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를 처치하고 난 뒤, 쿤은 회수 할 수 있는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서 진 흑기사의 갑주와 그리자의 파편. 최초, 네크로맨서가 보고 있던 석판 등. 무한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숫자는 전부 10개. 완파 된 갑주는 그대로 버리고, 석판을 우겨넣고 10개를 채웠다.
“쿤. 쿤. 문, 열었음.”
앞을 보니, 아도린이 어느새 와 있었다.
아마 싸움 할 때도 근처에 있었겠지. 네크로맨서와 꽤나 시끄럽게 싸웠는데 다른 층의 경비가 오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의 도움 덕인지도 모르겠다. 미친 건 맞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한다.
쿤이 주머니를 품 안에 잘 넣어 둔 뒤, 철문으로 다가갔다.
“음……”
철문 뒤로는 긴 회랑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이 장소는 왕성의 지하 창고. 헌데, 양 옆으로 늘어선 기둥이나 바닥에 깔린 카펫. 화려하게 비치된 조명은 도무지 창고의 모습이라 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마치 왕성 내실과 비슷하군.’
창고에 예전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둔 거 같다.
긴 회랑 끝에는 왕좌가 보였다.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상징적으로 왕좌는 부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의 이 구조물은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으음.”
왕좌에 가까이 접근하자 아찔할 정도의 혐오감이 몸을 강타했다.
복잡하게 살펴 볼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이단의 상징이다. 게다가 엄청난 크기. 왕좌 자체가 통째로 그리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욕심 없던 사람조차 영향을 받아 탐욕을 부릴 거 같았다.
‘이건 찾아도 고민이네. 시간 내에 정화 할 수 있을까?’
이 정도 크기면 정화에 대한 반발로 이단의 생명체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걸 하나하나 처리하면서 정화를 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정화를 해 버리면 탈옥한 것이 들킬 위험이 있다. 정화를 해서 공왕이 제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그 여파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을 터. 결과가 어찌 될 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되는데까지는 해 보는 게 좋겠지.’
심호흡을 하고 왕좌에 손을 올렸다.
타는 듯 한 감각과 함께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주변으로 엉켜드는 연기. 예의 반응과 같다. 곧이어 이단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응?”
그런데 행동이 뭔가 전과는 다르다.
모습을 드러낸 이단의 존재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덤벼 들 기색이 없었다. 보통 무조건적인 적의를 드러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은 듯 고개만 숙이고 있다.
지잉—!
그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
쿤이 몸을 옆으로 튕겼다. 바닥을 손으로 짚은 뒤 허공에서 재주를 넘고 아쿤을 뽑아 감각이 자리한 방향으로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지만 타격음이 없다.
피했거나, 잡았거나. 상관하지 않은 채, 즉시 장갑의 마법을 발동해서 염동력을 토해냈다. 전면이 일렁이고, 의식으로 아쿤을 다시 불러서 의념을 집중했다.
찌른다—!
점이 된 의식이 깊게 빨려가더니 한 곳에 충돌했다.
물결 같은 파동이 점에 닿아 퍼지더니, 한 순간 힘을 토해내며 쿤을 밀어냈다. 검극부터 어깨까지 몸이 덜덜 떨렸다.
보통의 방어력이 아니었다.
“성급하군.”
일렁이는 막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이 욱신거리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경계했다.
“……누구냐?”
“남의 집에 들어와, 주인에게 정체를 묻다니. 꽤나 건방진 성격이군.”
연기가 걷히고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의복에 은색 지팡이. 새의 꽁지깃 같은 것이 목 뒤로 치렁치렁 이어져 있었다. 앞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인물. 바로 굴락의 대신관 도미닉이었다.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왕성 경비가 왔다면 이해를 하겠다.
하지만 다른 곳에 있어야 할 굴락의 대신관이 여기는 대체 어떻게 왔단 말인가?
“대신관……”
“내 작품에 누군가 손을 대는 것 같아 와 봤더니, 생소한 손님이 와 있군. 그쪽이 두 아가씨를 구해 왔다던 용병이겠지?”
“……”
“과묵하군. 좋은 덕목이야. 하지만 남의 것에 손을 댄 상황이라면 그리 달갑지는 않은 일이겠지.”
도미닉이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회색 파문이 바닥으로 번지더니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에서 형태가 희미한 망치가 날아왔다. 어마어마한 속도.
쿤이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서 피했다.
