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도미닉의 최후는 직접 목도했으니, 그 인물이 다시 나왔을 확률은 없다. 아마도 이 인간은……
“도미닉의 형제입니까?”
“후후. 소문대로 명석하시네요. 맞습니다. 굴락의 신관기사장을 맡고 있는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신관기사장. 무력부대의 이름으로 보이는데, 그런 인물이 이곳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그날의 일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혹시 또 모른다.
어떻게든 정보를 알고 복수를 천명하며 날뛴다면 쿤의 입장에서는 곤란하다. 이곳은 재판을 열기위해 한 표를 받으러 온 거지 개싸움을 벌이러 온 게 아니니까.
“제가 온 이유까지 말 할 필요는 없겠군요. 다만, 와서 지내다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들리더군요. 제 형인 도미닉이 죽고, 공왕이 굴락을 낙인찍어 지워버리려 한다는 소문을 말이죠.”
“좋은 입을 하나 키우고 있나 보군요.”
“어디서나 소문은 흘리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흐트러짐이 없다.
눈동자의 흔들림이나 심장 박동수의 변화. 미세한 피부의 변질도 없다. 적어도 그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쿤이 속으로 낮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는 다 알고 온 상황이다. 여기서 거짓을 말 할 필요는 없었다.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꽤나 분위기가 뒤숭숭하더군요.”
“들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말입니까?”
“저 같은 말단이 알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죠.”
다만,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 할 필요는 없다.
원하는 것을 얻기 전 까지는 거리를 두고 상대를 파악 할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표정을 꾸미고는 다시 율트락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서장,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굴락에 대해서는 사실 저도 잘 모르고 있죠. 그들이 정말로 사이한 집단인지, 아니면 누명을 쓰고 있는 건지. 그렇다면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재판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 재판을 위해 한 표를 행사해 달라?”
“편들어 달라는 말도 아닙니다. 결과는 재판에서 나오겠죠. 이것에 정치적인 생각이 개입됐다고 보기는 힘들군요.”
말을 끝내며 데미안을 바라봤다.
의미는 분명했다. 정치적 개입? 개소리. 구린 게 아니라면 재판에서 증명하라. 아니라면 네가 구린 것으로 이해를 할 테니.
데미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증명을 한다. 허울 좋은 말이군요. 절대적 중립의 블랙 북스까지 움직여서 재판을 열려는 의도를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결론? 과연 정당하다고 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해서, 재판조차 하지않겠다 하면 굴락을 보는 세간의 시선을 어찌 바꿔야 할지 모르겠군요. 설마 나만 깨끗하면 된다는 생각이신가요? 그렇다면 너무 오랫동안 이 아래에 내려와 있었던 거 같군요.”
“글쎄요. 증명이 굳이 필요할까 싶네요. 아니, 증명이 필요한 사람들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반 협박성의 말.
공왕의 비호가 곧 사라진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쿤이 입술을 살짝 핥았다. 데미안이 이 아래에 무슨 일로 내려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하게 밖과의 소통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돌아가는 형국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흠. 뭐, 데미안 씨와 계속 대립 할 이유는 없겠죠. 어차피 결정은 고서장이 하는 거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쿤이 일단 말을 끊고 율트락에게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어차피 결정을 하는 건 고서장인, 율트락이다. 말싸움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선택권자의 의중은 먼저 알고 말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흘흘. 난감하군요. 두 분의 말에는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 표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과, 중립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한발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 비단 이곳에 모인 사람들만 의견이 나뉜 것은 아니죠. 블랙 북스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표를 행사하는 게 맞다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중립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외인을 아예 배척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죠.”
앞서 보았던 헥토르 같은 인간이 반대하는 입장 중 과격한 인물에 포함되는 거겠지. 그렇다면 일행을 안내한 윤카람은 찬성 쪽의 인물인가. 쿤이 지나오면서 봤던 이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그렸다. 이 일이 단순하게 끝나지 않으면 편 가르기에 들어 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두 분에게 공통적인 부탁 하나를 하려고 합니다.”“……음?”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다.
설마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기다렸던 건가?
쿤이 슬쩍 데미안을 보았는데, 그도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적어도 굴락의 일부와 손을 잡고 일부로 엿 먹이는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부탁을 해결하는 쪽의 말을 듣겠다. 이런 의미인가요?”
“뭐……간단하게 말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고서장, 지금까지 그런 말을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말 하지 않습니까?”
