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34화 (134/240)

공화국 수도.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도시의 중심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하나 있다. 오래 된 공동묘지처럼 으스스한 분위기에 두꺼운 철책이 빙 둘러져 있어,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장소다.

묘한 분위기에 보물이라도 있을까 싶어 접근을 시도한 무리가 있었지만 그들 역시 소식이 단절되었다. 죽었는가. 실종되었는가. 몇 번의 흉흉한 이야기가 더 덧대어지며 사람들은 아예 발길을 끊고 말았다. 그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안 좋은 기운이 옮는다 해서 자식들을 교육 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곳이 도서관으로 통하는 길이라 이겁니까?”

밤색 후드를 뒤집은 쓴 쿤이 물었다.

“우리는 고요함을 원하니까요.”

“악취미인 거 아십니까?”

“즐기지는 않습니다. 자, 이쪽으로.”

윤카람이 은은한 호박 빛의 호롱을 든 채 앞장섰다.

낡은 철문이 스산하게 밀리고, 썩은 냄새가 코로 훅 다가왔다. 쿤 옆에 선 라라가 코를 막고 물러났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라니까.”

쿤이 물에 적신 헝겊을 내밀며 타박했다.

도서관으로 이동이 확정되고 쿤이 일원을 꾸릴 때 라라가 같이 가는 것을 요구했다. 쿤은 괜찮다고 거부했지만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동행을 요구했다.

결국 세이혼과 루루는 수련 삼아 별관에 남고, 쿤과 라라만 윤카람을 따라가게 됐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냄새가 심해서 놀란 거 뿐이니까요.”

라라가 코끝을 살짝 닦고는 다시 헝겊을 건넸다.

냄새는 여전하지만 전처럼 물러나지는 않았다. 쿤이 헝겊을 쑤셔 넣으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일단 괜찮아 보이기는 한다. ‘무리하기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윤카람의 뒤를 쫓았다.

철문 안쪽은 지하로 통해 있었다.

눅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도시 아래로 흐르는 하수도와 맞닿아 있는 거 같았다. 이끼가 잔뜩 낀 벽면을 보며 쿤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들어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지나치게 숨겨져 있는 거 같아 의아해 하며 쿤이 물었다.

“역사는 나라의 근간과 같습니다. 이름과 제도는 여러 번 바뀌었으나 이 땅의 뿌리는 변하지 않았죠. 그것을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라. 지나간 일이 그렇게나 중요할까요?”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견뎌내고 있죠. 역사는 반복되고 실수와 그것을 바로잡는 과정은 고리처럼 순환해서 나타납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이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렇게 한 왕이나 지도자는 있었습니까?”

“……거의 없었습니다.”

윤카람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들어 있었다.

긍지를 가지는 일이지만, 정작 남은 알아주지 않는 격이다. 깐깐한 얼굴이 일그러졌을 것을 상상하니, 쿤은 통쾌함보다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 뒤로는 말없이 통로를 계속 걸었다.

비슷한 형태의 통로가 계속 이어졌지만, 쿤은 이 길이 조금씩 아래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초감각을 얻게 된 이후로 공감각적인 이해도 역시 늘어났다. 처음 들어왔던 입구부터 지금 있는 위치까지의 거리가 대충 그려졌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두꺼운 석벽 앞에서 윤카람이 멈춰 섰다. 석벽 전면에는 기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일종의 식별도구로 보였다. 윤카람이 손바닥을 그 위로 대자 희미한 빛과 함께 석벽이 좌우로 열렸다.

‘마법인가?’

무언가 힘의 유동은 있었다.

다만, 쿤으로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도서관이 나올 겁니다.”

“음.”

석벽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온 쿤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한 걸음 차이인데 주변 대기가 급변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라라도 이를 느끼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오래전 도서관을 지을 당시, 설치해 둔 마법입니다. 장서를 보관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대기를 바꾸는 것이죠.”

“이 안 전부를 말입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자랑 섞인 어투로 윤카람이 말했다.

쿤이 통로 저편으로 보이는 공간을 눈으로 살폈다. 왕성. 아니, 그보다 더 크다. 지하로 나선 형태를 이루며 공간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 이 전부를 제어하는 마법이라? 아도란이라면 가능할까? 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이었다.

‘오래전이라면 지금은 사라진 종족들의 힘이라도 동원 된 걸까?’

드래곤. 페어리, 유니콘 등.

