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생각했다.
이 전쟁이. 이 상황이 이단에 의해서 계획 된 거라면 그냥 둘 수는 없다. 수작대로 놀아나며 이득을 그냥 건네주는 것은 마뜩치 않은 일. 무언가 작은 돌이라도 던져서 방해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라라와 루루도 걸린다.
지금까지야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세력의 균형 문제일 뿐 그 이상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단이 개입되어 있고, 전쟁을 통해 굴락을 전파하려는 의도라면 라라와 루루의 안전이 걱정된다.
둘은 신관이고 결국 이단과는 반발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냥 두고 떠난다는 것은 죽으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아직 입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둘이 마음속에 들어와 있음은 사실이다.
쿤은 생각을 정했다.
“어찌 할 생각인가?”
“일단 공왕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완전하게 이단에 넘어 간 가면?”
“그럴 거 같지는 않아. 종교적 매개체가 없이, 이단에 완전 복속되는 건 어려워. 공왕의 경우는 지금 자신의 힘을 믿고 있지. 이는 내재적 욕망이 분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 게다가 편지에서도 그를 허수아비라 표현했어. 완전히 이단으로 넘어 간 거면 그냥 그리자에 오염 된 놈이라 지칭했겠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건가?”
“아마도. 내가 축성지를 깔거나 성물을 만드는 것처럼 이단도 비슷한 일을 하는 거라 보여. 우리가 그 대상을 파괴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단에 의해 내재적 욕구가 자극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근원을 제거하는 것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베사미어가 그러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이곳을 나가는 것과, 진원지를 찾는 것. 두 가지가 먼저 필요하겠군.”
“응. 응. 아도란. 같은 생각.”
“……!”
스르륵……
그 순간 바닥이 물결처럼 퍼지고 아도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쿤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핀네스도 그렇고, 아도란도 그렇고 초감각조차 잡아내지 못하는 이런 이동법은 솔직히 가슴이 철렁하는 부분이 있다. 만약 불시에 습격해 버리면 그냥 당할 거 아닌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쿤이 입을 열었다.
“같은 생각이라니, 무슨 말이야.”
“아도란도 탈출. 그리자 추적.”
“이야기를 전부 들은 거야?”
“응. 응. 아도란. 여기. 계속 있었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구석에 놓인 카펫 아래였다.
대체 저 공간에 어떻게 들어가 있었다는 걸까. 쿤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핀네스 소년에게 받았던 편지를 건네주었다.
“오. 오. 프리실라.”
“응답이 없다고 하던데. 전부 무시 한 거냐?”
“기억 안 나. 아도란 모름.”
“그래, 어련하겠냐. 그보다 불쑥 튀어나왔으면 따로 마법이라도 기억 난 거겠지? 도움이 될 만 한 게 있냐?”
쿤이 묻자 아도란이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품 넓게 눌러 쓴 로브가 좌우로 넓게 퍼지더니, 그 아래 그림자에서 돌로 만든 골렘 두 구를 토해냈다. 저건 대체 어떻게 저기에 들어가 있었던 걸까. 쿤은 스쳐가는 질문을 그냥 발로 차 버렸다.
“ένταση~!”
아도란이 주문을 말하며 골렘을 손으로 가리켰다.
빛이 잠시 반짝이고 돌덩이에 불과했던 골렘의 모습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는 세이혼으로. 다른 하나는 쿤으로. 표정이 없고 상태가 딱딱해 보이는 걸 제외하고는 완전히 똑같았다.
“더미인가. 탈출을 숨기기에는 괜찮군.”
“응. 응. 아도란 똑똑.”
“……그래, 이번에는 좀 잘했다.”
칭찬해 달라는 아이 같아서 쿤이 마지못해 말을 했다.
좋다고 빙빙 도는 모양새가 나름대로 좋은 반응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쿤이 변형된 골렘의 상태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조작 해 둔 뒤, 세이혼을 돌아봤다.
“만약 공왕이 무언가를 숨겨둔다면 그 위치가 어디 일 거 같아?”
“집무실 금고나, 과거 왕성에서 사용하던 지하 창고가 되겠지.”
“두 곳인가. 아도란 마법의 유지 시간은?”
“두 시간? 세 시간?”
“……길지는 않군. 내일이면 또 까먹을 테고?”
아도란이 바람이 불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 쳐 주고 싶다. 쿤이 꾹 참았다.
“어쩔 수 없군. 양쪽으로 나눠서 찾아보도록 하자. 가까운 곳은 역시 집무실 금고겠지? 설명 해 줄 수 있나?”