데미안이 뒤늦게 말을 붙여봤지만, 율트락은 태연했다.
이 늙은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주제에 사람 상대하는 게 뱀 같다. 쿤이 눈매를 좁히고는 상대를 다시 바라봤다. 의회파와 공왕파로 나뉘어 내전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도 중립을 지키기 있었던 건 그냥 늙은이라서 가능했던 게 아니다.
‘어쩌면 재판을 처음에 거론한 게 이 늙은이일지도 모르겠군. 판을 벌이면 양쪽 다 목메고 달려 들 것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부탁하고자 하는 게 뭔지가 중요한데……’
단순히 몇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 해결 될 일이었다면 미리 와 있던 데미안에게 부탁하면 그만이다. 굳이 공왕 쪽으로 사람을 보내 판을 만들 이유가 없다.
“부탁하고자 하는 내용. 들어나 봅시다.”
쿤이 담담하게 말을 한 뒤 근처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데미안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 이 부탁이라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상관없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주도권이라도 가져오는 게 낫다.
의자를 하나 더 끌어와 라라를 앉히고는 다리를 척 꼬았다.
그리고 어디 한 번 말 해 보라는 의미로 턱짓을 했다.
마치 이 방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그 자신인 것처럼.
“오. 오호호. 역시 미인을 얻는 건 영웅이라야 하는가 보군요.”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 부탁이라는 내용이나 들어 봅시다.”
“그래야죠. 자, 이걸 하나씩.”
흐리게 웃은 율트락이 석판 조각을 쿤과 데미안에게 하나씩 건넸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는데, 겉면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다만, 지금은 석판이 갈라지고 풍화된 부분이 많아 특정 짓기는 어려웠다.
쿤이 석판을 손으로 돌려보다 물었다.
“기록비문의 일부입니까?”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던 비문의 일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 쯤 지하 공동에서 찾을 수 있었죠.”
“지하 공동? 도서관에 그런 지역이 있습니까?”
“이 하카림의 기억이 몇 년이나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시간을 버티고 선 곳입니다. 지상의 건물이나 구조물들. 지배자가 바뀔 때 마다 형태를 달리하던 곳과 달리 이곳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왔죠. 다만, 우리가 잊었을 뿐.”
쿤이 오면서 보았던 타원형의 계단을 떠올렸다.
그 모습만 봐도 규모가 상당하다. 시간에 묻혀 쓸모를 부정당한 공산을 생각해 보면 율트락의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 석판과 우리에게 할 부탁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조각의 본체. 석판을 찾아와 주십시오.”
“……석판을? 고서장, 설마 석판 원본이 남아 있다고 생각 하는 건 아니겠죠?”
데미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쿤도 긍정하는 부분이다. 석판 상태만 봐도 연식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알 수 있다. 원판이 남아 있을 확률은 굉장히 희박했다. 부분이나마 찾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 불숙 원판을 찾아오라는 부탁은 너무 무리한 것이었다.
“맞습니다. 지하 어딘가에 원판이 남아 있죠.”
하지만 율트락은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원판의 존재를 주장했다.
“증거라도 있는 겁니까?”
“고문의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죠. 이 석판은 단순한 기록의 일부가 아닙니다. 최초 이 땅의 존재들을 밀어 낸 하카림의 맹세가 담긴 증명이죠.”
“하카림?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증명의 표식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겁니까? 이 돌만 봐도……”
위이잉!
그 순간, 율트락이 낡은 로브 끝자락을 들어 올리며 석판을 꺼내 들었다.
쿤과 데미안이 쥐고 있던 것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무언가 공명하는 소리와 함께, 둘이 쥐고 있던 석판이 그대로 날아가 율트락의 석판에 붙었다.
툭. 투툭.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이내 결합이 깨어지고 다시 본래의 조각으로 나뉘었다. 율트락이 떨어진 두 조각과 자신이 쥔 하나의 조각을 보며 웃었다.
“시간에 부서질 지언정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이 석판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죠. 저 아래 어딘가에 그 형태를 복원시킬 수 있는 원판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석판의 핵……같은 게 있다는 말이군요.”
