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이라.”
테이블 위에 부서진 파편들이 놓여 있다.
가지고 다니던 검은 돌에 톡톡 떨어뜨려 놓으니 하나로 합쳐졌다. 이제는 한 손으로 다 쥐기 힘들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이것에 정수를 부으면……
모아 두었던 정수를 꺼내서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흰 빛이 찰랑거리며 안으로 채워 들어갔다. 충만해지는 느낌. 비어있던 곳이 채워지지는 기분이었다.
“흠.”
쿤이 열심히 검은 돌을 정화해 준 덕분에 정수는 꽤 많이 쌓였다.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밀어 넣었음에도 아직 꽤 많은 정수가 남았다. 벨의 상점에서 가서 고가의 물건을 한 두 개 정도는 살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생각이 있다.
프리실라라는 마법사를 통해서 검은 돌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든 생각이다. 쿤과 공통되게 여기는 것은 봉인을 하였고, 이것이 깨어졌다는 사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껍질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어.”
검은 돌이 이단을 봉인한다면, 그 자체는 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봉인을 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돌? 솔직히 납득이 안 가는 내용이다. 차라리 봉인 시킬 수 있는 껍질이라 말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검은 돌만이 아닌 신의 힘 역시 같은 취급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단과 신의 힘은 같은 용기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내게 힘을 준 존재의 국한되는 건지, 다른 신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단과 신이 한 곳에서 나왔다는 건 아무래도 맞는 거 같다. 그렇기에 검은 돌에 자연스럽게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고. 서로 거울에 비친 상과 같다면 유독 신의 힘에만 정화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단의 기운이 잔뜩 담긴 검은 바위처럼, 신의 힘을 검은 돌에 담는다면 비슷한 성질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이단은 이를 심벌로 해서 들고 다녔다. 굴락의 펜던트 같은 것. 검은 돌이 결국 신의 힘을 감싸던 껍질이었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쿤의 노력으로 정수도 많이 쌓인 바.
손에 들린 검은 돌에 힘을 부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주를 개척자로 바꾼 신의 힘 이상으로. 가지고 있던 정수를 쏟아 부었다. 빈 독에 물이 차오르듯 검은 돌 안이 채워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넣고, 넣고……계속 넣었다.
더 이상 들어 갈 곳이 없다고 느껴 질 때 까지.
그리고 그때, 한 가지 알람이 떠올랐다.
[성물(聖物)의 제작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정확하게 이런 반응을 기대 한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하던 게 나타났다.
이단의 속삭임은 탐욕을 쫓아 힘을 전파하고, 검은 돌을 내려서 상징으로 쓰게 한다. 벤타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비대장도, 베사미어도 같았다. 그들이 가진 상징은 이단의 힘이 실린 에너지원이자, 상징이었다.
[성물제작이 스킬로 등록됩니다.]
아예 스킬까지.
인고의 시간 이후로, 행동에 따라 등록된 스킬은 참 오랜만이었다. 속이 꽉 찬 검은 돌을 내려놓고는 스킬을 살폈다.
***
성물제작
힘으로 가득 찬 그리자를 변형시켜 성물을 제작한다. 형태 변형은 가능하나, 일정 수준 이하로 크기가 작아지면 효력을 상실한다. 그리자의 크기로 성물의 등급이 나뉘며, 효과 역시 달라진다.
***
결국 빈 껍질에 힘을 넣어서 상징물을 만들라는 얘기다.
효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안 나왔지만, 아마도 축성지와 비슷한 능력을 지니지 않을까 예측이 된다. 그리고 질병예방이나, 상처치유. 성스러운 힘으로 할 수 있는 이적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제작을 나눠서도 할 수 있나?”
성물제작 스킬을 눌러봤다.
사용 가능한 그리자(검은 돌)이 나타나고, 분할 가능한 사이즈와 등급이 옆으로 나란히 나왔다. 이건 마치 게임의 제작 시스템과도 유사했다. 재미있는 건 그리자를 제외한 부가 재료였는데, 딱히 망치질 없이도 특정한 형태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낮은 9등급의 크기로……금화를 부 재료로 넣은 다음에……”
9등급의 크기는 백원짜리 동전 정도다. 그 이하로는 줄일 수가 없었다.
부가 재료인 금화는 만들 성물의 형태를 상상하자, 필요한 숫자를 늘려갔다. 목걸이 형태를 상상하자 두 개의 금화를 요구했다. 중앙 부분은 금으로, 테두리와 체인은 은으로. 형태를 정하고 재료를 투입 한 뒤, 제작을 눌렀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빙빙 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상자가 열리는 듯 한 이펙트와 함께 번듯하게 만들어진 목걸이가 떨어졌다. 아주 옛날 대학교 다닐 시절에 첫 애인한테 줬던 목걸이의 형태다. 다만, 당시에는 모조 보석이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금과 은으로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다. 손에 쥐고 흔들어 보자 웬만한 수공예품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예뻤다.
