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왕의 지시 하에 일단의 소란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시체를 치우고, 부상당한 병사를 수습했다. 이단의 영향 하에 있던 이들은 강제로 정화된 탓에 그 반작용을 겪어야 했다. 광휘의 검이 씻어낸 것은 이단의 힘. 그것에 오염되었던 육체와 정신의 회복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달린 것이다.
공왕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이단에 저항하며 뿌리를 들어 낼 수 있기는 했지만, 그 여파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그간의 열정과 힘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며 순식간에 10년은 늙어버린 얼굴이 되었다. 머리카락도 하얗게 새고, 눈빛이 죽어버렸다. 모드가 해체되기 전, 쿤이 남은 시간을 통째로 할애하여 치료에 힘을 썼음에도 쉽지가 않았다.
결국 공왕은 칩거에 들어가야 했다.
굴락의 대신관이 죽고, 공왕은 몸져누웠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 의회파에게 빌미를 줄 수 있었다. 틈을 노리고 있는 그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면 바로 전쟁을 일으키려 할 터. 입단속을 시키며 몸을 추스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덕분에 쿤 일행 역시 칩거에 들어가게 됐다.
다만,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수갑 대신 비단이, 감시하는 병사 대신 수발드는 시종들이 위치했다.
신의 사자. 아니, 신과 같은 모습을 보인 쿤에게 함부로 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몸이 안 좋아요?”
커튼을 치며 라라가 물었다.
손에는 젖은 수건이 들려 있었다.
“끄응. 벌써 일주일째인가? 생각보다 여파가 오래가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 힘은 대가없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했네. 이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라라가 수건으로 쿤의 이마를 닦고, 세이혼이 옆에서 말을 늘였다.
싸움이 끝나고, 히어로 메이커 모드가 끝난 쿤은 그대로 쓰러졌다.
기절을 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모든 힘이 사라져 쓰러져 버린 것이다. 너무나 강력한 힘을 한 순간에 사용한 대가. 최초 알람에서는 이런 부작용 따위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음에 쿤은 한 동안 불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일이 잘 끝났잖아요. 쿤, 오빠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러게. 이단에 취한 아버지가 계속 그 상태로 있었다면……어휴.”
라라의 말에 루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며칠 간 설명한 공왕의 모습은 그냥 낯선 남자보다 못했다. 쿤과 세이혼이 별채에서 머무는 동안 고작 두 번 만난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것마저도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제한되어 거의 구금에 가까운 생활 속에서 말이다.
이단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 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거리감은 있어 보였다.
“그보다 아도란은? 아직도 못 찾은 거야?”
쿤이 고개만 돌린 채 물었다.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잔해를 대부분 걷어냈음에도 아도란은 찾지 못했다. 설마 죽었나 싶지만 상태창에는 여전히 아도란의 이름이 적혀있다. 게다가 그 미친 마법사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어렵다.
‘설마 찾으러 간 걸까?’
짚이는 부분이라면 프리실라의 편지.
찾아오라 말 했으니 그곳으로 간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전투가 한창이던 때에 아무런 말도 없이 가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아도란이 미쳤다고는 해도 나름대로 말은 잘 따르지 않았던가.
‘심장까지 그냥 맡겨 둔 채 말이야……’
보관 중이던 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래저래 아도란의 행동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열심히 찾아봤는데 없어요. 나중에 뿅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다만……”
쿤이 낮게 한숨 쉬며 답을 했다.
이래저래 아도란과도 정이 들었다. 미친 마법사라고 말을 하지만 도와준 것도 많고, 나이를 떠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서 그를 조금 더 가까이서 챙기면 어땠을까. 작은 후회가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도란에 대한 건 우리한테 맡겨라. 넌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 집중해.”
“그래야지.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기 힘드니까.”
공화국의 사태는 아직 전부 다 해결 된 것이 아니다.
현장에 있던 이들의 이단은 씻어냈지만, 아직도 영향 받은 인물들이 많다. 특히, 의회의 인물들과 굴락의 사제들. 하루가 멀다 하고 공왕을 찾아 사건의 개요를 물어오는 통에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당장은 통령의 권한으로 접견을 거부하고 있지만 이것이 영원 할 수는 없다.
시간이 되어 사건이 밖으로 드러난다면 상황이 어찌 바뀔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의회와 굴락의 신도들이 손을 잡아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대신관의 죽었다고 그 아래 신도들의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정말 무섭네. 한 번 전파되면 뿌리를 뽑기가 너무 어려워.’
