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그리자 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숫자는 내 생각보다 많았다. 대충 봐도 사람 몸통 만 한 것이 5~60덩이. 무한의 주머니를 쓴다고 해도 전부 들고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차남혁은 어떻게 이 정도의 그리자를 모았을까?
게이트가 열린 시간이 2년이 넘고, 개척자들 중 일부로 품에 넣어 부렸다고 해도 이 숫자는 조금 과하다.
금과 은. 각종 광물과 마찬가지로 그리자가 흔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길 가다 우연히 동전 줍는 것처럼 그리자를 수확해 온다? 내가 아는 아노스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가정일까?
……그건 천천히 생각을 해 봐야겠다.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근처에 있던 그리자부터 하나씩 무한의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들 수 있는 무게로 제한되는 것이니 컨테이너 안의 것들 중에 규격 이상의 것은 없다. 10개의 제한점을 고려해서 들고 갈 수 있는 최적의 수를 계산했다.
그리고 괜히 정화되지 않게 조심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군.”
주머니가 대용량이면 좋겠지만 이보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신성점수 5천을 요구한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지출은 너무 과하다. 일단은 적의 그리자를 강탈하여 타격을 주었다는 것에 만족을 하는 것이 좋을 듯 보인다.
게다가 어쩌면 이 일은 추가적인 혜택을 불러올 수도 있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리자 물량을 빼돌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라기보다는 내부의 적이라 의심 할 확률이 높으니까. 마약이든 약이든 이를 응용하는 자에게는 그리자의 물량은 필수적이다. 그것을 빼돌려 이득을 볼 수 있는 자라면 같은 처지의 존재가 더 설득력 있다.
“이왕이면 이진혁과 싸우면 좋겠군.”
희망사항을 중얼거리며 컨테이너 입구로 이동했다.
이제는 왔던 길 그대로 도망치면 그만인 일이다. 이미 한 번 했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터.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여전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도 나름대로의 자유를 가진. 쿤이 살던 곳의 용병대들 중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가진 무리가 꽤 있었다.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너. 잠깐 거기에 서 봐.”
“……”
그 순간,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힐끔 고개만 돌려서 살펴보니 복장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군대로 치면 분대장 표식이라고 해야 할까? 어깨에 조금 도드라지는 견장이 하나 달려 있었다. 어쩌면 지휘관일지도 모르겠다.
“너 지금 4번 컨테이너에서 나왔지?”
“……네.”
“안에 문제가 생긴 거냐?”
문제라면 많이 생겼다.
내가 경비를 털고 그리자를 훔쳤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변명을 댈까, 그대로 튈까. 두 가지 선택에서 고민을 했다.
“왜 대답이 없어? 너, 어디 소속이야!?”
순간, 뒤까지 따라온 남자가 손을 뻗었다.
일단은 제압하고 빠져나가자.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손을 당겨서 목을 후려쳤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러다 당수 특기라도 하나 생기는 게 아닐까?
“꺽……”
비틀거리는 틈에 슬쩍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여기까지는 같다. 이대로 부축하면서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빠져나가면 되는 일. 하지만 일이 꼭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보다.
기이잉—!!
혐오감과 함께 어깨를 두른 팔이 뒤로 밀려났다.
남자의 얼굴이 틱틱 갈라지며 붉은 색을 드러냈다. 이단이다. 그것도 단번에 변할 정도의 중증 중독자.
“침입자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렷다.
목을 후려쳤는데 변이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회복 된 모양이다. 능력도 좋으시네. 그대로 몸을 돌려서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했다. 핏물과 이빨 몇 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잡아!!!”
경험 많은 용병들이라 그런지 반응도 빨랐다.
지금거리에 있던 병사 들 중 몇이 총구를 돌리더니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 불꽃과 굉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자동화기를 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쏘다니. 동원도 끝낸 아저씨 입장에서 뭔가 모르게 화가 나는 장면이었다.
재빨리 몸을 굴린 뒤 인근 컨테이너 뒤로 몸을 숨겼다.