“어디……”
***
9등급 성물
등급 : 9
능력 : 이단에 대한 보호(하급), 축복(하급), 신성보호(하급)
***
간단한 설명과 초라한 이름.
어차피 이름은 상관없다. 아래쪽 능력을 살폈다. 이단에 대해서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축복. 그리고 신성보호가 들어있었다. 셋 모두 이름 그대로의 능력이었다. 가장 등급이 낮은 성물이지만, 효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열개. 아니, 열 다섯 개 정도인가?”
들어간 정수의 양을 고려해 봤다.
점수로 바꾸면 1500점이다. 절대로 적은 양이 아니다. 게다가 그리자 역시 소모된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낭비라 여길 수도 있는 부분. 하지만 성물의 경우에는 매우 큰 장점이 하나 있다.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효력이 발휘된다는 점.
만약 이단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의 굳건한 마음만 믿고 손을 놓을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도 빈틈은 있는 법이다. 이 성물은 그 빈틈을 방어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미소와 서율이.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회사 식구들도 챙겨야겠군.”
마침 서율이는 크랙에 들어가 염탐을 한다고 한다.
그쪽이 정말로 이단의 소굴이라면 위험 할 수도 있다. 성물을 하나 만들어 착용하게 한다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 할 수도 있을 터. 나쁘지 않다.
“……그럼.”
몇 개 더 만들어 보자.
전보다 줄어든 그리자를 들어 올렸다.
#
“서, 선물이요!?”
하루를 쉬고, 다음날 스케줄이 비는 시간에 서율이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인적 드문 찻집에 들어가 선물이 있다고 말을 했다. 동그랗게 떠지는 눈이 귀여웠다. 내가 선물을 주는 게 그렇게 특이한 일이었나?
“그 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안 그래도 되는데……”
“비싼 거 아니야. 아는 분께 부탁해서 싸게 구할 수 있었어.”
비싼 거다. 들어간 포인트가 얼마인데.
목걸이 형태로 만들어둔 성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금과 은. 윗단은 루비로 힘을 주었다. 심플하지만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서율이가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에 들어?”
“비, 비싸지 않아요? 비싸 보이는데.”
“안 비싸다니까. 자, 돌아서 봐. 내가 해 줄 게.”
“네, 네……”
서율이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치우며 등을 돌렸다.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사람마다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 그 중에서 나는 목덜미에 설레는 경향이 있다. 부드럽게 하얀 목덜미는 마치 어릴 적 꿈꾸던 청춘 스타의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주책은……
헛기침을 하고는 목걸이를 둘러 주었다.
넉넉하게 줄을 해 온 덕에 살짝 늘어지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서율이가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하얗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삼촌.”
“고마우면 항상 하고 다녀. 아, 그리고 끝에 달린 보석이 바람에 너무 닿으면 안 좋다고 그러더라. 웬만하면 옷 안에 넣고 다녀.”
“헤헤. 그럴게요. 나만 보죠 뭐.”
다른 이단의 인물들이 성물을 눈치 챌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옷 안에 넣고 다니면 티가 나지는 않을 거다.
헤실헤실 웃는 서율이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삼촌, 삼촌. 아직 저녁 안 먹었죠?”
“뭐, 돌아가서 해결 할 생각이었지.”
“그럼 저랑 먹으러 가요. 선물까지 받았는데, 입 싹 닫으면 멋진 여성이 아니라는 말씀.”
“두 시간 있다가 스케줄 있지 않았어?”
“훗훗. 마침 취소됐다는 사실! 그러니까, 가요. 네? 네?”
테이블에 팔을 얹고 애교석인 웃음으로 조르고 있다.
이거 참. 아무리 내가 심장에 철판을 둘렀다 해도 이건 못 버티겠다.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싸! 내가 근사한 곳에서 쏠게요!”
“보통 얻어먹는 쪽에서 하는 반응 아니냐?”
“이게 다 베푸는 마음이라고요. 공덕을 쌓으면 복이 온다니까요?”
“공덕이라.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래,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다.
믿고 바르게 살며 덕을 베푸는 것. 복잡한 철학도, 높은 경지의 말도 필요 없다. 그저 작은 것을 실행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신……이 내게 바라는 것도 그렇겠지?
의자를 일고 일어나니 서율이가 냉큼 다가와서 팔짱을 끼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잘 컸구나.
#
요리 이름도 잘 모르는 식당에 들어가 코스 요리로 배를 때우고 나왔다.
하나같이 맛있기는 했지만, 조금 불편하다. 역시 나는 편한 자리에서 고기나 뜯는 게 좋다. 뭐, 서율이한테는 티 낼 수 없으니 좋다고 웃어 주었지만.
밥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한 입 때리고, 남는 시간에 근처 백화점에 들어가서 쇼핑도 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는지라 새로운 옷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었다. 서로에게 맞는 옷 몇 벌을 고르고, 과제로 도서관에서 골머리 썩을 미소를 위해 원피스 몇 벌을 골랐다.