“흠. 집무실 금고보다 지하 창고로 가게나. 공국이 무너지고 난 뒤, 지하 창고는 완전히 버려지게 됐어. 가는 길은 멀어도 침투는 더 쉬울 거네.”
“너무 멀면 기억하기 힘들 텐데.”
“노력해 보라고.”
세이혼이 가볍게 웃으며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들어왔던 지하 감옥 통로부터 시작해서, 왕궁 지하 창고로 이어지는 지도였다. 그가 공화국을 떠난 게 벌써 십 수 년 전임을 떠올려 보면 대단한 기억력이었다.
“기억했나?”
“음. 대충은.”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의 달인 덕분인지, 늘어난 지능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모두 머리에 담아 둘 수 있었다. 세이혼이 그려둔 그림을 발로 슥슥 지운 뒤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인데. 방법이라도 있나?”
“경비도 문 앞에 없고, 잠금장치도 허술한 것. 우리가 얌전히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군.”
“도망 갈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방법은?”
“뭐, 굴러먹던 경험이 있어서……”
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건물 입구에 경비가 둘 서있고, 정작 방 앞으로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넉넉한 시간으로 허술한 잠금장치 따는 것 정도는……
딸칵.
“식은 스튜 마시기지.”
부러진 옷핀을 바닥에 던지고는 쿤이 웃었다.
철창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
쿤이 갇힌 지하감옥은 이름만 음침하지 사실은 저택의 1층 지하 별채에 불과하다. 특수범들을 수용하는 것이라 상주 인원도 적고, 경비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 입구에는 늘어진 얼굴의 경비 둘이 전부.
쾅쾅.
“뭐, 뭐야?”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저기에는 아무도 없다고.”
쾅쾅.
“바, 방금 들었잖아!”
“뭐야, 뭐야! 누가 침입한 거야?”
“멍청아 호들갑 떨지 말라고. 혹시 모르니까 넌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와 볼 테니까.”
둘 중 한 명이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막다른 지역으로 좌우로 배치된 방도 창고로 사용 할 뿐 사람을 투옥시키지 않는다. 걸음 거리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흐.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지?”
“쉿.”
“……!”
혼잣말.
하지만 확인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방증이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은 보자기 하나가 바로 앞에 두둥실 떠 있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그대로 넘어갔다. 쿤이 염동력으로 잘 받아 준 뒤 조심스레 뉘였다.
“이곳도 끝났다.”
세이혼이 입구 쪽에서 걸어 나왔다.
입구에서 지키던 경비도 까무룩 기절해 있었다. 치던 찌르던 흔적 없이 기절시켰을 것이다. 적어도 한 두 시간 내로 깰 상태는 아니니 일만 마치고 돌아오면 귀신 소동 정도로 일을 마무리 할 수 있다.
“그럼 최대 두 시간으로 잡고 움직이자고. 만약 걸릴 거 같으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 해 준 은혜가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넘어 갈 수 있을 거다.”
“배운 게 있는데, 걸려서야 쓰나.”
“흥. 걸리면 수련 시간을 배로 늘려주지.”
“이 악물고 해야겠네.”
툭. 세이혼과 주먹을 맞댄 후 쿤이 건물 계단을 타고 달렸다.
#
세이혼이 알려준 왕성 지하 창고는 지하 감옥을 벗어나 작은 숲 하나를 가로 질러야 나온다. 전력으로 달려야 왕복으로 시간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쿤. 쿤. 도와줘?”
“……따라온 거냐?”
“아도란 심심. 쿤, 느림.”
따악. 아도란이 옆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녹색 빛이 쿤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기묘한 느낌. 무언가 활성화 되는 감각과 동시에 땅을 차는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쿤의 몸이 쏜살같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가속 물약하고 비슷하군.’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나쁜 능력이 아님을 알아채고 있었다.
가속 물약이과 분노의 질주. 둘의 중간 즈음 되는 성질의 마법 같았다. 지면을 찰 대 마다 배경이 쭉쭉 밀려나갔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들었어? 조만간 전쟁이 일어 날 거 같다더군.”
“으음. 벌써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퍼진 건가? 우리 있는 쪽에서도 말이 많더군.”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쿤이 지면을 찬 뒤 통로 위쪽 횃대를 손으로 치며 몸을 돌렸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정말로 전쟁이 시작되면 여럿이 죽어나갈 텐데. 꼭 그 방법밖에 없는 건지……”
“그러게 말이야. 이제 곧 셋째가 나오는데. 전쟁나면 어찌해야 할 지……음?”
“응? 무슨 일이야?”