타타탕. 하는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 벽면으로 불꽃이 튀었다. 군대에 있을 때나, 예비군 사격훈련에서 총을 제법 쏴 보았지만, 나를 상대로 누군가 총을 발포하는 건 첫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박력이 더 대단했다. 공포심도 마찬가지. 특기로 인해서 머리가 차갑게 정리되지 않았다면 패닉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옛 영화의 찌질한 병사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알람 때리고, 저 새끼 잡아와!!”
웨에에에에엥—!!!
부지 내로 비상 알람 소리가 퍼져갔다.
막사로 들어갔던 이들까지 전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를 헤아리니 거의 백 명은 되는 거 같다. 차남혁 이 미친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정도 숫자의 용병을 고용했다는 말인가?
“여기 있……컥!!”
접근하는 병사의 턱을 후려쳐 쓰러뜨린 뒤 밖으로 던졌다.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엇이 함께 엉켜서 바닥을 굴렀다. 이래도 숫자는 많고 사방은 포위되는 중이다.
이거, 위기라고 봐야하겠지?
“도망 칠 수 없다!!”
컨테이너 위로 누군가 훌쩍 뛰어 올라 나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목을 후려쳤던 그 남자가 얼굴이 반 정도 변이되어서 붉은 안광을 흘렸다. 그대로 잡아서 찢어버릴 듯 기세가 흉흉했다.
“도망?”
초감각으로 전해지는 정보를 근거로 몸을 움직였다.
빙글 도는 몸의 옆쪽으로 남자가 떨어졌다. 군용 단검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는 없다. 그대로 몸을 띄운 뒤 발 뒤꿈치로 남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반대편 컨테이너 벽에 부딪혔다.
“그윽……!”
“넌, 이미 돌리기에는 늦었구나.”
농밀한 이단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경비대장? 어쩌면 그보다 깊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자를 통해, 이단의 힘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과 달리, 이 남자는 완전히 몸과 이단의 힘이 일체화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강하고, 드러내기 전까지는 기색을 잡기가 어렵다.
아마도 힘을 추구하는 성향이 이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거겠지.
이 경우는 나도 정화가 불가능하다.
휘릭.
아쿤을 손바닥에서 돌렸다. 날이 위로 서고 그대로 잡아서 남자의 턱 아래를 꿰뚫었다. 푸드득. 경련이 일어나듯 그의 몸이 떨렸다. 어깨로 밀어 고정시키고는 다시금 아쿤을 틀어서 완전히 목을 끊었다.
[경험치가 증가했습니다.]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누군가를 죽여서 경험치와 정수를 얻는다.
게임 같은 알람 소리가 어쩐지 더욱 쓰리게 다가왔다. 돌이킬 수 없는 대상이라 하여도 한 때는 보통의 인간이었을 테니까.
“잡아라!!!”
“안쪽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적일 이유가 없겠지.
죽고 죽이는 판에서 남 사정 돌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
“미소한테 안마라도 해 달라고 해야겠네.”
누적되는 피로 탓에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장갑을 벗고,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발동시켰다. 빛 무리가 몸 주변으로 모여들고, 한 순간 나를 휘감았다.
공간이동.
하루에 한 번 사용이 가능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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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워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못 벗고 그대로 쓰러졌다.
거리가 상당했던 터라 피로의 누적이 심각했다. 게다가 신 행세를 하면서 공간이동을 사용 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아무리 회복이 빨라도 누적되는 피로를 무시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했으니 됐다.
쫓던 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놈들도 꽤나 황당해 할 것이다. 보고가 올라가면 차남혁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 지 궁금하다. 여건만 되면 찾아가서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
아아, 실실 웃음이 나온다.
솔솔 잠이 온다.
“그건 곤란하지.”
끙끙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늦게 온다고 연락을 받기는 했지만, 미소가 언제 올지 모른다. 이상한 쫄쫄이에 병사 복장을 걸치고 있는 걸 미소가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중년의 취미라 생각하고 넘어가 줄까?
그냥 그런 상황은 피하는 게 좋다.
옷은 잘 벗어 자루에 담아 서재 구석 상자에 집어넣었다.
시간 나면 나가서 태워야겠다. 쫄쫄이는 지금 세탁하기는 힘드니까, 미소가 없을 때 세탁기에 돌리면 되겠지. 정체를 숨겨야 하는 히어로들의 고충을 알 거 같다. 무언가 조금 궁색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대충 정리를 한 뒤 죠엘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미션이 성공했다는 것에 굉장히 기꺼워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물량의 이동 정보도 얻어냈다고 하니, 다시 만날 것을 제안했다. 파일을 그냥 전송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건 직접 만나서 상의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알았다고 답을 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그래, 얼마나 퍼졌는지 보자고.”
