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을 지나 1층. 그리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쿤은 날렵한 동작으로 병사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했다. 초감각과 은신. 두 가지 능력만으로도 헐거운 경비를 뚫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지나가자,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통로를 방의 연결로 꾸며둔 형태였는데, 중간중간에 석재 문이 달려서 각 위치를 구분시켰다. 과거 왕성으로의 기능을 했을 때는 보물을 두고 적의 침입을 방어했던 장치로 보였다.
‘성물 같은 걸 보관했다면 가장 안쪽이겠지.’
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이동했다.
초감각에 잡히는 적의 움직임은 없었지만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감각을 무시하는 경험을 겪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음?’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처음으로 초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굉장히 느낌이 희미했지만, 있는 건 분명했다. 벽면을 손으로 집어서 타 올라 간 뒤,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살폈다.
‘마법사?’
검은 색 로브를 둘러 쓴 인물이 석판 앞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법사. 쿤이 잠시 생각을 했다. 마법사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지나갈 수 있을까. 그가 서 있는 곳 너머로 마지막 철문이 보이고 있으니, 반드시 넘어 갈 필요가 있었다.
‘기습을 해서 기절시키면 될까?’
마법사라도 마법만 못 쓰게 하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쿤이 결정을 내리고 벽면에 발을 대고는 준비를 했다.
마법사가 다시 석판을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할 바로 그 때.
퉁—
발로 벽을 밀고 유연하게 돌아 마법사의 등 뒤로 안착했다.
기척에 대한 반응인지 마법사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바. 쿤이 한 손으로 마법사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세게 졸랐다. 억센 팔은 괴력의 기사수준. 마법사는 저항하지 못하고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무너졌다.
“후……”
마법사라는 족속은 예측하기 어렵다.
혹시 몰라 잔뜩 긴장을 했는데, 의외로 쉽게 제압이 되니 다행이었다. 쓰러진 마법사를 묶고 갈까, 아니면 그냥 갈까. 양 갈래의 선택에서 쿤이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
쓰러져 있던 마법사가 벌떡 일어났다. 땅을 짚은 것도 아니고, 중력을 거슬러 그대로 솟구쳤다. 마치 망령제어를 사용하여 로브를 들어 올리듯.
“……뭐?”
“τροχαλία”
놀라는 건 너무 늦다.
마법사가 무언가를 영창하고 녹색 줄기가 바닥에서 올라와 쿤의 발을 묶어버렸다. 단단한 넝쿨이었다.
“쯧!”
분명 제압을 했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났을까?
의문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 할 때가 아니었다. 쿤이 아쿤을 휘둘러 넝쿨을 잘라 낸 뒤 앞으로 튀어나가 마법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기잉—!!
보라색 막이 전면으로 생겨나더니 주먹을 막아냈다.
물결 모양이의 흔적이 반복해서 쌓여갔다. 충격을 상쇄하는 마법. 쿤이 그 상태로 허리를 반 회전 더 하며 주먹이 닿은 지점으로 충격을 다시 찔러 넣었다. 타격의 요령. 세이혼에게 곁가지로 배운 기교 중 하나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이 부서졌다.
두 걸음 물러난 마법사가 보이고, 쿤은 아쿤을 앞으로 내민 채 돌격했다.
“일어나라.”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지면이 한 차례 들썩하다니, 바닥 석재가 무너지고 회색 손이 불쑥 올라와 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움직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죽은 자를 다루는 마법사. 아니, 학자라고 불러야 할까?
“네크로맨서!?”
“침입자를 격퇴해라.”
푸스슥. 돌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해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 넓지 않은 터였음에도 순식간에 수십구의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크로맨서. 요새에서 보았던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있다.
망령제어.
쿤이 망령제어를 사용해서 주변 해골들을 손 아래로 두었다.
제어권이 충돌을 일으키고, 해골들이 제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자신만만하게 해골을 불러왔던 네크로맨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흥.”
쿤이 그 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 십구의 해골은 정지한 상태. 네크로맨서한테 접근하는 것에 방해꾼은 없었다.
“Ασπίδα!!”
접근하던 쿤의 앞으로 두꺼운 석판이 솟아올랐다.
진로를 방해하려는 수작. 그대로 아쿤에 의념을 집중 한 뒤 찔러 넣었다. 힘은 점에 닿아서 선으로 퍼져갔다. 방사형 타격. 석판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휘날리는 흙먼지는 타격의 충격을 증명했다.
“άνεμος!”
막 아쿤이 네크로맨서에게 닿으려는 순간, 돌풍이 불어와 그의 몸을 흔들었다.