콰릉. 하며 두 망치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흔들리고 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직격을 피했어도, 충격 자체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법? 아니, 이거……’
“위대하신 굴락의 힘이다.”
따앙. 지팡이가 다시 한 번 지면을 때렸다.
하얀 포말 같은 것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쿤의 전면을 압박했다. 시작은 손톱 만 한 것이었는데, 찰나의 순간에 키 보다 높이 성장해서는 덮쳐왔다. 초감각으로 읽었음에도 피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벤다—!
의념을 모으고 아쿤으로 포말을 베었다.
거품이 한 순간에 갈라지더니 힘을 잃고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마치 파도가 치는 듯 한 광경이었으나, 바닥에 닿은 거품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모조리 사라졌다.
“재미있는 힘이구나. 그것이 의식의 검이라는 거겠지?”
“알면 그 목을 내어놓을 것이냐?”
“하하. 건방짐이 하늘에 닿는구나. 굴락께서 내리신 힘을 느끼며 절망 하거라.”
타앙. 도미닉의 지팡이가 다시 한 번 지면을 강타했다.
회색 파문이 연달아 퍼져 나왔다. 동시에 지면이 울렁이며 늪과 같이 변해갔다. 일정 영역이 아니라, 지하 창고 전역이 그렇게 변했다. 쿤이 아무리 빨라도 뛰어서 이것을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염동력을 사용해서 몸을 띄웠다.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는 거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호오. 마도구군. 일개 용병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네놈은 조금 더 심도 깊게 조사를 해 봐야겠구나.”
“사양한다!”
쿤이 그대로 회랑 벽면에 붙어서 아쿤을 던졌다.
바닥을 통째로 늪처럼 바꾸었다. 이런 능력을 사용하면서 다른 것까지 방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아쿤이 적의 주의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면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어리석다고 했을 텐데.”
우웅. 회색 파문이 그의 몸을 감싸고돌자, 아쿤이 그대로 관통되어 뒤편에 부딪혔다.
황급히 아쿤을 다시 불러냈지만, 이런 단순한 투석무기 공격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의념을 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접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신성 대지의 축복이나 이단에 대한 징벌도 마찬가지. 일단 붙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쿤이 지금 이 순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불렀다.
“아도란!! 뭐라도 해 봐!!”
“응. 응.”
“……아도란!?”
아도란이 외침에 답을 하며 빙글 돌고, 도미닉이 처음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아도란. 그 이름을 아는 눈치였다.
“τοίχος~”
아도란이 마법을 영창 했다.
밤색 나무들이 갑자기 바닥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키 정도 되는 높이. 늪으로 변한 바닥 곳곳에서 박혀, 마치 발판과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쿤이 망설이지 않고 벽면을 차고 뛰어내렸다.
“최후의 문의 일원이 이곳에 있었다는 건가?”
쿤이 몇 개의 나무를 박차는 순간까지도 도미닉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최후의 문. 아도란과 프리실리가 있던 곳의 이름을 그가 언급하고 있었다. 어찌 아는가 싶지만 지금은 그보다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상대는 굴락의 대신관이다.
이단과의 싸움은 둘째 치고, 시간 내에 처리를 하지 못하면 정치적으로도 고립 될 수밖에 없다.
‘끝낸다!’
아쿤의 끝으로 의념을 집중시켰다.
검극이 빛을 내며 공간을 관통했다. 검극부터 쿤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은 마치 창과 같이 보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거리를 삭제하고 적의 외벽을 두드렸다.
파문과 파문이 겹쳐서 마치 주름같이 일그러졌다.
마법사의 장벽은 물리적 충격을 압도적으로 흡수 하였지만, 집중된 의념을 모두 걷어 낼 수준은 아니었다. 충격의 중첩이 한계에 이르는 순간 섬광을 남기며 벽이 무너졌다.
“……네놈이!”
텅 빈 도미닉의 몸.
쿤이 망설임 없이 아쿤을 찔렀다.
기잉—!!
하지만 그 순간 떨어지는 붉은 빛 섬광.
아쿤을 밀어내고, 쿤을 저지했다. 빛이 터지는 순간, 그 역시 초감각으로 이를 간파. 걸음을 세우고 몸을 비틀었다. 떨어진 아쿤은 곧바로 공간을 타 넘어 쿤의 손으로 복귀를 하고, 붉은 빛의 잔상을 베어냈다.
‘썩을……!’
하지만 그것 뿐. 베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탄력 받던 힘이 멈춰버렸다.
