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13화 (113/240)

별채에 들어오고 3일째 되는 날.

공무원으로 보이는 인물들과 몇 번의 대면을 끝냈다. 주로 그 동안의 일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이름만 다른 부처의 인물들이 와서 받아 적어가는 통에 꽤나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음식도 좋고, 덮고 자는 침구류도 고급의 것이지만 내키지 않았다.

공왕과 대면하고 뭐라도 빨리 결단을 내리고 싶었다.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상태로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좋네.”

“그쪽이 지겨워 진 건 아니고?”

“하하. 그럴 수도. 한시라도 빨리 사정을 털어내고 란을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네. 게다가 자네가 그래서야 흑열병을 어찌 고치겠나.”

“뭐……그렇기는 하지.”

쿤이 머리를 긁적이며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별채 밖으로는 백 명이 도열하고도 남을 공터가 있었다. 무기 패용도 허락되고, 별채만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이동도 자유로웠다.

***

초상력

의지를 현실에 개입시키는 힘.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수치에 따라 간섭 강도와 지속시간이 늘어난다. 초상력은 25단위로 추가 능력을 부여받는다. 초상력은 장비나 기타의 능력으로 증가시킬 수 없다.

***

융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얻은 능력.

오면서 틈틈이 다뤄 보기는 했지만 아직 미진하다. 세이혼이야 의식의 검을 벌써 깨우쳤다면서 놀라워했지만, 위력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세이혼의 것이 강철 검이라면 쿤의 것은 젓가락. 설명에서 나왔듯이 이는 장비나 기타의 능력으로 증가시킬 수 없다. 꾸준한 단련만이 이를 늘릴 수 있었다.

‘그래. 늘어져 있어서 뭐하겠어.’

아쿤을 손 위로 빙글빙글 돌리며 공터에 섰다.

블루 비는 융과의 싸움에서 부서졌다. 기회가 된다면 양질의 단검으로 하나 더 구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땅하지 않다.

정 구하기 힘들면 공왕과 대면 할 때 보답으로 하나 내 놓으라고 말 해도 되고.

‘그건 꽤 속 시원하겠네.’

세이혼이 검을 늘어뜨리며 앞으로 섰다.

쿤이 바짝 긴장 한 채 단검을 세웠다. 그와 융의 싸움을 견식한 뒤로, 쿤은 자만심을 버렸다. 신의 도움으로 능력이 빠르게 오르며 ‘이 정도면 됐겠지.’ 라고 은연중에 심었던 생각을 잘라낸 것이다.

‘초감각을 사용해서 기회를 잡는다……’

초감각은 초상력을 얻을 당시 변형된 특기다.

위기 감지가 진화 된 것이라 보면 쉬운데, 하푼식 감각 수련법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푼식 수련법이 주변 정보를 종합적으로 전달받아 이에 대응하게끔 하는 능력이라면 초감각은 이를 바탕으로 예지에 가까운 경고를 보내오는 새로운 감각이었다.

주변의 수많은 정보를 전달해도 인간인 이상 그것을 단번에 처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초감각은 우선적으로 위협이 될 만 한 것을 정리하여 경고한다. 위기 감지보다 보다 정확하고 빠른 능력이라고 보면 편하다.

‘이렇게……!’

쿤이 몸을 사선으로 틀었다.

흰 빛이 옆으로 스쳐갔다. 준비 동작도 거의 없는 세이혼의 찌르기. 초감각이 없었다면 반 박자 느리게 이를 파악하고 방어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 박자 빠르게 회피를 할 수 있었고, 반격의 기회도 잡을 수 있다.

— 찌른다.

강렬한 의지가 허공을 때렸다.

들려있지 않은 단검이 거리를 찢고 세이혼의 가슴을 노렸다. 허상. 하지만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빠르군!”

세이혼의 몸이 빙글 돌았다.

가슴팍이 길게 찢어져 있다. 검극에 닿은 옷자락이 찢어진 것이다. 초상력. 메르한의 말 대로는 의식의 검. 위력 자체는 낮지만 이런 식의 기습으로는 충분히 효과적이다.

촤르륵. 쿤의 허리춤에서 단검 열 자루가 하늘위로 튀어 올랐다.

망령제어. 스무 날 동안 할 일이 없어 다루기만 한 것이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폭풍처럼 단검이 휘몰아쳐 세이혼을 노렸다.

“멋지군. 하지만……”

선. 하나의 기운이 세이혼과 쿤 사이를 가로질렀다.

실 끊어진 연처럼 단검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쿤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두 걸음을 물러났다. 입가에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뭐지?”