“고문에 적힌 하카림의 설명이 절반만 옳다 해도 그 존재는 마치 신과 같은 힘을 지녔습니다. 그런 인물이 남긴 물건이라면 쉽게 파괴될 리 없죠. 두 분께 부탁하는 것은 바로 그 원판을 찾아오는 겁니다.”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트락의 말이 이해가 갔다. 단순한 비석 찾기가 아니라, 공화국보다 이전. 이 땅을 세운 최초의 존재의 흔적을 찾아오라는 말이다. 이건 절대로 쉽지 않다. 그의 말마따나 원판이 남아있다고 한들, 저 넓은 공동아래에서 무슨 수로 그걸 찾아온다는 말인가.
지금 상황이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닌데.
‘내려가서 찾는 와중에 내전이라도 발발하면 몽땅 헛고생이잖아.’
재판은 굴락을 잡고, 의회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방법을 찾다가 본진이 당해 버리면 허튼 짓이 되고 만다. 한 표를 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넘어가야 한다.
쿤이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서 입을 열려고 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조건이 맞아야겠죠. 해서, 양 쪽 진형으로 합의서를 보냈습니다. 이 일이 해결되기 전 까지는 무력 행위를 중지하겠다는 약속이죠.”
“합의서? 그런 걸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흘흘. 블랙 북스는 말 그대로 기록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죠. 그만큼 남들과 다르게 아는 것이 많습니다. 이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도 쓸 수 있겠죠.”
“……지금 이 행위야 말로 정치적 개입임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이건 이 방의 사람들. 그리고 제가 협의서를 보낸 양 진형의 대표만이 알게 되는 내용이겠죠.”
쿤이 율트락을 쏘아봤다.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블랙 북스가 이런 정치적 개입을 한다는 건 그만큼 찾아야 하는 하카림의 석판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거절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기를 빌미로 사람을 쓰겠다 이거군.’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그냥 협박을 해서, 인원을 원했다면 아마 블랙 북스 자체가 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함부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 재판을 위한 한 표. 이것을 걸고 물러나 있으라는 요구는 과하지 않다.
의회야 굴락을 통해 힙을 더 모으기에 좋고, 공왕 쪽이야 성공해서 재판을 열어야 하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의아하군요. 석판이 발견 된 건 반년 전이라고 했죠. 그럼 지금까지 블랙 북스의 사람들이 찾고자 했음에도 모두 실패했다는 의미인데……그걸 우리가 찾을 수 있다 어떻게 장담하죠? 기약 없는 노동에 힘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곳에 남겨져 있는 글귀 때문입니다.”
“글귀?”
율트락이 석판을 흔들었다.
쿤과 데미안이 가진 것보다 조금 더 선명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을 해석했다는 의미일까? 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것을 살폈다.
지렁이 기어가는 흔적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속박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운명의 창이 내게 찾아온다. 이는 꺼지지 않는 시간의 약속.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불의 업이 찾은 하나의 광명은 잊힌 신의 손을 불러오리다. 이질적 이름의 존재를……]
율트락이 석판을 들고는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내용이 전부 이해가 됐다. 쿤도, 데미안도. 심지어 라라도. 들리는 것은 알 수 없는 언어였으나, 머릿속으로는 그것들이 전부 이해가 된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그쳤을 때, 모두가 하나 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그건……대체 뭐였습니까?”
“사어 중 하나인, 요락의 진언입니다. 사물에 담긴 의미를 직접 전달 할 수 있는 신비의 언어죠.”
“그럼 방금 그 내용이 석판에 담긴?”
“맞습니다. 다른 것들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죠. 누군가 찾아온다는 내용.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주체가 우리다?”
“뭐,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까?”
율트락이 얼굴에 주름을 한 가득 채우며 웃었다.
즉, 찾아야 할 석판이 쿤 일행. 혹은 데미안을 부르고 있다는 의미. 내기라는 것으로 둘이 내려가 누가 그 대상일지 판가름을 하라. 판을 깔고, 증거를 내밀며 마치 게임의 한 부분인 것처럼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
‘정말 보통이 넘는 늙은이군.’
허허롭게 웃는 얼굴 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상황을 꾸미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블랙 북스 자체의 존립을 흔들 수 있는 행위까지 스스럼없이 저지를 정도라면 보통의 준비로는 안 됐을 터.
‘지금 이 순간에 밝혀진 것들이 정말로 전부일까?’
찾아오면 그 편을 든다.
그 사이까지 전쟁은 없다. 물건은 하카림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판. 그 자체가 자신을 찾게 될 주인을 부르고 있다.
‘정말로 이게 다인가?’