“아, 아냐. 아무것도. 요즘 잠을 통 못 자서 그런지, 예민해 졌나 봐.”
바람이 스쳐가고, 쿤의 몸이 복도를 가로지르는 남자 둘을 넘어섰다.
착지하는 것에 들리는 소리는 실바람. 바로 튕겨 벽 그림자 사이로 숨어드는 그의 모습은 눈 뜨고 봐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기민했다.
‘몸이 가벼워.’
아마 공물을 바치고 일어났을 때부터인 거 같다.
능력이 변하고 단계가 오른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가벼움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어긋난 재단을 바로잡고,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단련한 후의 모습 같다.
능력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나 잘 순조롭게 제어되었다.
지금이라면 단검을 허공을 띄운 채로 의식의 검을 사용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세이혼이 파훼법이라 들고 나온 것을 역으로 카운터 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어째서 이 정도까지 컨디션이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지금의 상황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빠르게 간다.’
건물을 벗어난 쿤이 전력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들판을 달리는 짐승과 같았다. 수풀이 부서지고 나무가 밟혀, 부러졌다.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세게 울렸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이라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이었다.
“쿤. 쿤. 너무 빨라.”
그런 속도를 아도란은 대체 무슨 수로 따라오는 건지.
쿤이 전력으로 달리면서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기괴한 마법사는 가끔 상식을 너무나 쉽게 깨트린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쉔조차 쉽게 제압하고 상황을 마무리 짓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달린 결과 세이혼이 말 한 왕성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그대로 두어 보전만 했는지 주변이 삭막했다. 경비로 보이는 이들이 검을 패용 한 채 슬금슬금 돌아다녔다. 숫자는 제법 되었지만, 딱히 삼엄하지는 않았다.
“지금부터 조용히 해. 걸리면 안 되니까.”
“응. 응. 아도란은 숨어.”
스르륵.
아도란이 땅 아래로 스며들어갔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좀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쿤이 고개를 흔들었다. 미친 마법사와는 상식으로 대화를 하면 안 된다. 끊고 상황에 전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이 아래인가?’
쿤이 세이혼이 그려준 지도를 떠올리며 왕성 외벽을 돌아갔다.
공감각적으로 그려지는 지도의 그림은 현재 보는 왕성의 모습과 겹쳐지며 길을 안내했다. 갈 수 있는 길은 정문을 통해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타는 것이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더 안전 할 것 같았다.
염동력.
이 능력은 이럴 때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몸이 무형의 힘이 밀려서 천천히 떠올랐다. 2층 창문가지 거리는 세 사람 분의 높이 정도. 염동력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
2층 창턱에 도착한 순간, 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검은 색 갑옷은 입은 기사가 그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기사급. 아니면 그 아래의 존재나 패용 할 법 한 무장이었다. 쓰지 않는 왕성 2층 객실에 무슨 기사인가.
쿤의 머리가 판단을 내리지 못해 한 순간 엉켰다.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쿤의 등장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저 자세로 자는가 싶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감각에 잡히지 않았잖아?’
아도란은 마법사, 핀네스는 종족 특성.
하지만 기사가 초감각을 벗어나 숨어있는 건 이상하다. 쿤이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기사 앞에 섰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었다.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군.’
가까이서 자세히 살피자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무언가 잘 꾸며진 인형 위로 갑옷을 걸쳐 둔 것에 불과했다. 재질을 알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공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돋보기.’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상자를 열어 돋보기를 꺼내, 흑기사를 살폈다.
***
망령기사의 껍질
오래 전 잉크하톤 학파에 만들었던 망령기사의 껍질이다. 힘의 중추였던 망령은 모두 해방되고 그 껍질만 이렇게 남아 있다. 외골격이 전부 흑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강도가 매우 대단하다.
***
‘잉크하톤?’
기억하는 이름이다.
베사미어를 잡을 당시 들었다. 언데드의 난을 일으켰던 네크로맨서 학파의 이름이다. 잊힌 줄 알았던 학파의 산물이 아직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게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설마 이단과 관련이 있는 건가?’
의심스럽다.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 창고로 가야 하니 살필 시간이 없었다. 쿤이 잠시 그 앞에서 망설이다가 상자를 열어서 무한의 주머니를 꺼냈다.
궁금하면 가져가서 살펴보면 될 일.
‘그러라고 내려주신 건 아니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으려나.
쿤이 주머니를 펼쳐 흑기사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작가의 말
줍줍. 줍줍.
* 쿤의 맹약은 라라와 루루를 공화국에 데려간다. 이것으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