이단이 무서운 점은 전파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결국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에 빠진 당사자가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그 힘에 녹아들고, 종국에는 본래의 생각이 어땠는지를 잊어버린 채 그저 이단의 종자가 되고 만다.
“라라, 내가 시킨 건 하고 있지?”
“네. 틈 날 때 마다 하고 있어요.”
“으음. 나는 조금 의심스럽군. 겨우 그걸로 진정이 되겠나?”
“일단 거목은 해치웠잖아. 이렇게라도 희석시키는 게 좋겠지.”
해서, 쿤은 쓰러지고 난 다음 날 라라를 불러서 한 가지 일을 부탁했다.
정화 된 그리자 안에 신성력을 실어서 하수에 풀어 둔 것이다. 모드가 끝나고 모든 신성점수가 날아갔지만 운이 좋았는지 바로 다음 날 앙크투 부족의 제단 점수가 수급되어 안을 채울 수 있었다.
쿤은 히어로 메이커 모드에서 자신과 하나 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기억을 공유하고 감정과 감각을 나누었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 특별했던 세상의 기억들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나와 합쳐졌던 건 그분일까 아니면 그분의 전사일까?’
기억과 감정. 의식의 흐름으로 신들의 세계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신비롭고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계였다. 하지만 완전한 별세계는 아니었다. 신들도 사랑을 느끼고 자식을 낳고 친구와 적을 만든다. 그들의 장엄한 세계는 인간들의 장소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미소? 서율? 다른 여신들일까?’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었지만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다.
준경이라 부름을 받은 것 같지만 그것조차 모호했다. 차라리 그 눈으로 본 다른 이들이 더욱 선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신의 세계에서도 이단과 싸우고 있다.’
가장 뚜렷하게 남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세계도 이단에 오염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철로 된 통들이 마구 움직이고 사각형 무기를 전부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아마도 그 증거일지 모르겠다. 단편적인 기억이라 뚜렷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각박함과 긴장감. 두려움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는 한 가지의 방법으로 신성력을 실은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축성지에 생명수를 뿌려서 헤그시아를 제배한다. 좋은 방법이다. 생명은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리자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자는 일종의 전달 도구. 이단이 실린 것처럼 신성한 힘 또한 그곳에 실릴 수 있다.
그래서 쿤은 정화된 그리자에 신성점수를 쏟아 부어 라라에게 맡겼다.
공화국 수도의 식수는 모두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나간다. 이단에 사람이 오염되는 것처럼, 그리자에 실린 신성력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식수에도 그 힘이 실릴 것이다.
어쩌면 신은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거울로 삼으라 말 하는 걸지도 모른다.
초월적 신조차 힘겹게 싸우는 이단에 대한 경고로.
힘에 취하지 말고, 경계의 자세를 항상 견지하라는 충고. 신의 말에는 허툰 것이 없다. 의미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더욱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누적된 이단의 오염을 전부 걷어 내리라 말 하기는 힘들겠지만……적어도 이것이 도움은 되겠지.’
믿어 달라는 라라의 얼굴을 보며 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직 몸이 안 좋았다. 포근한 침대가 천천히 몸을 감싸왔다. 조금 전까지 떠올리던 기억들이 차츰 희미해졌다. 지난 며칠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아마 신의 세계에 대한 것들이 이곳에서 거부당하는 거겠지.
아쉬움은 남지만 저항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또 다시……만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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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눈을 깜빡여 봤다.
집 천장이 보이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 들어왔다. 옆을 돌아보니 캐릭터가 그려진 알람시계가 보였다. 미소가 선물이라고 산 준 것이다.
다시 ‘나’로 돌아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발을 주물러 봤다. 약간 저린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괜찮았다. 쿤의 상태로 느끼던 공백감은 더 이상 없었다.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찢어보는 둥, 몸 상태를 자세하게 점검했다.
내가 쿤에 이끌려 그와 합쳐진 것은 일주일 전. 이곳의 시간으로는 전날 밤이다. 평소와 같이 게이트의 접속을 끊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파는 평소와 달랐다. 그와 하나가 되었던 감각이 짙게 남아 지금까지도 나를 흔들었다. 히어로 메이커라는 모드는 내가 아닌, 쿤이 주체가 되어 서로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능력. 지금까지는 내가 갔다고 말 하면, 어제의 일은 쿤이 부른 것이다.
일종의 자각.