꽤나 수법이 다양하다. 쿤이 뒷발로 땅을 찬 뒤 염동력으로 전면을 밀어냈다. 바람이 갈라지고, 쿤의 몸이 자유로워졌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단정적으로 답하며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물체가 쿤의 진로를 막아섰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쉽사리 좁히지를 못하고 있다. 쿤이 인상을 와락 구긴 뒤, 자신의 앞으로 뛰어내린 존재를 바라봤다.
“……흑기사?”
앞서 2층 객실에 앉아있던 흑기사였다.
그것도 한 구가 아니었다. 앞에 하나 옆으로 둘. 그리고 위편에서 계속 떨어져 내렸다. 숫자를 헤아리니 거의 10구에 육박했다.
“건방진 놈. 감히 내 연구실에 들어와 놓고 무사히 나갈 줄 알았더냐?”
네크로맨서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한 뒤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에 알이 굵은 반지가 하나 껴져 있었다. 쿤이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반지에 박힌 커다란 알이 이단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굉장히 느낌이 강했다.
‘이쪽 네크로맨서와도 손을 잡았다 이거군.’
이단의 등장이 이제는 놀랍지 않다.
어차피 굴락이 이단의 세력이라면 다른 놈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쿤이 호흡을 고르며 아쿤을 세게 쥐었다.
‘그보다 이 기사들……’
2층에서 보았던 흑기사는 껍질만 남은 것이라 상관이 없었는데, 지금 모습을 드러낸 흑기사들은 하나같이 이단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돋보기로 보았을 때는 네크로맨시로 살려낸 존재라 설명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것은 그 설명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자. 이단의 증표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구나.’
본디, 네크로맨시에서 사용하는 데스나이트는 기사급의 망령을 사용하여 힘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생전만큼 힘이 강하며 자의식도 뚜렷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들은 검은 갑옷을 둘렀을 뿐,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저급한 망령을 이단의 증표로 강화하여 억지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데스나이트를 양산하고자 하는 시도인가?’
기사급의 원령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존재는 복속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반면, 이단의 힘을 사용하여 저급한 망령을 다루면 본래의 것보다 힘을 떨어질지언정 숫자는 만족할 만큼 생산이 가능하다. 다루기도 쉽고.
쿤은 흑기사가 나타난 지 한 호흡도 되기 전에 모든 사정을 간파했다.
“저놈을 잡아와라!!”
네크로맨서의 외침과 동시에 열 구의 흑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하다. 쿤이 첫 충돌에서 그것을 간파했다. 기사금은 되지 못한다 해도 그 아래 수준은 충분했다. 게다가 숫자가 열. 뒤에서 보조하는 네크로맨서까지 더해지면 상대의 전력은 어마어마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질 거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쿤이 아쿤을 손 위로 튕기며 몸을 뒤로 뺐다. 흑기사의 두꺼운 검이 목 앞으로 스쳐갔다. 마디 하나도 안 되는 차이. 그럼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떨어지는 아쿤을 잡은 뒤 검을 휘둘렀던 흑기사의 턱 아래를 찔렀다.
덜컥. 충격을 받은 흑기사가 무너지고, 그 위로 다른 흑기사가 뛰어 들었다.
머리위로 하나. 허리로 둘. 그리고 뒤에서 찌르기로 셋. 틈을 노린 공격이 마치 고기를 다지듯 들어왔다. 하나하나 셈하기도 힘들 정도의 공격이지만, 손에 잡힐 듯 모든 것이 읽혔다.
머리를 노리는 공격을 아쿤으로 빗겨내며 몸을 틀었다.
허리를 향해 다가오는 공격이 있지만, 빗겨낸 흑기사의 검으로 막을 수 있다. 불꽃이 튀고 충격이 전해지는 순간 찌르던 검날이 등 언저리까지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쓰러지듯 몸을 옆으로 누이며 바닥을 짚고 빙빙 돌아 측면으로 빠져나갔다. 타 넘은 건 첫 공격을 하였던 흑기사. 찌르기는 그 몸뚱이에 적중했다.
여섯이 하나에 엉켜 붙었다.
남은 셋이 허둥지둥 상황을 파악하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신성 대지의 축복을 쓸까. 적은 이단의 힘을 사용하고 있으니 효과가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개를 흔들고 뛰어나갔다. 필요 없다. 지금은 본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상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하고 싶었다. 과연 통할까. 능력이 어디까지 힘을 발휘 할 수 있을까.
직접 상대하고 확인하고 싶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이 정도라면.’
발끝으로 지면을 찍고 달렸다.
선두의 선 흑기사의 검을 측면으로 흘린 뒤 몸통을 어깨로 밀어 올렸다. 쩔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관절 틈 사이로 이단의 기운이 새어나왔다. 예전 골렘과 마찬가지로 아케인 스톤과 같은 역할을 이단의 징표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찌른다.’