게다가 초상력도 점차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지고 있는 상황. 흘러가는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도미닉이 허공을 걸어 거리를 벌리더니 쿤을 보며 말했다.
“잘도 하는군. 오르가나의 법복이 없었다면 당할 뻔 했어.”
“그것도 마도구인가?”
“그럴 리가. 굴락님의 힘이 깃든 신성한 법복이다. 지금과 같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주지. 미친 마법사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위험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의 시선이 아도란에 닿아 있다.
“말해라, 침입자. 너는 저 미친 마법사와 무슨 관계지? 어째서 내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거냐?”
“영역? 잘난 대신관의 직위가 이곳을 네 땅으로 인정해 주나 보지?”
“모르는 척 하지 마라. 최후의 문과 같이 나타난 거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서로간의 영역은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이미 합의를 했단 것을.”
“……합의?”
쿤의 뒷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도미닉이 아도란을 알아보고 최후의 문을 거론했다. 그리자에 이단을 봉인하려는 자와, 이용하려는 자. 반목의 대상으로 보고, 이해를 했다. 하지만 지금 도미닉이 하는 말은 예상하던 것과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설마, 마법사들과 굴락의 종자가 무언가 협약을 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생각했던 그림 자체가 아예 달라져 버린다.
마법사들이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돌아서는 것도 가능한 일. 지금의 상황도 복잡하지만, 앞일도 만만치 않게 됐다.
“대답해라!! 어째서 내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설마 협약을 깨고자 하는 것인가?”
“그건……”
고민했다.
마법사와 굴락의 종자가 무언가 협약을 했다면, 쿤 자신에게는 결코 좋은 것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선택의 순간. 두 호흡을 할 동안 고민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 행동이 너무 과하더군. 전쟁이라니. 우리가 아무리 속세와 인연이 없어도 그런 불협화음은 사절이야.”
마법사의 이미지.
작금의 상황. 가장 그럴 듯 한 가정을 만들어냈다.
도미닉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래서 내 것을 탐하러 왔다?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저 미친 마법사에게 가장 커다란 것을 넘겨주었다는 이야기에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거늘!”
아도란이 지키고 있던 거대한 그리자가 떠올랐다.
가득 차 있던 이단의 힘. 만약 이것을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닌, ‘힘’자체로 보았다면 지금의 말이 이해가 간다. 어쩌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모두 같지 않았을 수 있다. 누군가는 보호를, 누군가는 연구를. 또 다른 누군가는 이용을.
그 전체 협약을 어떤 인물이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도미낙과 일정 부분을 분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건 우리 문제지. 네가 일을 크게 벌여서 다른 이들까지 화나게 한다면 그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흥. 늙은 방랑자들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들의 이름이 나를 겁박 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굴락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하는데?”
쿵. 지팡이가 다시 한 번 바닥을 찍었다.
회색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라 도미닉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무서운 기세가 사방으로 번져 대기를 짓눌렀다.
“이렇게 싸우자는 건가!?”
“흥. 내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은 네놈이 먼저다. 목을 끊어 박제한 뒤, 묻겠다. 어리석은 마도의 종자들이 이래도 내 앞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지!”
“젠장.”
조금 더 주의를 끌 수 있을까 했는데, 그대로 실력 행사로 나가고 있다.
싸울 수밖에 없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심호흡을 하고 아쿤을 들어 올렸다. 사용 할 수 있는 능력들을 점검했다. 축복과 칭호. 걸 수 있는 모든 보조 능력을 떠올렸다.
‘라라의 물약이 아쉽네.’
가속 물약이나 신체 능력을 올려주는 물약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아쉽지만 없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다.
“쿤, 오빠~!!”
아쉬움이 깊어지니 헛것까지 보이는 거 같다.
쿤이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집중을 해야 할 때였다.
“쿤, 오빠!!!!”
생각보다 환각이 오래간다.
혹시 이것도 도미닉의 능력이 아닐까? 환각을 보여주어 상대의 집중을 저하하게 만드는?
“쿤, 오빠 정신 차려요!!”
“어?”
“집중하게. 우리가 돕지.”
루루. 그리고 뒤를 이어 라라와 세이혼이 장내로 들어왔다.
이들이 어떻게? 아니, 그 전에 세이혼은 다른 곳을 뒤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명은 뒤에!”
쿤이 호통치듯 터지는 세이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 대로.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해야 할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
맹약은 스킬입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상관 없어용.
도미닉 : 굴락 대신관 + 이단의 힘.
슬슬 필살기가 나올 때가 됐군요.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