쿤의 눈이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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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꾼을 통해서 공왕에게 확인을 했다.
율트락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협의서의 존재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은 이 일이 끝나는 순간까지 멈추게 되었다.
쿤과 라라.
상대편은 데미안과 그를 수행하는 두 명의 남자.
이렇게 두 팀으로 나뉘어 석판을 찾게 됐다.
각 진영에서 사람을 더 추릴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진다. 소수로 일을 처리하고 끝내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어차피 그 편이 쿤에게는 나았다.
데미안은 모르겠지만 그는 여차하면 주머니의 흑기사를 풀어서 숫자를 불릴 수 있다. 숫자를 대충 맞춘 구성이라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거라면 라라.
단지 표를 확보하는 일이라면 상관없지만, 하카림의 기억 아래쪽. 오래된 석판을 찾으러 가는 일이 안전하다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대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게 쿤의 생각이었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나아요. 게다가 제 지식이 쓰일 수도 있잖아요.”
몇 번을 더 설득해 봤지만 요지부동.
게다가 그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쿤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승낙을 했다. 위험하다면 자신이 지켜주면 될 일. 데미안의 능력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 하나 정도쯤은 혼자서 해결 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 지나친 걱정은 잠시 접어 두었다.
“지하까지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윤카람이 다시 등장했다.
석판이 발굴된 곳은 하카림의 기억 가장 하층부. 빙빙 꼬인 나선형 구조물의 바닥이다. 다만, 그 지역은 상층부처럼 인공적인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자연 동굴이 넓게 분포되어 미로처럼 꼬여있는 형태.
쿤과 데미안이 석판의 원판을 찾아야 하는 곳이 바로 그 미로 속이다.
“지도도 없고, 안내인도 없다. 너무 무책임 한 거 아닙니까?”
“고서장께서 말씀하신 거라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두 분 중 한 명이 원판을 찾아 올 거라 믿습니다.”
쿤이 툴툴 거리며 물었지만 윤카람은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고서장, 율트락에 대한 믿음 하나는 단단한 거 같다. 얼굴 자체가 대쪽 같은 성품이라 주장하고 있기도 하고.
“이거 재미있게 되었군요. 우리 둘 중 과연 누가 먼저 원판을 찾게 될까요?”
나란히 선 채, 데미안이 말을 걸었다.
쿤이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답을 했다.
“웃는 낯짝은 치워. 이렇게 된 마당에 가식 떨 셈인가?”
“호오……그렇게 거칠게 나와도 될지 모르겠군요.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요.”
“그러게 말이다. 내 옆에서 제 잘난 맛에 떠드는 놈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될지 모는 일이니까.”
숫자가 비슷하면 밀릴 이유가 없다.
쿤이 독 어린 말로 쏘아냈다. 상대가 굴락의 일원인 이상 이단을 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어설픈 관계를 설정하는 것보다 그냥 적이 편하다. 그래야 만일의 상황에서 마음 놓고 베어버릴 수 있으니까.
“……두고 볼 일이군요. 과연 끝이 어떻게 될 지.”
“기대하지. 적어도 살아서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새카만 지하 동굴의 앞.
쿤 일행과 데미안 일행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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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는 꽤 어두웠다.
쿤은 아쿤을 앞으로 세우며 걸었다. 성물이라 그런지 의식에 따라 빛을 조절 할 수 있었다. 전투에도 좋고, 탐험에도 좋고. 일석이조의 물건이었다.
“꽤 넓네요. 그냥 수색하기에는 막막할 거 같은데요?”
“아마 일반적인 수색으로 찾기는 힘들 거야. 그랬다면 이미 이곳 사람들이 원판을 찾았겠지. 율트락은 석판의 이끌림을 받아서 숨겨진 길이 나오기를 바란 거야.”
“숨겨진 길이라면 마법적인?”
“아마도. 이 공간 자체를 생각해 봐. 단순한 건설 기술로 이런 구조물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
라라가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 수도의 지하. 밖에서는 전혀 티 나지 않는 모습으로 도시 하나 규모의 공간을 꾸몄다. 이런 장소를 단순한 토목 기술로 만들었다는 건 불가능하다.
“마법적인 존재가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거의 확실해. 이럴 때 아도란이 있었다면 물어 볼 수 있었을 텐데. 필요 할 때는 없네, 그 인간.”
“아쉬워요?”
