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12화 (112/240)

쿤 일행은 쉔의 주도하에 포위되었다.

즉시 무기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이상 싸울 이유는 없었다. 일행을 확인한 쉔이 라라와 루루를 보고는 그대로 한 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공화국 체제에서는 분명한 과례. 하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쉔은 공화국이 공국이었을 시절부터, 공왕과 그 전대의 왕을 지켜왔던 인물. 라라와 루루가 태어났을 때도 곁에 있었으며 그녀들을 제국으로 보냈을 당시 행렬을 책임졌던 것도 그다. 단순히 인상착의를 그린 그림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가 느끼는 바. 라라와 루루를 보는 즉시 무릎을 꿇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포위에서 호위로 바뀌었다.

줄줄이 꿰여 공왕의 행렬로 이동했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물러나고 단단한 형태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것은 모두 마법. 아도란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끼익……

그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금색 테로 장식한 부츠가 모습을 드러내고, 잘 다려진 벨벳 하의와 자주색으로 무늬를 낸 셔츠가 그림자 밖으로 밀려나왔다. 단정하고 품위 있는 복색.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안의 남은 몸도 밖으로 모두 나왔다.

큰 키와 인자해 보이는 얼굴.

세월은 피할 수는 없었는지 귀밑이 희끗하고 주름이 가득했지만, 눈빛에는 힘이 있고 앙다문 입술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과연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느낌을 자아내는 외모였다.

“너희 둘이 라라와 루루겠구나.”

입술이 떨어졌다.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일행을 향해 흘러나왔다. 라라와 루루가 몸을 살짝 떨고 물러났다. 둘에게는 부친. 하지만 젖도 떼기 전에 부모에게서 떨어져 제국에서 생활했다. 기억에 무언가 남을 만 한 시간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생이 많았다.”

“아……”

“어, 어.”

그가 단번에 다가오더니 두 소녀를 품에 안았다.

피의 끌림이라도 있는 것일까. 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공왕의 눈도 붉었다. 두 손으로는 꽉 안은 채 입술을 잘게 떨었다.

‘아버지와 딸인가……’

쿤이 세이혼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 장면을 유심히 바라봤다.

예상했던 결과대로 일이 풀렸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끝났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기분 탓일 수도. 아니면 새롭게 생긴 초감각이 작동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들어라!!”

그때, 공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라와 루루를 양 팔로 감싸 안은 채 무리를 보며 외치고 있었다.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단원들 조차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오늘 나는 잃어버렸던 두 딸을 찾았다!! 힘이 없어 빼앗겼어야 하는 두 딸.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내 품에 돌아왔다. 이는 운명이며, 신명이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는 의미!!”

패도적인 기운이 공왕의 몸에 뻗어나갔다.

과연 이 사람이 의회의 힘에 눌려서 허수아비처럼 존재하는 그 공왕이 맞다는 말인가. 쿤은 의아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알려라!! 그리고 기뻐하라!! 잘렸던 조각이 다시 돌아왔음을!!!”

와아아아!!!

공왕이시여!!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의 말 하나에 찬양하며 환호했다. 하늘이 돕는다는 기쁨일까. 아니면 굳건한 공왕에 대한 신뢰와 환희일까. 한 걸음 떨어져 보고 있던 쿤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변했군. 내가 알던 공왕이 아니야.”

옆에서 들려오는 세이혼의 목소리.

그의 말 대로, 무언가 변해 있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었다.

#

일행을 포함한 공왕 행렬은 행사를 취소하고, 바로 수도로 머리를 돌렸다.

분지 마을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단은 즉시 회군 명령을 받고 행렬로 합류했다. 메르한은 자발적인 투항으로 구류 중. 예하 기사단원들은 일단 보류 처리되어 수도로 송환되었다. 대장이 암살을 계획하고 있던 이야기에 혼란이 퍼졌으나, 공왕이 나서 진화한 덕분에 여파는 크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고 정상참작을 해 준다.

기사단은 보존하게 하며, 명예를 잃지 않게 하겠다.

두 가지의 조건은 투항한 메르한도, 기사단원도 일단 만족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신을 노렸던 적에 대한 처사 치고는 굉장히 너그럽지만, 효과는 훨씬 좋았다. 수도로 복귀하는 행렬 중 공왕을 존경하지 않는 인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쿤과 아도란. 그리고 세이혼은 따로 격리되어 이동했다.