나는 좀 길게 떨어지는 옷을 고르고 싶은데, 서율이는 유행이 아니란다. 미니가 보기 좋다나. 아무리 예뻐도 아빠 입장에서는 그게 좀 마뜩치 않다. 주변 점원들 앙케트까지 거쳐서 중간 길이의 것으로 구할 수 있었다. 서율이는 아저씨라고 막 웃었는데, 결혼하고 딸자식 생기면 다 그런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벌써 해가 떨어져 있었다.
“이제 좀 선선하네. 덥지 않았어?”
“후아. 살 거 같네요.”
서율이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가려야 한다. 유명세라는 거. 역시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아도란에게 변형 마법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그럼 슬슬 돌아갈까?”
“벌써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요 근처에 새로 만든 인공 숲 있다던데. 밤에 선선하고 좋데요.”
“괜히 돌아다니다가……”
“어? 서율 씨 아닌가요?”
그때, 낯선 목소리가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황급히 서율이를 뒤로 세우고 몸을 돌렸다. 멋스럽게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커피 하나를 든 채 서 있었다.
“서율 씨 맞죠?”
“……누구십니까? 잘못보신 거 같군요.”
“에이. 맞는데. 저 몰라보겠어요? 동락. 오동락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동락 씨.”
모른 척 넘어가려 했는데, 서율이와 이미 아는 사이 같다.
서율이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와서 인사를 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왠지 신경이 쓰였다.
“하하. 맞군요. 이야, 이렇게 또 만나네. 우리 제법 인연이 있나 봐요?”
“아, 네 뭐……”
“그런데 이쪽은 누구? 메니전가요?”
“서 준경이라고 합니다. 회사 동료……”
“아아. 그 보조팀? 메니저 맞네. 난 또 뭐라고. 혹시 몰래 만나는 애인 있으면 어쩌나 하고 마음 졸였지 뭡니까? 하하.”
……단검이 어디 있더라?
“저기, 동락 씨.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데, 좋은 데 가서 한 잔 해요. 크랙 애들 없이 우리끼리도 한 잔 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크랙?”
“남혁 씨 소개로 만났거든요. 저번에 한 번 모였어요.”
고로, 이 망나니 같은 놈도 크랙의 일원이라 이건가?
이단일까? 상징은 있을까?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거. 꽤나 경계하네요. 이봐요 메니저 아저씨. 안 잡아 가니까 걱정 마요. 그냥 가서 한 잔 하자는 건데 뭐 그리 유난인지.”
“동락 씨. 죄송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네요.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아이 참. 그냥 한 잔 하자는데 뭘 그렇게 빼요?”
서율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하자, 그가 잡자기 손을 뻗었다.
무례한 놈. 거절하는 여성한테 그렇게 대하라고 배웠나? 냉큼 손목을 잡아서 옆으로 꺾었다.
“악!! 뭐, 뭐하는 거야!?”
“메니저의 본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이거 안 놔!?”
“흥.”
나는 저쪽 세계에서 신이다.
나보다 높으면 명함을 내밀어 보든가.
“이 새끼가 진짜……!”
찌잉—!!
그 순간, 갑작스러운 울림과 함께 오동락의 힘이 폭증했다.
꺾어 둔 팔이 단번에 풀리고, 가슴팍을 밀치는 손에 몇 걸음이나 밀려나야 했다. 욱신거림이 쉬이 가시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다.
“시팔. 사람이 말로 하니까 우스워 보이지? 한 번 여기서 뒈져 볼래?”
“……”
희미하지만 느낌이 난다.
아마도 품 속 어딘가에 상징을 숨겨 둔 거겠지. 이 망나니 같은 놈도 이단을 신봉하는 것이다. 크랙 중 벌써 둘. 예상대로 그들이 전부 이단이라는 가정에 힘이 붙어간다.
구겨진 옷을 탁탁 피며 허리를 세웠다.
“실수했군요.”
“……엉?”
“사과의 의미로 제가 한 잔 사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뭐, 뭐야. 크흠. 진작 그렇게 나오든가.”
상대가 크랙의 일원이고 이단이 확실하다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는 것이 좋다.
마침 성격도 단순한 거 같고. 잘 구슬리면 정보를 뽑아 낼 수 있을 거 같다.
서율이가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 어떻게 하게요?”
“호구놈 하나 털자.”
“……와. 무서워라. 알았어요, 그럼 제가 마담 역할을 해 드리죠.”
쿵하면 짝.
“삼촌이 실수 한 거 같으니까, 가볍게 한 잔 하는 거라면 허락할게요.”
“하하. 이래 봐도 신사입니다. 제 매력이 뭔지를 알게 해 드리죠.”
그래, 그래. 어련하겠냐.
“제가 아는 조용한 술집이 있습니다.”
아는 거나 다 털어 놔라.
※작가의 말
2인조 사기단 출동!
* 현대편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음은 알지만 스토리상 어쩔 수 없네요.
* 요즘 메르스 때문에 시끄럽네요. 다들 건강에 유의하시길.
* 서율이는 몸매가 착합니다.