 동작을 멈췄다. 신이내린 물건 중에 잘못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한의 주머니, 헤그시아의 씨앗, 진실의 돋보기……
헌데, 왜 이번에는?
“오빠, 앞에!!!”
“큭……!”
당황의 틈 사이로 골렘이 거리를 좁혔다.
통로의 코너를 딱 돌아 붉은 손이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쿤이 이를 악물고는 아쿤을 든 손으로 이를 튕기고는 복부를 발로 찼다. 딱딱한 돌담을 걷어 찬 거 같다. 발목이 시큰거리고, 반발력에 몸이 뒤로 밀렸다. 하지만 골렘과의 거리는 벌릴 수 있었다. 여분의 단검을 뽑아 정수리에 꽂아 넣고는 곧바로 무한의 주머니를 털어 흑기사를 쏟아냈다.
그후우우우우……!!
일곱 구의 흑기사와 골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아니고 일곱을 동시에 제어하는 것이다. 쿤의 이마위로 핏줄이 섰다. 자동으로 움직여 주는 골렘이면 좋겠지만 이건 직접 움직여 싸워야 한다. 충격이 전해 질 때 마다 그 여파가 쿤에게 계속 전달되었다.
“오빠, 무리에요! 일단 뒤로!!”
챙—!
라라가 품에서 약병 두개를 꺼내서 바닥으로 던졌다.
하나는 부식성 액체로, 대기에 노출되면 천천히 독성 가스를 내뿜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코 없는 골렘에게는 딱히 도움이 될 물건이 아니지만 두 번째로 던진 물약이 합쳐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불꽃의 물약]. 가연성 액체로 작은 불꽃에만 닿아도 폭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독성 가스와 불꽃의 물약. 그리고 붉은 골렘의 열기가 만나면 아주 화끈하게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콰콰콰콰쾅—!!!
골렘과 흑기사가 엉켜 붙은 지역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쿤은 사전에 간파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열풍이 통로 사이로 빠르게 몰아쳐 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흑기사가 엉망으로 부서져 내렸지만 지금은 찾아 줄 때가 아니다. 망령제어를 푼 뒤, 라라의 손을 잡은 채 반대쪽으로 달렸다.
크후우우우……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골렘들은 아직도 멀쩡했다.
#
“하아……하아……”
한참이나 달린 쿤과 라라는 더 이상 골렘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가늠도 잘 되지 않았다. 쿤이야 그래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지만 라라는 정말로 숨이 턱까지 올라와서 얼굴이 하얗게 떠 버렸다. 그 와중에도 군소리 없이 달린 건 순전히 정신력의 힘이었다.
“웨에에에엑……!!”
지금 와서 속에 든 것들을 게워내는 건 막지 못했지만.
툭툭. 쿤이 뒤에서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도왔다.
빠르게 신성 대지의 축복을 깔고 체력 회복을 쉽게 해 주었다. 출발 전에 먹었던 음식을 전부 다 확인하고 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쯧……’
아직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앉아서 쉬게끔 하고 싶었지만 골렘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 그럴 수는 없었다. 쿤의 얼굴이 근심으로 일그러졌다.
“후우……”
“이제 좀 진정이 돼?”
“으……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이제 와서 무슨. 더한 것도 봤는데.”
방울 군도를 지나 여객선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는지 라라가 얼굴을 확 붉혔다.
조금 분위기가 풀리는 거 같다. 쿤이 가볍게 웃고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잠시 쉰 덕분인지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간간히 루루 따라 세이혼과 수련한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회복 할 수 있는 물약을 꺼내서 마시고는 다시 힘주어 몸을 일으켰다.
“숨 돌렸으면 바로 움직이자. 그 골렘들이 언제 또 쫒아 올 지 알 수 없어.”
“후우. 대체 그것들은 뭐에요? 이 장소를 지키는 가디언 같은 건가요?”
“어쩌면. 하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불꽃도 그렇고, 통로가 한꺼번에 흔들릴 정도의 충격도 있었잖아. 자기가 만든 영역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는 않을 거야.”
“……그럼 동굴의 주인과 함정을 만든 사람이 따로 라면요?”
“따로? 따로라……확실히 일리가 있군. 안의 힘을 방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어쩌면 외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일 수도 있네. 그렇다는 건……”
“너희 둘!!”
“응?”
쿤이 생각을 정리하려던 찰나.
적의 어린 목소리가 동굴 안을 크게 울렸다.
쿤과 라라가 달린 방향과는 반대 쪽.
그을린 머리카락과 일그러진 얼굴을 한 남자가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데미안.”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다.
※작가의 말
뭐죠? 오늘 새벽에 점검이었던 거 아닌가요? 그런 줄 알고 한번에 올렸는데...
점검이 오늘 새벽으로 바뀌었네요?
헐...헐. 이러면 끊는 타이밍이 미묘해지는데 킁 ㅡㅡ‘
어휴. 하여튼 그런 관계로, 점검이 끝나고 난 뒤. 내일 오후 여섯 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