신비를 간직했던 종족들은 어느 한 순간부터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항간에서는 그 자체가 허구의 산물이지 않았을까 생각 할 정도. 그들이 남겼던 흔적조차 세월에 풍화되어 지워지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단순한 동화의 일면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이 장소 역시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쿤은 루루가 들었으면 좋아 할 법 한 알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자, 이곳부터가 도서관의 시작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하카림의 기억’이라고 하죠.”

“하카림? 사람의 이름입니까?”

통로의 끝을 지나, 나무로 만든 난간에 도착하자, 윤카람이 소개를 했다.

“맞습니다. 최초 도서관을 만드신 분이자, 공화국의 옛 터에서 오래된 존재들과 싸움을 하여 그들을 추방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분에 대한 내용도 도서관 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 그건 들어 본 기억이 있네요.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책을.”

“하카림 전을 읽어 보셨군요. 맞습니다. 흥미가 있으시면 따로 말씀을 해 주십시오. 제가 관련 서적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관심 있는 쪽의 이야기가 나오자 윤카람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도 초롱초롱 거리는 것이, 첫 인상의 팍팍함이 가시는 거 같다. 본래부터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 않았을까? 뒤에 선 쿤이 생각했다.

“윤카람!”

그때,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선 방향 아래쪽에서 들려온 것이다. 난간을 붙잡고 있는 성난 얼굴의 남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몸을 휘휘 흔들더니, 위쪽으로 튕겨 올라왔다. 층과 층 사이가 사람 키는 훌쩍 넘어섬을 생각하면 상당히 탄력적인 움직임이었다.

“헥토르.”

“네가 정녕 외부인을 도서관으로 들였구나!”

“네가 관여 할 일이 아니다. 이건 고서장이 허락한 일이야.”

성난 남자, 헥토르는 윤카람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서는 그를 쏘아봤다.

크기 크고 기세가 상당했다. 책만 파는 서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강성했다. 마치 단련 된 전사와 같은 느낌이었다.

“웃기는 소리! 율트락 고서장은 오늘 내일 하는 몸이야. 제대로 사리판단도 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을 근거로 외인을 들이다니!”

그가 고개를 돌려 쿤을 쏘아봤다.

매서운 눈빛에 라라가 쿤의 뒤로 몸을 숨겼다.

“헥토르, 손님에게 무례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예의를 잃은 거지?”

“흥! 무지한 것들에게 지켜 줄 예의는 없다. 반으로 갈라져 땅 위를 전쟁으로 쓸어버리겠다는 인간을 어찌해서 도우려는 것이냐!? 우리는 관찰자.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리의 본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라. 재판을 열기 위해서는 고서장의 한 표가 필요하지. 그 자체를 거부 할 수는 없어. 주고 안 주고는 고서장께서 판단하실 일이야.”

“집어치워. 그런 식으로 개입이 되는 거야. 우리에게 권력자의 손길이 닿았을 때, 기록된 역사가 어떻게 뒤틀어지는지 알고 있지 않나?”

으르렁 거리는 얼굴로 헥토르가 윤카람의 가슴을 밀었다.

힘없는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쿤이 곧바로 다가가 어깨를 잡으며 부축을 했다. 전사 타입의 헥토르와 깡마른 윤카람은 몸으로는 싸움이 안 됐다.

“그만 하시죠. 우리는 통령의 재가를 받고 왔습니다. 당신이 어떤 입장이든 막아 설 권한은 없습니다.”

“권한? 외인 따위가 우리의 일에 관여하려는 거냐?”

“따위? 지하에 처박혔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반말에 예의를 계속 갖춰 줄 이유는 없다.

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쏘아봤다. 협력을 구해야 하는 건 맞지만 굽실거릴 생각은 없다.

“꺼져! 이곳은 외인이 들어 올 곳이 아니다!”

헥토르가 윤카람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슴팍을 밀어내 위협을 하려는 행동. 하지만 그런 것에 당하면 세이혼과 함께 한 수련이 억울하다. 쿤이 입가를 틀어 올리며 손을 쳐 내고는 헥토르의 다리를 걷어찼다.

쿵. 소리와 함께 헥토르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크, 크윽!! 네놈이 지금 싸우자는 거냐!?”

“시비는 그쪽이 걸고 있는데? 나가서 햇볕이라고 쬐는 게 어때? 지하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머리통이 어떻게 된 거 같은데 말이야.”

“외인이 우리의 숭고한 책임감을 어찌 이해한다는 말이냐!?

헥토르가 벌떡 일어나서는 쿤의 양 어깨를 잡아갔다.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쿤은 피하지 않았다. 양 어깨를 내어 준 채 그의 힘을 그대로 받아냈다. 제법 단련한 듯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어림도 없다.