암살시도를 사전에 막고, 라라와 루루를 대리고 왔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절차라는 말에 무시되었다. 정확한 사실 확인 전까지는 참아 달라는 의미. 굉장히 불편했지만, 공왕이 직접 와서 말 하는 차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스무 날.

쿤은 공화국의 수도로 들어 올 수 있었다.

#

공화국의 수도는 [데흐자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옛 말의 의미를 따지자면 빛이 지지 않는 도시. 영광이 계속되어 후대까지 이어지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의미에 걸맞게 화려한 자태를 자랑했다. 수도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도 있지만,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 등이 조금씩 손을 보태다 보니 도시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변했다.

하늘에 닿을 듯 뻗은 첨탑과 빛을 반사시키는 청동색 가교들은 마치 붓을 그어놓은 듯 유려한 모습이었다. 도시 바닥을 수놓은 청석이나 조각한 듯 이어지는 건물들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쿤은 데흐자흐가 처음이었다.

화려한 광경을 눈에 담으니 쉬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굉장하군. 대륙에 거대한 수도가 셋이 있으나,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공화국의 것이다. 이 말이 틀리지 않았어.”

“공국시절부터 전해지던 전통이지. 예술을 사랑하고 꾸밈에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 이보다 더 멋진 모습을 봤을 수도 있을 거네.”

“이보다 더한 광경이라. 어쩌면 눈이 멀지도 모르겠군.”

“……이미 눈이 먼 자들도 있지.”

세이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쿤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청색 도로 끝에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왕의 행렬을 정면에서 환영 할 수 있는 자들은 얼마 없다. 그것도 수도에서.

“선두에 있는 자가 의회를 총괄하는 의회장 루터다.”

“음.”

반백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툭 치면 넘어 갈 거 같은 외견이지만, 눈빛이 굉장히 매서웠다. 공왕의 행렬이 다가옴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의회장께서는 이곳까지 무슨 일인지요?”

“통령께서 행사를 취소하고 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년에 한 번 있는 가장 큰 행사를 취소한 이유를 듣고 싶군요.”

“서신으로 전한 것으로 아는데요?”

“암살을 막고, 두 자제분들을 찾았다고 했습니까? 대단하군요. 기적이 한 번에 둘이나 들이닥치다니. 누가 보면 일부로 짠 줄 알겠습니다.”

“하하. 그만큼 하늘이 저를 돕고 있다는 얘기겠죠. 안 그렇습니까?”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늙은 의회장도, 공왕도 한 점의 물러남이 없었다.

“그만하시지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품 넓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신관복과도 닮아 있었다. 목 뒤로 깃 같은 것이 달려서 치렁치렁 늘어졌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와 비슷한 복장의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도미닉 대신관. 그대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공왕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고, 오래 전에 떠나보낸 두 따님을 찾았다 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의회장이 하는 말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뿐인 기념행사를 그리 공교로운 일로 취소를 하자 덜컥 역정이 나신 것이죠.”

“흠. 그렇다 한들 통령의 행렬을 이리 가로막고 따져 묻는 건 의회의 역할 밖이라 보입니다만?”

“설마 그런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환영 차 나온 걸음이 조금 틀어졌을 뿐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의회장?”

“……흥!”

답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났다.

도미닉이 부드럽게 웃으며 의회의 인물을 물리고, 그 틈으로 공왕이 지나갔다. 공왕과 의회. 공화국을 양분하는 세력 사이를 개인이 중재하고 있는 모습.

쿤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이혼, 저자가 누구인지 아나?”

“음.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대신관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짚이는 바가 있다.”

“공화국은 국교가 따로 없는 것으로 아는데?”

“분명히. 하지만 중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가 없던 건 아니지.”

“포교에 영향이 있겠군. 그래서 어떤 신을 믿고 있는 거지?”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닌가? 그 이름을 따서 만든 부대까지 있을 정도이니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는데.”

“부대? 설마……굴락?”

세이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쿤이 탄성을 닮은 신음을 토해냈다. 굴락이라니. 이단으로 생각되는 그 종교의 수장이 공왕과 의회장을 중재시킬 정도의 위치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설사 국교가 아니라도 이는 달가운 소식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어찌해야 하는가.

쿤이 머리를 굴리고 있자, 세이혼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급한 일? 이단일 거라 생각되는 인물보다 급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일까.