“자네가 융과 싸우는 것을 보고 생각해 봤네. 의식의 검을 한 곳을 집중하여 그냥 쏘아 보낸 것이네. 가장 효율 나쁜 방법이겠지만, 의식으로 망령을 제어해야 하는 상태라면 다른 것보다 효과적이겠지.”

“의식을 베어냈다?”

“보다시피. 억지로 끊어진 의식은 자네에게도 피해를 주네. 망령제어를 활용하는 단검술은 굉장히 대단해 보이지만 이런 단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열심히도 하는군.”

“어제보다는 강해야 하지 않겠나?”

쿤이 픽 웃고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열 자루의 단검을 모두 바닥에 내려 둔 채. 오직 아쿤 하나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단검은 단점이 많은 병기다. 창처럼 길지도 않고, 둔기처럼 파괴력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검처럼 다양한 변화에 능수능란하게 대응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장점이라고는 손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 정도.

‘의식을 가득 채우고, 이를 단검에 싣는다.’

검과 내가 하나 된 경지.

본래 의식의 검에 이르기 위해 도달해야 할 지점을 쿤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집중 된 초상력이 단검에 실리고, 찌른다는 의미의 힘이 배가되었다.

“좋군!”

세이혼이 크게 웃으며 검으로 응대를 해 왔다.

아름답게 이어지는 검의 궤적이 점에 닿고, 늦여름의 벌레 우는 소리를 토해냈다. 점에서 번져,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흔들림은 거대한 소리는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그것은 충돌에서 두 걸음씩 물러난 쿤과 세이혼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훌륭하군. 훌륭해.”

짝짝짝.

그때, 누군가 박수를 치며 장내로 들어왔다.

쿤과 세이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에야 그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별관에서도 이 정도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 뿐이다.

“그 나이에 그런 경지라니. 놀랍기 그지없어.”

바로 쉔이었다.

세월을 직통으로 맞은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습니까?”

“조금 전에 도착했네. 이왕이면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재미있는 구경을 놓친 것 같아.”

“대수롭지 않은 대련이었을 뿐입니다.”

“하하. 겸손이 지나치면 매력 없는 법이라네. 자네 나이가 몇인가? 서른? 마흔? 적어도 그 이상일 거 같지는 않군. 육체는 세월에 못 이겨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의식은 그렇지 않아. 깊고 무겁게 갈린 의식만이 노쇠 하는 육체를 부여잡아 그 위의 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지. 천재라 칭해지던 나도 반백을 넘어서야 겨우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경지이네. 대수롭지 않다? 아니지. 지극히 놀라운 일이라네.”

쉔의 눈동자가 쿤의 몸을 훑어갔다.

단순한 칭찬만이 아니었다. 네놈은 누군데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발을 들였느냐. 일종의 추궁이었다.

“워낙 험하게 굴러서 남보다 빨리 늙은 모양입니다.”

“……흠. 확실히 입 놀리는 건 그래 보이는군.”

“그보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공왕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쉔은 말 그대로 밀착 호위.

어지간한 일에는 공왕의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다.

“공왕께서 친히 너희 둘을 보자고 하신다.”

“사적인 자리입니까?”

“측근 몇 명 정도만 자리 할 거네.”

“공을 치하하고, 보상을 공적으로 논할 생각은 없으신거 같군요.”

“한 명은 반역자요, 다른 한 명은 제국에서 건너온 용병이라. 공적으로 치하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네.”

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빛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건 아니다. 처음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은……지금도 살기 위해서라고 해 두자. 세이혼에게 눈빛을 보낸 뒤 쉔의 옆으로 이동했다.

“갑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게.

#

쿤이 도착한 곳은 오래된 벽돌집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방치되어, 사람의 손이 안 닿은 듯 보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허리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공왕이라는 인물과 만나기에는 적합한 곳으로 안 보였다.

혹시 속임수 같은 게 아닐까? 공화국의 명예를 위해서 반역자였던 세이혼과 일개 용병인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안내를 하는……

“들어와라.”

쿤의 생각이 그렇게 깊어지고 있을 찰나.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 쿤은 그것이 공왕의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고, 어스름한 조명에 일렁이는 내부의 모습이 드러냈다.

오래 된 원형 탁자 주변으로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나마 상석이라 부를 만 한 곳에 앉아있는 것이 바로 공왕.

쉔이 선두에 서고, 쿤과 세이혼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아, 그러고 보니 아도란은?’

별관을 떠나기 전에 구석에 있던 개미랑 노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혼자 둬도 괜찮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다시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개미가 조금 더 길게 놀아주기를 바라며 걸음을 놀렸다.