끙끙 거리는 그의 얼굴을 비웃어 준 뒤 양 손을 잡아서 그대로 떼어냈다. 버텨보려고 하지만 힘의 차이가 상당했다.

“이, 이익……!”

“헬스장 끊고 보충제라도 좀 먹었나 본데, 어림없다.”

“헬……뭐?”

“음? 음. 시끄러워.”

왜 이런 단어가 떠올랐을까.

쿤이 미간을 좁힌 채, 헥토르의 양 팔을 튕겨내며 얼빠진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짝 소리가 들리고 거구가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무슨 소란이냐!?”

드잡이 질 하는 소리가 컸을까.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계단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올라왔다. 칙칙한 색의 허름한 로브. 전부 윤카람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 도른 님.”

윤카람이 무리의 사람 중 하나를 알아봤는지 쪼르륵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쯧. 저, 멍청한 놈. 데리고 가서 검은 방에 가둬 놔라. 한 이틀 처박아 두면 정신을 차리겠지.”

“네.”

도른이라 불린 남자 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헥토르를 끌고 갔다.

인상을 팍 쓰며 으르렁 거리기는 했지만 반항 자체는 하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어째 좀 안 돼 보였다.

“그래, 그쪽이 고서장을 만나러 온 분들입니까?”

“쿤. 이쪽은 라라라고 합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실례를 했군요. 젊은 놈들 중에는 혈기를 못 참는 것들이 간혹 있는 법이죠.”

“그렇습니까?”

“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여기부터는 제가 안내를 하도록 하죠. 이쪽으로.”

뒤를 돌아보니, 윤카람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고 있다.

이곳부터는 더 높은 사람의 안내를 받는 걸까. 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른의 옆에 가서 섰다.

‘……음?’

그런데 뭘까. 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이 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워낙 순간적이라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감각을 되살려 보려 하지만 되지가 않았다. 마치 조금 전 느꼈던 것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쿤 님?”

“아, 가죠.”

착각이었을까?

생각을 날려 버리며, 쿤이 걸음을 재촉했다.

#

쿤 일행은 나선형 계단을 한참 내려가 옥색 돌로 치장된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꽤나 내려왔음에도 아래쪽으로는 계단이 한참이나 더 이어져 있었다. 대체 이 도서관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 걸까? 생각보다 큰 규모에 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통로마저 지나치자 나무 냄새가 진하게 나는 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 옆으로 건장한 남자 둘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 둘 역시 사서와는 맞지 않는 몸이었다. 쿤이 힐끔 본 뒤 스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고서장,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오. 수고했네.”

비쩍 마른 고목?

이게 살아있는 사람인가 싶은 인간이 지팡이를 짚고는 쿤에게 다가왔다. 검버섯이 잔뜩 핀 얼굴에 몸은 시체마냥 깡말라 있었다. 얼핏 죽은 시체의 냄새도 나는 거 같고, 바로 앞에서 봄에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아까 그 헥토르라는 놈이 한 말이 이해가 가는군.’

눈 감고 천하나 덮어 놓으면 그대로 장례를 지낼 분위기다.

가까이 다가선 율트락이 주름 진 얼굴로 웃음을 만들고는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도서관을 책임지고 있는 율트락이라 하외다.”

“공왕의 대리자로 온 쿤. 이쪽은 라라라 합니다.”

“오, 듣던 것보다 훨씬 보기 좋군요. 미남 미녀라. 흘흘. 보기 좋은 한 쌍이군요.”

“어, 어머. 그런 거 아니에요.”

라고 하며 모을 배배 꼬는 라라.

앞쪽이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뒤쪽이 부끄러운 것일까. 쿤이 묻는 걸 포기하고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인데, 그래도 말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두 분은 제게 재판의 권한을 받기 위해서 온 거겠죠?”

“굴락의 위험성은 이미 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재판을 열고자 하는 것이니 거부는 안 할 거라 믿습니다.”

“입장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쪽의 말도 일리는 있더군요.”

“……반대 쪽?”

“블랙 북스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거죠.”

방 뒤편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쿤이 미간을 좁혔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굉장한 고수. 혹은 무언가 이를 막아주는 도구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구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데미안이라 합니다.”

“……!!”

그림자가 모두 걷혀지고 난 뒤 드러난 얼굴.

그것은 굴락의 대신관, 도미닉과 꼭 닮아 있었다.

※작가의 말

생각보다 긴 파트입니다.

느긋하게 즐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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