“자네의 거취 말일세. 라라와 루루는 이제 통령의 딸로 취급을 받아. 이곳에 머무르거나 사절이 되어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겠지. 우리가 할 일은 끝났어. 대가로 공왕에게 각자의 것을 요구하면 더 이상의 접점조차 없겠지. 그렇다면 그 후에……”

쿤이 눈을 깜빡였다.

세이혼이 꺼낸 주제는……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가장 미루고 싶던 질문이었다.

#

쿤과 세이혼. 그리고 아도란은 통령이 머무는 저택의 별관.

통칭 장미의 관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몇 가지 조사를 마치고 난 뒤, 공왕과의 대면이 이루어질 거라는 통보도 받았다.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 방도 매우 고급의 것이었고, 먹고 마시는 것도 매우 양질이었다.

하지만 공왕과 만나고 난 뒤 지금까지.

쿤은 단 한 번도 라라와 루루를 만날 수 없었다.

“완전히 격리를 하겠다는 건가? 마음에 안 드는군.”

“예상했던바 아닌가? 통령의 딸이든, 황제의 손녀든. 어느 쪽으로 판단해도 우리가 가까이 할 신분은 아니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다만, 죄인처럼 가둬 둔 것이 마음에 안 들 뿐이야.”

쿤이 마시던 술병을 세게 내려놓았다.

예상했던 대로 일이 풀렸다. 라라와 루루는 무사히 공왕과 만났고, 일행도 안전해졌다. 굴락의 인물이 걸리지만 쫓기던 때 보다야 훨씬 상황이 낫다.

적어도 대비하던 여러 상황 중에서는 나은 축에 속한다.

‘그런데 왜 기분이 안 좋지?’

뭔가 거북했다.

모험을 동경하던 어릴 적 꼬마도 아니고, 어깨를 맞대던 사람 몇이 사라진다고 슬퍼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래야 맞다. 구르며 지내오길 몇 년인가. 겨우 이 정도에서 불쾌감을 느낄 거였으면 일찌감치 도태되었을 것이다.

“쿤, 상심?”

“넌 또 왜? 심심하면 저리 가서 놀아.”

아도란이 앞으로 다가와서 빙빙 돌았다.

쿤이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쿤, 이별에 상심?”

“……무슨 소리야. 어차피 수도에 도착하면 여정이 끝나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그런 거에 상심하지 않아.”

“쿤, 상심. 첫 이별.”

“첫 이별은 무슨……”

“여기가 쿡.”

아도란이 쿤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가 무언가 반박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생각이 복잡했다.

“정이 든 모양이군.”

세이혼이 침묵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네는 본래 용병이라 그랬지? 어릴 적부터 그 바닥에서 살아온?”

“……그런데?”

“나도 그럴 때가 있었네. 특수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오로지 강함을 쫓는 일개 무인이었으니까. 하나에 매달려 다른 것은 보지 않았지.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삶이야. 오랫동안 마음 준 사람조차 없었지.”

“넋두리는 사양이야.”

“들어 보게. 그렇게 살던 내가 변한 건 결국 하푼이라는 울타리를 찾은 후였어. 솔직히 거추장스러웠지.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자꾸 발목을 잡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등을 맡기고 있더군. 처음으로 누군가를 내 울타리 안에 집어넣게 된 거야.”

세이혼이 그리운. 그리고 쓰린 감정의 웃음을 입가에 달았다.

하푼이 어찌 되었는지는 쿤도 안다. 마음에 담았던 이들의 죽음. 세이혼은 그것을 말 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 꼬맹이들을 마음에 두기라도 했다는 건가?”

“어찌 알겠나. 내 마음이 아닌데. 하지만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새 그들이 자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겠지.”

“……”

“다 그렇게 겪는 거네. 아프고 힘들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 허울 좋은 충고일 뿐이지만, 결국 그것뿐이 답은 없겠지.”

“그렇게 끝나는 일인가?”

세이혼은 답을 하지 않았다.

쿤이 입가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집어 삼킨 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화려한 조명과 번듯한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험지에서 씻지도 못한 채 흙먼지를 씹으며 바라보던 나뭇가지 가득한 하늘 천장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왠지 그때의 것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작가의 말

슬슬 사이트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까요?

안정적으로 글을 공급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과연 쿤의 앞날은...

* 내일 보고 정상이면 연참으로 찾아올게요. 아, 근데 생각해보면 저 매일 연참하고 있지 않아용? 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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