“그곳에 앉아라.”

낡은 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쿤과 세이혼이 나란히 앉았다.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씩 훑었다. 몇 명은 안면이 있고, 다른 몇 명은 없었다. 어떤 의도로 모인 장소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다른 말에 앞서서 두 아이를 지켜준 것에 감사를 하고 싶네.”

고개를 든 공왕의 첫마디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그리고 도착해서도. 참 많이 이야기를 하더군. 자네가 없었다면 결코 살아서 돌아 올 수 없었다고.”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일이라. 자네는 용병 아니던가? 남 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깨우치고 있을 텐데?”

“손 떼고 물러난다고 될 일이 아님은 알고 있으니까요. 두 분을 모시고 오는 게 최선이라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게 맞는 답이야. 자네는 자네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거지.”

툭. 탁자를 가볍게 두드린 공왕이 손짓을 했다.

좌측에 앉아있던 얼굴이 하얀 남자가 몸통 만 한 자루를 탁자 위로 올렸다. 삐걱 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꽤나 무거운 것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였다.

“열어 보아라.”

쿤이 자루 끝을 풀어 안을 살폈다.

황금. 온통 황금이었다. 자루 안을 손으로 뒤져봐도 보이는 건 황금뿐이었다. 이 정도의 양이면 작은 마을 정도는 통째로 사고도 남았다.

“보상이다. 용병이라면 응당 대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맞겠지.”

“음……”

“어떤 의도였든지, 결과를 만들었다면 대가를 받아야지. 세이혼.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반역자로 몰려 쫓겨난 입장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거겠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통령의 권한으로 자네의 죄를 지워 주겠네.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는 거지. 암살 모의를 사전에 방어하고, 딸아이를 무사히 데리고 온 공이라면 사면의 권한을 사용하더라도 의회의 목소리를 누를 수 있을 거네.”

“사면의 권한을……”

“그리고 이것.”

감격하는 세이혼의 목소리 뒤로 은색 독수리가 비상하는 모습이 새겨진 휘장을 내밀었다.

세이혼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잘게 떨리는 손. 그에게는 단순한 휘장이 아니었다.

“하푼. 하푼의 상징 아닙니까?”

이미 사라진 하푼의 상징.

그것을 공왕이 다시 꺼내든 것이다.

“과거 나는 큰 잘못을 저질렀네. 전쟁의 희생양으로 자네를 던져주자는 의회의 말을 거부하지 못한 거지. 그건 잘못 된 거야. 너무도 잘못 된 일이었지……”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연하네. 나는 그날 이후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단 한 시도 잊어 본 적이 없어. 제국에 볼모마냥 보냈어야 하는 우리 두 딸과, 짓밟힌 깃발마냥 희생양으로 삼았어야 하는 자네 부대까지.”

공왕이 손을 뻗어 세이혼을 잡았다.

감격일까? 세이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눈시울이 붉고 목울대가 계속 위아래로 흔들렸다.

“자네가 그 일을 용서 할 수 있다면 부디 이 휘장을 다시 맡아 주게나.”

“……휘장을? 설마 하푼을 다시 만들겠다는 의미입니까?”

“다시 만들겠다는 게 아니네. 이미 재건을 했지. 다만, 그 책임자를 찾지 못하여 발족하지 못했을 뿐이라네.”

“의회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네. 때만 기다리고 있었지.”

공왕의 눈이 번뜩였다.

한 때의 실수로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 공국의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을 인내하여 때를 기다렸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쿤은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승냥이를 피해 도망쳤더니,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이다. 이곳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았다.

“잠시. 잠시……생각 할 시간을 주십시오. 면책을 바란 것은 맞지만, 이런 일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푼이라니……”

“이해하네. 생각 할 시간을 주도록 하지. 길게 준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세이혼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푼의 부활이라는 것은 공왕파가 무기를 꺼내든다는 의미다. 의회파를 치기 위한 시도. 라라와 루루의 등장으로 흔들린 판에서 기회를 잡으려 하는 것이다. 비정하지만, 그것이 정치인일지도 모르겠다. 과거, 자신의 잘못으로 해체 된 부대의 장을 정면에서 다시 채용하겠다고 말 하는 뻔뻔함까지도.

“그리고 자네는……”

그렇다면 그 뻔뻔함으로 무엇을 말 하려 함일까.

평생을 가도 만져보지 못할 금덩어리로 눈을 현혹시킨 채.

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작가의 말

재회 편 끝입니다.

다음으로, 움직임 편이 이어집니다.

* 세이혼은 현재 충성심이 높지 않습니다.

* 사이트 상태가 괜찮은 것 같으니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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