의념이 하나로 모이고, 아쿤으로 집약되었다.
아지랑이 같은 것이 검면을 타고 흘렀다. 완벽하지 않다. 정말로 의념이 하나로 집중되는 것이라면 이런 흔적조차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들어 올린 흑기사의 복부로 아쿤을 찔러 넣었다. 네크로맨시와 이단이 가진 힘이 저항을 하지만 부질없이 찢겨나갔다. 힘이 분쇄되고 고철로 변한 흑기사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좋은 알람.
즉시 몸을 뒤로 빼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들고 돌격하던 흑기사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텅 빈 몸통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쿤이 무릎을 걷어 차 중신을 뺏은 뒤 쓰러지는 몸통 깊숙한 곳으로 아쿤을 찔러 넣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좋구나.
통한다. 통하는구나.
네크로맨서도, 이단도 두 손으로 처리 할 수 있게 됐구나.
쿤이 웃으며 뛰었다.
검이 머리를 쪼갤 듯 떨어졌지만, 이미 초감각이 읽고 전해주었다. 아쿤으로 날을 치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빙글. 시선에 흑기사의 몸이 잡히고, 그대로 베었다. 어깨부터 목 언저리까지. 깡통이 찢어지듯 사선으로 베어진 채 구석에 처박혔다.
‘속도를 조금 더 내 볼까?’
화르륵. 불꽃이 번져나가 쓰러진 흑기사를 태웠다.
프리실라의 마법 장갑이다. 사용한 인물이 쿤이기 때문인지 곧바로 경험치와 정수에 대한 알람이 들려왔다.
“뭐하는 거냐!? 저 놈 하나를 못 잡아!?”
네크로맨서가 역정을 내었다.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흘러오더니 박쥐와 같은 형태가 되어 쿤을 덮쳤다. 총론에서는 본 적이 없는 능력이다. 어쩌면 베사미어가 미처 익히지 못한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쿤이 의식을 집중하며 검은 박쥐를 베어냈다. 마법을 이루는 마력조차, 집중된 의식의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검은 파편이 종이마냥 사방으로 흩날렸다.
‘……음.’
그때, 쿤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의식의 힘이 처음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싶지만, 다시 점검해 봐도 같았다.
‘의식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무한하게 퍼 올리는 힘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쿤이 아쉬움에 혀를 차며 손을 내렸다. 세이혼과 대련을 할 때는 이렇게 집중해서 뽑아 낸 적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던 내용이다.
‘어쩔 수 없군.’
이가 없으면 잇몸을 사용하는 수밖에.
“신성 대지의 축복.”
흔들리는 흑기사.
쿤이 아쿤을 고쳐 잡으며 다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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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이 흑기사를 전부 때려잡는 데는 채 10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단의 힘으로 구동되는 흑기사는 신성대지의 축복이 깔리는 순간 거의 힘을 잃었다. 네크로맨서 역시 크게 당황하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내 제압을 당했다.
“하.”
후드를 벗기고 쿤은 왜 네크로맨서가 처음에 제압되지 않았는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살아있다고 하기 힘든 존재였다. 자신의 영혼을 내크로맨시로 부여잡은 뒤, 이단의 상징으로 고정한 것이었다. 전설 속에서 존재하는 리치의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할까. 그 정도까지 수준이 되지 못하여 편법을 부린 거 같았다.
쿤이 네크로맨서의 멱살을 잡아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말해라. 네놈도 속삼임을 듣고 합류한 건가?”
“……그걸 어떻게!?”
“뭐, 이쪽이랑은 이래저래 인연이 있어서. 그럼, 공화국 내부에 속삼임을 들은 건 누구누구가 있지?”
“내가 말 할 거 같으냐?”
“안 하면? 이대로 죽고 싶은 거냐? 몸을 네크로맨시로 고정 할 정도라면 꽤나 목숨에 연연하는 성격 같은데.”
쿤의 아쿤이 상대의 턱에 닿았다.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죽기 싫어 이런 모습까지 취한 인물이라면 협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갑자기 만나, 시간을 지연시키기는 했지만 상대가 이단과 깊숙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면 이건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빼 내어, 공화국의 돌아가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큭……좋다. 말 하겠다. 하지만 네놈도 약속해라. 내가 전부를 말 하면 살려 주겠다고.”
“좋아.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정보만 알아내면 네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짧게 답하며 진실의 돋보기를 꺼냈다.
약속. 그래, 일단은 약속이라 말을 했다. 과연 지킬 지는 장담 할 수 없지만.