“조금은. 미친 짓을 많이 해서 그렇지, 확실히 도움 되는 구석은 있었는데.”
쿤이 입맛을 다시며 계속 걸었다.
이래서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던가? 아도란의 부재가 아쉬웠다.
동굴은 넓었고, 길은 단순했다.
쿤과 라라는 계속 걷기만 했다. 뭐라도 좀 나오면 그것에 신경을 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계속 걷기만 했다. 지나친 길에는 표시를 하고 방향과 거리를 재면서, 지도라도 그릴 것처럼.
“후우. 그나저나 이 아래는 꽤 덥네요.”
그렇게 걷기를 한참.
라라가 지친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빈말이 아니라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쿤도 마찬가지. 티는 안 냈을 뿐 그도 지하의 공기가 매우 후덥지근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이런 지하는 보통 서늘한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온도가 높다는 것은,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쿤은 아주 오래전에 휴화산에서 광물을 채집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분위기가 지금과 많이 흡사했다.
‘열화된 돌들도 그렇고.’
바닥에 떨어진 돌들이 적색 빛을 냈다.
열기에 노출되어 변질 된 것으로 보였다. 단순한 자연 동굴이 아니라, 지하로 용암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여기서 잠깐만 쉬었다가 가자.”
“아, 괜찮은데. 서둘러야 하지 않아요?”
“진정해. 서두르다가 망치는 법이니까. 그리고 마냥 걸어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쿤이 배낭에서 물과 말린 과일을 꺼내, 라라에게 건넸다.
얼마나 걸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좋았다.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남은 식량으로 갈 수 있는 시간과 거리를 셈 해 봤다. 하카림의 기억 상층부에서 보던 규모와 아래쪽 동굴의 형태를 고려해 봤을 때, 이 지역이 외부까지 무한하게 뻗은 게 아니라면 길어야 4~5일내로 내부 탐사를 모두 마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발견을 했겠지.’
이건 확실하다.
분명 특별한 힘으로 다른 통로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아도란이 있었다면 마법적 힘을 느끼고 해제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결해야 하는 법.
“……응?”
그때, 들고 온 찻잎을 물에 섞어 우려내려던 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이해가 안 가는 얼굴.
“왜? 무슨 일이야?”
“이거 보여요? 찻잎이 돌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수통에 띄워 둔 찻잎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물이 흔들리면 그럴 수 있다지만 바닥에 내려놓은 상황에서도 계속 돌았다. 쿤이 턱을 쓰다듬고는 손을 찻잎 위로 얹었다.
‘힘의 유동은 없어.’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초감각을 빗겨 나갈 정도의 기묘한 힘이거나, 무언가 다른 형태의 영향이라는 의미였다. 쿤이 손을 때고는 이번에는 수통을 들고 옆으로 걸었다.
“어, 어? 이번에는 옆으로 눕네요?”
“흠. 힘의 방향이 바뀌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찻잎에만 영향을 준다는 건가요?”
“그건 이상해. 찻잎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물에 띄워 둔 것에 불과……아아. 그렇군.”
말을 하던 쿤이 손바닥을 탁 하고 두드렸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물 뒤에 띄워 둔 찻잎의 이상한 변화. 이런 상황에서 우연은 없다. 아주 단순하게 일행을 누르는 열기 자체가 어떠한 힘의 지표이고, 물이 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이렇게 하면……”
쿤이 등짐에서 요리용 냄비를 꺼내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로 석판 조각을 띄웠다. 무거운 판이 바닥에 가라앉더니 잠시 흔들흔들 움직이다 한 방향으로 착 붙었다.
“와!! 어떻게 한 거예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물이 주변에 흐르는 힘을 막아주는 거 같다. 석판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 방해하는 것을 물로 차단하고 나니까 이렇게 효력을 발휘하는 거다. 석판이 붙은 방향대로 가면 원판을 찾을 수 있겠지.”
“대단해요. 쿤, 오빠는 못하는 게 없네요.”
“과찬이야. 네가 찻잎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나도 찾아내지 못했을 걸.”
“그런가요? 헤헤.”
쿤이 귀엽게 웃는 라라의 머리를 한 번 쓸어 주었다.
동굴은 더웠지만, 둘 사이는 훈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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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석판을 따라 이동하다 막다른 벽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 막혔네?’ 라며 돌아서는 바보짓을 할 이유는 없다. 의식의 검으로 벽을 베어내고 새롭게 드러나는 통로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동굴과는 상황이 달랐다.