쿤이라는 인물이 한 단계 더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보였다. 그리고 그 반응으로 내가 불려 갔다. 관망자의 역할에서 동반자로 변한 것이다. 이건 마치 영웅담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영웅이 자신의 길을 찾았을 때 신이 그에 걸맞은 힘을 내려주는 것.
신과 신도의 관계에서, 영웅과 영웅을 돌보는 신의 관계로 격상이 된 것이다.
***
이름 : 히어로 메이커
영웅의 마음이라는 특수 항목을 만족시켜야 발동이 된다.
신성한 의지를 내려 받아 영웅의 길을 개척하게 한다.
능력
모습을 취사하여 선택 할 수 있다.
종속된 물체/사람에 대하여 같은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
모든 능력을 페널티 없이 사용 할 수 있다.
모든 능력의 신성 점수 소모가 0으로 고정된다.
사용한 부가 능력은 모드 해제 시 모두 사라진다.
모든 능력이 2배로 증가합니다.
부가 스킬
광휘의 검 : 신성력을 모아 한 번에 폭발시킨다. 신성점수에 비례하여 위력이 강해진다. 사용 시 9할의 신성점수가 소모된다.
광휘의 오오라 : 모드 발동 시 자동으로 사용되는 스킬. 신성력이 담긴 기운을 사방으로 내뿜어, 다양한 효과를 부여 한다.
(알 수 없음) : 힘, 민첩성, 체력, 지능의 합이 100↑
‣ 유지 시간은 신성점수에 비례해서 늘어나며, 종료 시 점수는 모두 소모된다. 사용한 능력에 따라 육체에 가해지는 여파도 달라진다.
***
그리고 이게 그 스킬의 내용.
일반 스킬과는 다른 항목으로 분류되어 표시되어 있다. 이름과 능력. 부가 스킬까지. 그냥 표현이라 생각했던 광휘의 검도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모드 당시 본능적으로 스킬을 느끼고 사용 한 건지도 모르겠다.
“뒤의 설명은 알람으로 제대로 설명 좀 해 주지……”
그랬다면 쿤의 몸이 너덜너덜 해 질 때 까지 힘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뭐,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고 일단은 다음 항목을 열어 봤다. 히어로 메이커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조건.
***
영웅의 마음
영웅에 걸맞은 선택이나 행동을 했을 때 채워진다.
하얀 색의 문양이 완전히 붉어졌을 때 테두리에 황금 색 빛이 생겨난다. 이때, 히어로 메이커 모드를 사용 할 수 있다.
***
이름 옆으로 하트 모양의 보석이 하나 생겼다.
지금은 하얀색으로 돼 있지만 이게 채워지면 점차 붉게 변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알피지에 액션 알피지 타입의 표기라. 시스템을 만든 신이 있다면 멱살 잡고 물어보고 싶다. 대체 취향이 뭐냐고.
“그나저나 영웅에 걸맞은 선택이나 행동이라. 너무 주관적이잖아.”
이단을 때려잡아서 채워지는 거라면 충분히 할 만 한데, 이건 너무 포괄적이다. 도미닉 대신관을 잡고, 공왕과 대치하는 그 결의 자체가 영웅적인 결단이라는 말인데 그런 상황이 쉽게 나오겠는가. 게다가 그런 일은 보통 큰 리스크를 안는다. 이번 일만 해도 솔직히 모드의 발동이 없었다면 크게 위험 할 뻔 했다.
솔직히 이 능력은 필살기라는 의미로는 괜찮지만 전력에 보탬이 됐다고 말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설명을 읽은 쿤이 어리석은 판단을 해서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다.
지금껏 보았던 그의 성격은 자신만을 챙기며 최대한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라 등을 만나며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와 연결되어 신의 부름을 받은 영웅처럼 상황이 꾸며지고 있다. 등 떠밀린 영웅이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은 그리 희귀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나는 쿤의 행동에 제동을 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웅도 엔딩보고 공주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흡족하지, 장렬하게 검 맞아 뒈진 다음에 추모비 앞에서 스크롤 올라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번에도 느꼈듯이 그와 나의 경계는 점차 얇아지고 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죽기 싫으면 열심히 움직여야지.”
고개를 흔들흔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슬슬 창밖으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음음. 정리하는 부분이라 살짝 설명만 많은 느낌이...
쿤이 준경과 기억과 감정 등을 공유한 것은 맞습니다만, 준경처럼 선명한 것은 아닙니다.
흐릿하게 준경의 일면을 본 거죠. 물론, 모드가 반복되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자정에 돌아오겠습니다.
* 준경이 깨어난 시점 내용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