네크로맨서가 뼈만 남은 입을 달싹이더니, 답을 하기 시작했다.
“공화국에서 속삭임을 듣고 그 힘을 받아들인 세력은 전부 셋이다. 나머지는 영향을 받거나, 그냥 명령을 따르는 정도지.”
“셋? 말해라. 어디지?”
“굴락. 굴락의 팔. 하푼.”
“하푼? 이번에 다시 만든 조직인데, 그들이 모두 영향권에 있다고?”
“일부러 조직한 세력이니까. 임시 대장으로 있는 텐이라는 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속삭임을 받아들이고 그 힘을 취했다.”
하푼은 솔직히 예상외였다.
굴락과 굴락의 팔이야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말이다.
쿤이 돋보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네크로맨서가 말 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죽는 게 싫기는 한 가 보다.
“그렇다면 네놈은? 네놈도 속삭임을 받아들인 건가?”
“흥!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았을 뿐이지, 그 헛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놈들이야 영광이 있다 생각하며 그곳에 빠져 들었을 뿐.”
“그렇다면 굴락의 전부가 속삭임을 들었다는 건가?”
“……네놈 속삭임이 전파하는 방식을 제대로 모르는군?”
“방식? 속삭임을 듣고 그리자를 발견하는 게 전부 아니었나?”
베사미어에게 파악한 바로는 그렇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웃었다. 비웃음. 뼈만 겨우 남은 얼굴을 비틀어 표정을 만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아직 그 기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건 사실이지. 굴락이 전부 그 아래에 들어갔다는 의미는, 대신관이 속삭임에 빠졌고 그 아래 것들을 오염시켰다는 말이다.”
“……전부가 듣는 건 아니라 이거군.”
“흥.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잘도 속삭임은 알고 있군. 대체 어디서 나온 놈이냐, 너는?”
정보를 캐내고자 했지 비아냥거림을 듣고자 한 건 아니다.
쿤이 멱살을 세게 틀어쥐었다. 네크로맨서의 빈약한 몸이 퍼드득 떨렸다.
“자, 잠깐! 나는 사실을 말했다! 이제 날 풀어 줘!”
“그 전에 한 가지 더 확인 할 게 있다. 아까 협력하는 관계라고 했지? 넌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던 거냐?”
베사미어와 마찬가지로 이놈도 이단에 완전히 넘어간 형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일까? 그냥 숨어있는 네크로맨서1은 분명 아닐 테니.
“뭘 하겠어!? 전쟁에 사용할 병력을 늘리라고 이곳에서 처박혀 있는 거 아니냐? 내 몸만 정상이었어도 그딴 놈 말을 듣지는 않았을 텐데!”
“그놈?”
“흥. 지금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만들고 있는 당사자. 도미닉 말이다. 대신관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갖은 일을 벌이고 있지. 네놈도 그 인자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네크로맨서와 굴락의 대신관이 손을 잡았다.
이 사실도 놀랍지만, 그 이유가 전쟁에 사용할 병력을 충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굴락이 전쟁의 특수를 노려 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병력은 상황을 주도하기 위한 수단. 즉, 균형추를 맞추는 돌과 같다.
죽어도 되살아나는 병사.
얼마나 쓰기 좋은 말인가.
쿤이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핥고는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자는 어찌 하려는 거지? 전쟁을 일으킨 다음에 굴락을 전파하려는 속셈인가?”
“제대로 알고 있군. 전쟁은 길어질 거다. 오랫동안. 그 사이로 굴락이 파고들어 속삼임을 전파하겠지. 이에 넘어간 이들은 하나로 뭉칠 테고, 싸우는 두 세력을 거부하겠지. 결국 공화국은 굴락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거다. 그 사이에서 죽어가는 이들은 내 양분이 되어 줄 테고.”
“협력하는 사이라 이거군. 전쟁을 악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병력을 양산하지만, 정치에는 끼어들지 않고 양분과 시체만 양도받는.”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전쟁과 죽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지.”
시체와 같은 얼굴로 네크로맨서가 웃었다.
본성. 죽음을 탐구하는 네크로맨시는 본디, 사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본능이라 여기며 힘에 취하는 것은 결국 뒤틀린 탐미의 대가일 뿐.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 맥락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자에게는 볼 일이 없다.
“그럼 약속을 지……커억!!”
아쿤이 목을 꿰뚫었다.
불신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쿤의 몸을 더듬었다.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라 지킬 거라 믿은 듯 보인다. 하지만 쿤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약속을 저버렸다.
‘전쟁과 죽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웃기는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와는 무엇도 거래하지 않는다.
찔러 넣은 아쿤을 옆으로 그었다.
※작가의 말
오예 경험치.
* 동네에서 메르스 환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