전의 동굴이 약간 뜨거운 정도의 대기와 적색으로 변질 된 돌들이 바닥을 구른 정도였다면, 통로 너머부터는 당장이라도 용암이 올라올 듯 열기가 대단했다. 대기가 일렁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쿤은 임시방편으로 입고 있던 옷에 각인의 축복을 사용했다.
저항의 각인. 부정적인 힘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축복으로 열기를 막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는 이는 제대로 적중해서 데일 뜻 몸을 덮쳐오던 열기를 대부분 차단해 주었다. 아쿤에 실린 힘의 각인은 사용하지 못하게 됐지만, 이 열기를 온전히 받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쿤과 라라가 통로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재미없게 구는군.”
“……네?”
“뒤에 따라붙었다.”
‘뒤?’라며 돌아보는 라라의 어깨를 쿤이 잡아챘다.
스무 걸음 정도 뒤.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 따라올 사람이라면 데미안 밖에는 없다. 다른 통로에서 알아서 길을 찾나 싶었는데, 몰래 뒤를 쫓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해요? 계속 따라오면 안 되잖아요.”
“……이 통로 말이야. 손님을 환영하는 용도로는 안 보이지?”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숨겨둔 것도 그렇고, 이 열기. 손 벌려서 환영하는 모습은 아니네요. 그럼, 따라온 이들을 먼저 보내겠다는?”
“호. 우리 라라가 많이 똑똑해 졌는데?”
“아카데미 부엉이도 삼년이면 시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죠.”
라라가 입을 길게 벌리며 웃었다.
그녀 말대로 쿤 옆에서 구른 게 벌써 몇 달이다. 이 정도는 이제 눈칫밥으로 알아들을 정도가 됐다.
쿤이 조금 빠르게 걸음을 놀려서 통로로 들어 간 뒤 갈림길 앞에 서서는 바닥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망령제어를 사용해서 허공으로 뜰 수 있는 그에게 걸음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 바닥의 흔적을 반대쪽으로 속인 뒤 구석에 몸을 숨겼다.
“갈림길인가?”
그리고 조금 지나자 당연하다는 듯 데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 주변으로 푸른 색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종의 방어막. 도미닉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능력이었으나, 형태는 조금 달랐다. 이것으로 열기를 방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갈림길 앞에 서서 바닥을 살피더니 씩 웃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가는군. 역시 무언가 있다는 얘기겠지?”
“율트락의 태도도 그렇고, 저희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부른 거 같았습니다.”
“그냥 편 들어주기 싫으니까, 이런 수작을 부린다?”
“뻔 하지 않습니까? 석판을 발견한 게 반년 전이라면 이미 찾고도 남았겠죠.”
“흥. 그간 그렇게 협조를 거부하더니,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
데미안이 거칠게 중얼거렸다.
그와 율트락. 자연스럽게 한 방에 있던 것 치고는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반목하는 사이였나?’ 돌 뒤에 숨은 쿤이 생각을 되짚었다.
“상관없다.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석판을 찾아오면 그만이니까. 그 앞에 석판을 내밀면 어떤 말을 할 지 궁금하군.”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정리를 한 뒤, 데미안 일행이 쿤이 조작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단히 벼르는 모양새가 석판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올 기세다.
쿤이 잠시 동안 숨어 있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돌 뒤에서 걸어 나왔다.
라라도 붉어진 얼굴로 그 뒤를 쫓았다. 아무래도 숨기 위해서는 좁은 곳에 몸을 구겼어야 했다.
그런 거다.
“그,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가 뒤에서 쫓아가 볼까요?”
“온갖 함정이 늘어서 있었으면 좋겠군.”
던전에서는 도둑이 꼭 필요하다.
함정을 해제하고, 적의 기습을 미리 파악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도둑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이를 해결 할 수 있다.
‘몸으로 해제하는 거지.’
앞서 간 데미안을 떠올리며 쿤이 슬쩍 미소를 띠웠다.
※작가의 말
예약연재!
오늘 새벽에 점검을 한다 해서 두 편을 한번에 올립니다.
사실 2편 분량인데...배경 설명이 꽤 긴 파트라서 지루해 하실 거 같아 그냥 한 편으로 묶습니다.
가뭄 끝에 비가 와서 기분이 좋네요.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즐거운 주말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