USB를 노트북에 연결해서 부지에서 가져온 정보를 살피기 시작했다.
패키지 A, 패키지 B. 이런 식으로 물품이 표현되어 있었다. 일단 내가 그리자를 들고 온 곳이 4번 컨테이너였으니 B라고 표시된 것이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그리자였다. 나머지는 아마도 가공을 한 물건으로 생각된다. 계획에 여유가 있었다면 그것들도 좀 빼왔으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입고, 출고……”
꽤나 오래전부터 부지를 그리자의 출납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품의 이동 빈도가 꽤나 잦았다. 변형 된 그리자로 생각되는 패키지 A는 근 몇 달 이내로 움직임이 많아졌고, 나머지들도 덩달아 흐름이 많아졌다.
A가 가루 형태의 마약이라면 나머지는 정제한 치료약인지도 모르겠다.
발표 이전과 이후로 이를 전국적으로 배포하기 위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 흐름 자체는 전국 팔도를 가리지 않고 뻗어 있었으니까.
“독과 약을 같이 푼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너무 단순한데?”
질병을 퍼뜨리고 치료약을 판다.
악랄하지만 돈 벌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 다만, 차남혁이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면 다른 이들 역시 이를 간파 할 수 있다. 같은 이단에 몸담은 자라면 더더욱. 정재계 높은 이들 중 차남혁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이동하는 물량이 모두 치료를 위한 도구라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싸웠던 남자는 절반만 변이를 했었지. 의사도 상당히 또렷하게 드러냈고. 분노로 인한 어설픈 변이가 아니었어. 군인. 병사. 그리고 변이로 인한 능력이라.
톡톡. 키보드를 손으로 두드렸다.
판은 단순하지 않다. 이단은 그것에 함몰된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차남혁이 질병과 치료약이라는 개념으로 사람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라.
사람의 욕망은 복잡하지만 의외로 단순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돈, 여자, 쾌락, 과시욕……그리고 수명. 그래, 수명이 있다. 만약, 이단에 빠진 이들 중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나이가 많은 인물이 있다면 어떠할까? 세상의 무슨 약을 써도 죽음을 막지 못하는 권력자.
그게 나라면? 어떻게든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지 않을까?
이단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은 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태아의 피를 마시고, 짐승의 심장을 갈라먹는 이들도 있는 세상이다. 가능성으로 치자면 무시하는 게 어리석을 정도로 높다.
생명연장. 이단을 통한 바이오 테크놀로지. 슈퍼 솔져.
미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설정 아니던가? 유치하다고 웃었던 적은 있지만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됐다.
지금 보이는 물자의 흐름 중에는 내 가정을 뒷받침 하는 것들이 꽤나 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사이언스 코리아. 미 제약 회사이자, 바이오 테크의 선두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회사다. 얼마 전에 국내로 지부를 넓혀서 꽤나 떠들썩하게 보도 된 적이 있다. 차남혁의 부지에서 나온 물건이 그곳으로도 흘러 들어간다.
“……생각보다 깊게 들어와 있네.”
그 외에도 여러 곳이 있었다.
아마 이걸 전 세계로 확장하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연구를 하고 이용하기 위해서. 아직은 모조리 이단에 녹아들었다 말하기 힘들어도 차곡차곡 그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다.
“신의 철퇴가 필요하겠네.”
자식새끼 잘못되면 부모가 매를 좀 들어야 하는 법이다.
이 세계에 그런 존재가 없다면, 내가 좀 대신 해 주어도 괜찮겠지.
크고 아름다운 맴매로.
※작가의 말
다음 편 하카림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오랜만에 쿤이네요. 오랜만인가? 음...뭔가 쓰는 저는 오랜만인 느낌.
그나저나 다음 스토리 구성하는게 꽤나 머리가 아프네요.
핵심적인 파트라 잘 그리고 싶은데...
뭔가 머리에 있는 스토리를 팍 꺼내주는 기계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